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대신 서호는 가슴팍을 두드리던 손을 올려 로제타의 눈을 가리던 손수건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이제 안 무서운데.”
시선을 부딪친 서호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그가 느낀 것과 실제로 본 것을 이야기했다.
“새벽은 정말 강하더라고요. 밝고 깨끗한데 단단해요. 손이 나한테 손끝 하나도 못 대고 사라졌어요.”
로제타와 맞잡은 손에서 하얀빛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손에서 시작된 기운은 로제타의 팔을 타고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빛이 로제타의 얼굴까지 닿자 꼭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퉁퉁 부어 있던 눈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때 느꼈어요. 당신의 힘이 나한테 있는 한 꿈은 계속돼도 내가 끌려가는 일은 없겠다고요.”
“응.”
하지만 로제타는 또 울먹거리고 있었다. 서호가 얼른 말을 더했다.
“울지 말고요. 응? 정 걱정되면 안겔을 불러 봐요. 그리고 붉은 실을 확인해 봐요. 잘 연결되어 있는지.”
로제타의 시선이 서호의 발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까보다 확실히 안정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답이 나옴과 동시에 기다리던 아리스와 푸티가 등장했다. 서호는 신력의 사용을 멈추며 그들을 방 안에 들였다.
푸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들었는지 방으로 들어선 아리스는 딱히 놀란 기색 없이 곧장 로제타를 치료했다.
“됐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본래대로 돌아온 로제타의 눈을 살피며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또 울면 안 달래줄 거예요. 안겔을 만나러 혼자 나갈 거고요.”
서호가 경고하자 로제타가 눈에 힘을 줬다. 그 모습에 안도한 서호는 빤히 그를 바라보는 푸티에게 부탁했다.
“안겔에게 최대한 빨리 만나자고 이야기를 전해줄래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요기할 것도요.”
“네.”
서호가 아리스를 돌아봤다.
“아리스도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식사를 하실 거라면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불려온 그를 서호가 붙잡았다.
“같이 들어도 되는데.”
“저는 이미 먹었습니다.”
실제로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먹었다는 사람을 또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푸티와 함께 있겠습니다.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네.”
푸티와 아리스가 방을 나서고 서호가 다시 로제타를 돌아봤다.
마법 덕에 로제타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서호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시선이 움직이고, 푸티가 가져온 아침을 먹으면서도 내내 서호만을 바라보느라 제대로 식사하지도 못했지만 일단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였다.
‘이 이상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서호는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다시 손을 붙잡는 로제타의 손을 단단히 맞잡으며 그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
서호는 조금 굳은 얼굴로 방에 들어서는 안겔을 반겼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딱딱한 저 미소는 당황 때문일 것이다. 로제타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려서, 서호는 결국 안겔을 그들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서호님.”
도대체 꿈을 꾼 것과 방 밖으로 나가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지금은 로제타가 안정되기를 기다리기로 했기에 서호는 순순히 로제타의 고집을 따라줬다.
방에는 아리스와 함께 수업하기 위해 마련한 커다란 테이블이 하나 있었기에 대화를 할 만한 장소는 마련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서호는 차를 내놓고 조용히 뒤로 물러난 푸티와 그런 푸티의 옆에 서 있는 아리스를 돌아봤다.
사실 아리스와 푸티도 새벽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지는 못했기에, 안겔이 오기 전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했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푸티는 본인이 시종이라는 걸 강조했고 아리스는 최근 그가 서호의 호위 역할을 주로 맡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리스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말했다.
‘뒤로 빠져 있으면 신녀님의 반응을 더 잘 볼 수 있을 겁니다.’
서호는 로제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다가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그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러서 놀라셨죠?”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안겔이 먼저 입을 연 서호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서호만을 바라보고 있는 로제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방에 자신을 초대한 것부터 지금의 이 상황까지. 충분히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호는 힐끗 시선을 돌려 로제타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뒤 말했다.
“사실 제가 다시 꿈을 꿔서요.”
“…네?”
안겔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일단 서호가 볼 때는 거짓 없이 정말 놀란 것처럼 보였는데 아리스나 푸티의 감상은 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뒤를 돌아 둘에게 의견을 물을 수도 없었기에 서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얀 손이 나타났어요. 저번처럼 발목을 붙잡거나 몸에 손이 닿지는 못했고요.”
안겔의 시선이 빠르게 서호의 발목 어귀로 내려갔다. 서호는 발밑을 빤히 바라보는 안겔의 시선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꿈에 대해 들은 것도 있고 경험도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아서 그런지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혹 변화가 있나요?”
한참을 발밑을 헤매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일단 겉으로 볼 때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말이었다. 만약 여기서 안겔이 실에 문제가 생겼다고 이야기했다면 로제타는 지금보다도 더 깊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어쩌면 앞에 안겔이 있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울어 젖혔을지도 몰랐다. 서호가 다시 로제타를 돌아보려는데 안겔이 의심 어린 눈으로 물어왔다.
“정말 그때 그 꿈과 같은 꿈이 맞습니까? 그때 일에 충격을 받으셔서 악몽을 꾸신 것일 가능성은 없나요?”
하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신력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으니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꿈을 꾸기 전까지만 해도 서호는 그 손을 떠올릴 때마다 발목이 차가워지곤 했으니 확실히 그때의 꿈은 후유증을 남겼었고.
서호는 그가 가지게 된 신력에 대한 부분은 쏙 빼고 설명했다.
“로제타 말로는 제 몸이 갑자기 흐려지고 숨을 거의 쉬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몸도 차가워졌고요.”
안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확실히 평범한 꿈은 아니군요. 하지만 이상하네요.”
“어떤 점이요?”
안겔이 다시 한번 서호의 발목을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어째서 그때와 달리 서호님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을까요?”
역시 신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니 빈틈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서호는 진실을 반쯤 섞어 이야기했다.
“손이 닿기 전에 로제타에 의해서 꿈에서 깨어났어요.”
“네?”
“꿈이 로제타의 신력에 망가졌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주변 공간이 무너졌거든요.”
그게 서호가 가진 신력이었는지 로제타가 뿜어낸 신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제로 그 모든 신력은 로제타의 것이었으니 이리 설명한다고 해서 거짓말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서호의 설명에 안겔이 고심하듯 눈을 내리감았다가 다시 물었다.
“…처음 꿈을 꾸셨을 때는 폐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나요?”
“네.”
확실히 그때는 꿈에서 깨어난 직후 푸티가 방에 들어섰었다. 로제타만이 아니라 푸티도 없었던 당시에도 지금처럼 몸이 사라지려고 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서호의 답에 안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살펴봐야겠네요.”
그때 처음으로 로제타가 끼어들었다.
“…그게 전부인가?”
먹먹한 목소리에는 물기보다는 예기가 감돌았다. 서호의 몸이 움찔 떨렸지만 안겔은 담담하게 답했다.
“비교할 만한 부분이 없으니까요. 제가 왕자님과 이야기를 조금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로제타가 날카로운 비웃음을 흘리더니 명령했다.
“지금 이곳으로 부르지. 푸티?”
“네, 폐하.”
로제타와 시선이 마주친 푸티가 고개를 숙이더니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윤을 데리러 가는 게 틀림없었다.
로제타가 안겔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바로바로 해결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죠.”
설령 너희 둘이 무언가를 작당하고 있더라도 그럴 틈이 없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실히 보였다.
서호는 연약해 보이던 좀 전과 달리 분노로 인한 것이나마 힘이 들어간 로제타의 모습을 살폈다.
‘괜찮아진 건지 아니면 더 나빠진 건지 모르겠어.’
서호는 그렇게 윤이 오기까지 한참 로제타를 바라봤다.
***
윤은 마법을 통해 전해 받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지난 밤, 사용인을 통해 돌려받은 황제가 허락한 사진들을 훑었다.
‘얼떨결에 제안한 일이지만….’
별생각 없이 꺼내 든 마법 물품이 서호의 마음에 쏙 든 것은 우연이었다. 덕분에 서호와 만날 적당한 핑계가 생겼고 패밀리어가 아닌 자신의 두 눈으로 황궁을 돌아볼 수 있게도 되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감쪽같이 서호가 찍은 사진만 사라졌군.’
대충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 짐작이 현실이 된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참, 아버지를 닮은 자야.’
운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그나마 아비와 황제가 좀 다른 거라고는 그가 제한적이나마 서호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