#84
익숙한 비명이었다.
-아아악!
강제로 꿈에서 깨어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고 강하게 흔들던 아버지.
-넌 절대 돌아갈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들리는 것은 거친 아버지의 숨소리뿐.
어머니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그저 전해 들었던 이야기일 뿐인데 언젠가부터 그 이야기는 형체가 되고 기억이 되어 윤을 찾아왔다.
잠이 든 어머니를 억지로 깨우던 사용인들.
잠에서 깨어나면 끅, 끅 서러운 숨을 뱉던 어머니.
아버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달래려 노력하는 사용인들.
울다 지친 어머니가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또다시 몸이 흐려지면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점점 더 주기가 짧아지던 꿈. 마지막에 와서는 잠이 들 때마다 찾아오던 하얀 손.
히스테릭해지던 어머니와 아버지.
본래도 왕은 윤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어머니는 달랐다.
평소와 달리 자신을 만나 주지도 찾아와 주지도 않던 어머니를 만나러 방을 찾았다가 문밖에서 들은 어머니의 억누른 울음소리.
그에 주변을 닦달해, 아니 협박해 알아낸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뒤로 윤은 억지로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사이 변해 있었다. 깨어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윤에게 최선을 다하던 어머니였으나, 그녀는 자신만의 세상으로 도망을 간 것 같았다.
윤은 빠르게 변하는 주변 풍경을 메마른 눈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과 달리 실제로 겪은 내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윤은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되뇌기 위해 혼잣말을 했다.
“서호, 그건 거짓말이었어.”
출산 후, 어머니가 꿈을 꾸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그 꿈을 꾸지 않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른 후였다.
그리고 지금 윤의 앞에 있는 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
자신이 어머니가 잠들지 않게 살피겠다며 그 옆을 지키던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는 어머니의 옆에서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어린 시절의 나.
-윤, 윤아.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러주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들고 눈을 맞춰오는 어머니는 전에 없이 맑고 깨끗한 눈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무룩하던 어린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지만 이어진 어머니의 말에 아이의 웃음은 깨졌다.
-나는 돌아갈 거야. 돌아가고 싶어. 나는 이곳을 떠날 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가, 그도 아니면 남에게는 절대 하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자게 해줄래? 자고 싶어. 제발. 이 어미를 자게 해줘. 응?
푹 꺼지고 퀭한 눈매와 어깨를 감싼 억센 힘. 하지만 희망에 젖어 있던 그 눈에 윤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잠들면, 어머니를 깨우지 않으면 이대로 그녀가 사라진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버렸으니까.’
제발 깨우지 말아 달라고, 절대 날 깨우지 말라고, 오로지 돌아간다는 것에만 사로잡혀 있던 맹목적인 눈.
자식인 자신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어머니.
그래서 윤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았다. 이대로 어머니를 옆에 둬 봤자 다정하고 착한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신은 더 이상 내 어머니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은, 그 단꿈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꺄아악!
발작을 일으키듯 갑자기 눈을 뜨고 몸을 벌벌 떨던 어머니. 그리고 곧 화들짝 놀라 방 안으로 들이닥친 사용인들이 어머니의 온몸을 붙들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는 사용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면서도 악을 썼다.
-왜? 어째서!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에 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열 살의 어린 꼬마가 보기에는 좋지 않은 풍경이었다.
사용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윤의 유모가 서둘러 달려와 윤을 끌어안았다.
-보지 마세요, 왕자님!
다른 귀족들이나 왕족들에게는 어미만큼이나 소중한 유모라지만 윤에게 유모는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채워주는 사용인일 뿐이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다른 이들과 달리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자신과 함께했으며 헌신적이었다.
그래서 윤은 단 한 번도 유모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안아 본 적이 없었다. 윤은 그를 꽉 안고는 서둘러 방을 나서려는 유모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다정하게 등을 토닥거리는 손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을 치기 전 아버지가 도착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어.
순간 비명이 뚝 끊기고 윤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를 다시 돌아봤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정말 도망갈 수 없어. 이제 이 짓도 끝이야.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광기 어린 눈이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어머니가 입술을 달달 떨었다.
아버지가 떨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나의 그레이스. 넌 영원히 그레이스로 살게 될 거야.
그 순간 끊겼던 비명이 다시 시작됐다.
-꺄아아악!
궁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었다. 어머니에게서 흘러나온 절망과 비탄이 소리를 타고 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와….
쨍그랑!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소리의 향연과 함께 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어린아이와 달리 윤의 눈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잔잔하게 숨을 내뱉던 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안겔을 만날 준비를 시작했다.
***
안겔은 이제 됐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왕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대화에서 안겔이 얻을 수 있던 정보는 하나였다. 후궁 그레이스가 꿈을 꾸지 않게 된 것은 임신 후가 아니었다는 것.
‘그럼 도대체 어떤 사건을 계기로 꿈을 꾸지 않게 된 거지?’
물론 안겔은 지금 왕자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없음을 알았다. 오늘 왕자가 알려주기로 마음먹은 건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이쪽에서 정보를 줄 차례였다.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신가요?”
안겔의 물음에 왕자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황제와 서호의 사이가 궁금해.”
안겔은 대놓고 의아함을 드러냈다.
“거울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요?”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는 정보 하나에 하나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긴 참이었다.
그런데 거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호와 황제의 사이가 궁금하다니?
안겔의 물음에도 왕자는 태연했다.
“붉은 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둘 사이 역시 거울과 큰 연관이 있는 것 같던데.”
“…그건 그렇죠.”
붉은 실은 두 사람 간의 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었고 붉은 실에 의해 거울이 작동되는 셈이니 완전히 연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한데.’
혹 다른 뜻은 없는 건가? 이 정보를 말함으로 인해 얻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유심히 왕자를 살피는데 그가 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답은?”
안겔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보에 뭔가 특별한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가 좋으시죠. 서호님께서는 폐하께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고 폐하께서도 서호님 앞에서는 변하시니까요.”
“서호를 데려올 때 황제의 모습은?”
“기록과 비슷했습니다. 거울 앞을 떠나지 않으려 했죠. 또….”
안겔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전해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무리 로제타가 싫다지만 그래도 타국의 왕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였다.
“많이 우셨죠.”
“울었다고?”
왕자가 황당해하는 게 보였다. 사실 이 이야기는 황궁에 꽤 퍼져 있는 이야기였다.
“네. 황궁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죠.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는 이들이 몇 있고요. 성이 떠나가라 울었다던데, 서호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일주일 정도요.”
“그자가 울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는 왕자를 보며 안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서호님이 그분에게 약하신 걸 테죠. 첫 만남이 울음바다였을 테니.”
그 만남으로 인해 마음이 약한 서호는 연약해 보이던 로제타에 대한 안쓰러움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작게 혀를 차던 안겔은 이어지는 질문이 없자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 정보가 도움이 되셨나요?”
정말 쓸모없는 정보들이었다. 굳이 안겔이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정보였고. 하지만 왕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사실 왕자는 아까 헤어질 때부터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꿈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