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아직 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은 사진을 훑던 시선을 돌려 왕국에서 온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지난밤 살펴본 보고서에는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의 상태, 그리고 수행원들과 함께 왕국으로 향한 신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물론 그중 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머니의 상태에 관한 보고였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상태에 변화가 없다는 것에,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는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윤의 손에서 시작된 불길이 빠르게 보고서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보고서는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자연스레 다시 사진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붙잡은 윤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긴 보고서를 살피느라 밤을 새웠다.
‘잠깐 쉬어도 되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윤은 빠르게 방으로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방 주변을 감싼 마나 덕이기도 했지만 매우 급한 일인 듯 사용인이 전혀 발소리를 줄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온 노크 소리.
“솔님. 서호님과 관련된 일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매우 급한 일입니다.”
순식간에 피곤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벌컥, 문을 열자 황제의 직속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장, 폐하의 방으로 함께 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황제의 방. 개인 방으로 오라는 소리였다.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은 윤은 빠르게 방을 나섰다.
사용인이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조금씩 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황제의 방에 자리한 인물들을 살핀 윤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나요?”
차갑게 굳은 표정의 황제와 안겔,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으나 조금 피곤해 보이는 서호까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윤의 생각만큼 최악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윤은 빠르게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될 말을 정리하며 서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윤이 자리에 앉자마자 황제가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않고 입을 열었다.
“꿈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꿈이요?”
사용인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않아 급한 일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윤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질문이었다.
황제가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후궁과 이방인들이 꿨다던 꿈 말이야.”
지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오늘의 일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꿈.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발자국.
윤이 서호를 돌아봤다.
“그 꿈을 또 꿨어?”
윤은 빠르게 서호의 몸을 살폈다. 옷 위로 드러난 피부가 상하지 않았는지,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는지 찾고 있는데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그래도 아파 보이진 않는 서호가 답했다.
“응. 오늘 그 꿈을 꿨는데 나랑 그레이스의 꿈을 비교해 보고 싶어서.”
“…몇 가지 들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해.”
그러자 이번에는 안겔이 끼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예요.”
힐끗 안겔을 바라보는데 로제타가 질문을 던졌다.
“후궁이 꿈을 꾸는 당시를 목격한 적이 있나?”
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다.”
“당시 상황은 아나? 왕의 반응은?”
황제가 조급해 보였다. 윤은 방 안의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방에 늘 사용인들을 들여놓으셨습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순간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윤이 진정하기 위해 숨을 작게 내뱉는데 안겔이 말했다.
“엇비슷한 것 같군요.”
뭐가 비슷하다는 걸까? 머리가 굳은 건지 간단한 추론조차 힘들었다. 윤이 미간을 좁히는데 서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몸이 흐려졌다고 하더라.”
그런 쪽이었다. 윤은 뚜렷하고 현실감이 가득한 서호의 몸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렇구나.”
그때 서호가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 그 눈에 약간의 걱정이 어린 것을 보니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정해야 해.’
지금은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어야 할 때였다. 이렇게 흔들리다가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입 밖으로 꺼낼지도 몰랐다.
윤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괜찮다는 듯 서호를 바라보자 그가 다행이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더 당혹스럽고 무서울 텐데 자신을 신경 쓰다니, 겁이 없는 건지 너무 착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닌 척하며 냉정하게 선을 긋다가도 몸에 밴 다정함인지 서호는 종종 자신에게까지 그 따뜻함을 보여주곤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조차.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튀어나오는데 서호가 질문했다.
“그레이스가 꿈에서 어떤 식으로 깨어났는지 물어도 될까? 자연스레 꿈이 깬 건지 누가 깨운 건지 같은 거 말이야.”
“처음 몇 번은 어머니가 손이 무서워 도망을 가시다 꿈에서 깨어났고 그 이후로는 사용인들이 어머니가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억지로 깨웠다고 했어.”
이번에 한 답에는 거짓이 없었다. 서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억지로 깨우는 게 가능해?”
“응.”
서호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안겔이 나섰다.
“꿈이 사라지기 전 전조 증상은 없었나요?”
전조 증상이 있었을 리가. 윤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안겔이 황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왕국에는 붉은 실을 볼 수 있는 이도 없었고 그에 대해 아는 이도 없었으니 손이 몸에 닿았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를 확인할 수는 없네요.”
윤은 재빨리 말을 더했다.
“어머니께서 꿈에서 깨어나실 때 종종 몸에 멍 자국이 생기셨다고는 들었는데….”
혹 서호의 몸에 상처가 났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윤의 걱정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또 다른 건?”
“…처음에는 손을 두려워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셨죠.”
윤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왜 어머니가 그 손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어머니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윤은 생각을 멈추고 서호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몸은 괜찮아?”
서호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답했다.
“손이 닿지는 않았어. 그 전에 꿈에서 깨어났거든.”
“그 멍은 치료가 잘 되지 않는다던데.”
어머니의 몸에 생겼던 흔적들을 떠올리며 말하자 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성력이 통하지는 않았어. 마법도 그렇고.”
순간 신력은 효과가 어떻냐고 묻고 싶었지만, 곧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가진 신력이 파괴에 치중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파괴에 초점이 맞춰진 능력이라니.’
꺼림칙함만 늘어났다. 하지만 윤은 그 감정을 숨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이야. 많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요.”
끝에 가서는 황제를 돌아봤으나 그는 조금 전과 달리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답이 없는 그 대신 서호가 대꾸했다.
“아니야, 윤아. 큰 도움이 됐어.”
안겔에게도 고맙다고 말을 전한 서호가 황제를 불렀다.
“로제타. 이제 더 물어볼 건 없죠?”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다시 안겔과 윤을 돌아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래. 이른 아침 갑작스레 부른 것은 사과하지. 이만 돌아가 보게. 나와 서호는 좀 쉬어야겠어.”
윤의 시선이 살짝 떨리는 황제의 손과 그 위를 덮는 서호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떨림이 잦아들었다.
윤이 어느새 서로를 맞잡은 두 손을 빤히 바라보는데 안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세요. 서호님.”
윤이 안겔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쉬어, 서호. 폐하께서도 놀라신 모양인데 푹 쉬십시오.”
“그래.”
방을 나서자 황제의 시종이 두 사람을 따라 나왔다. 윤은 그들의 뒤를 따르려는 것 같은 시종의 모습에 손을 저었다.
“나보다는 저 두 사람을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사용인들도 있지 않나?”
“그게 좋겠군요.”
안겔까지 나서서 그리 말을 하자 시종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사과를 건네고 저 멀리 지나가고 있는 사용인을 불러들였다.
직속 시종이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방 안으로 사라진 뒤 안겔과 윤은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사용인의 뒤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방이 있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사용인을 돌려보냈다. 사용인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안겔이 기다렸다는 듯 윤을 돌아봤다.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죠?”
그랬다. 두 사람 모두 황제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을 테니까.
다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애당초 두 사람은 서로에게도 모든 걸 밝히지 않았으니 서둘러 만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윤이 피곤함을 숨기지 않으며 답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게 뻔하니 한숨 자고 나서 만나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던 안겔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안겔까지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몸이 피곤했는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대화 때문에 정신까지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윤은 제대로 몸을 씻지도 않고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지금 잠이 들면 무슨 꿈을 꿀지 알지만 조금 뒤에 있을 안겔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조금이나마 피로를 덜어내야 했다. 윤은 몰려오는 수마를 피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꿈이고 꾸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동시에 익숙한 꿈이었기에 이제는 상처를 받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윤은 제국에 오고 처음으로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