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발아래 시커먼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익숙하다면 익숙하며 낯설다고 하면 낯선 손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풍기는, 뼈가 도드라진 바짝 마른 손.
‘눈치챘어.’
서호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손은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손과 함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사고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잘만 쉬어지던 숨이 턱 막히고 혀가 입천장에 딱 달라붙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빨라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삐이- 귀에서 들리는 이명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온 손에 서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뒤 귀를 막고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턱이 덜덜 떨려 입안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는 이대로 못 본 척 지나가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서호의 바람과 달리 손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느껴졌다. 자신을 붙잡기 위해 쩍 벌려진 커다란 손.
“하아.”
입안에서 하얀 김이 샜다.
모든 걸 포기하듯 바짝 얼어 있던 몸에 쭉, 힘이 빠지던 그때.
몸 깊은 곳, 배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무언가가 점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생기를 불어넣듯 부드럽고 유연하게 퍼져나가는 건 신력이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 구석구석 퍼져나간 따뜻한 온기에 서호는 손을 발견한 이후, 처음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첫 숨을 들이쉬자 몸은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서호는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붙잡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빠르게 따뜻한 온기가 몸을 순환했다.
‘로제타.’
로제타에게서 받은 청량하고 상쾌한, 생명이 다시 움트는 듯 시원하고 깨끗한 신력.
차가우면서도 포근한 신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호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 있는 손을 발견했다.
갑자기 막힌 움직임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방황하는 하얀 손을 눈에 담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도망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다.
‘함께 있어.’
꿈속이었지만 그럼에도 신력이, 로제타가 함께 있었다.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웃음을 내뱉자 손 외에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 꼭 서호의 웃음소리를 들은 양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서호를 바라보는 것처럼 한참 코앞에 가만히 자리하던 손이 살랑 흔들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인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인사를 보는 순간 서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손을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또 나를 찾아올 거야.’
하지만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서호는 서서히 망가지는 공간과 점점 더 흐려지는 손을 향해 보란 듯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 공간을 망가트리는 시커먼 어둠에 몸을 묻었다.
“서호!”
눈이 번쩍 떠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얼굴. 그 주위를 감싼 신력.
눈이 마주한 순간 안도감이 찾아왔다. 호수를 닮은 푸른 눈은 풍랑을 맞은 것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떨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되레 바짝 긴장했던 몸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끝났어. 이제 난 안전해.’
어깨를 꽉 붙든 손이 자신을 강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서호는 행여나 자신을 놓칠세라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녀왔어요.”
무사히 잘, 아무런 일이 없이 다녀왔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지금 나는 이곳에 있다고.
확인을 시켜주듯 서호가 어깨를 붙잡은 로제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슴 위, 느릿하게 뛰고 있는 심장 위에 그 손을 올려놓았다.
동시에 얼굴 위로 똑,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래, 눈을 뜬 순간 잔뜩 흐려진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기어이 당신을 울렸다는 걸 깨닫긴 했었다.
걱정을 시켰다는 미안함과 함께 이렇게나 나를 좋아해 주는 당신에 대한 고마움이 공존했다.
그래서 서호는 더욱 밝게 웃었다.
“답을 해줘야죠.”
로제타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헐떡거리는 소리는 내더니 잔뜩 젖어 먹먹한 목소리로 답했다.
“…잘 왔어.”
그 말과 함께 로제타가 무너졌다. 서호의 심장 위에 고개를 묻은 로제타가 소리 없이 울었다.
서호는 별다른 말 없이 두 손을 뻗어 그를 안아줬다. 가슴팍이 뜨겁게 젖어 들었지만 더 강하게 그를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두 팔로 다 안기 벅찰 정도로 커다란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꿈속에서 그랬듯 몸 전체를 감싸는 온기를 느끼며 서호는 밤이 샐 때까지 그를 토닥였다.
***
퉁퉁 부은 눈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 서호는 걱정스레 그 눈을 손가락으로 매만질 뿐이었다.
밤새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뒤로 잠들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로제타는 서호가 잠드는 것을 참지 못했고 서호 역시 오늘은 그를 두고 잠들 수 없었으니까.
‘적어도 한동안은 그 손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로제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로제타는 침대맡에 허리를 기대고 앉은 서호의 허리를 꽉 붙들고 누워 있었다.
서호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화장실까지 졸졸 쫓아다니던 로제타를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눈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이럴 때 달래주면 더 눈물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제타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서호가 재차 또르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주는데 로제타가 서호의 배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서호는 그런 로제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크와 함께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서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로제타 대신 답했다.
“푸티, 들어와요.”
서호의 답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조용히 열리고 푸티가 의아하다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품에 얼굴을 박고 있는 로제타까지 차례로 살핀 푸티가 잔뜩 흔들리는 얼굴로 다시 서호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중에 알려줄게요. 우선은 얼음주머니나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다줄래요? 눈이 아플 것 같아서요.”
푸티가 다시 홱 고개를 내려 로제타를 바라봤다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네, 그리고 마법사 아리스를 부를게요.”
“고마워요.”
잽싸게 움직여준 푸티 덕에 서호는 금방 차가운 물수건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푸티가 얼른 아리스를 데려오겠다며 다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서호가 로제타의 동그랗고 부드러운 뒤통수를 매만지며 그를 불렀다.
“로제타, 이제 얼굴 좀 보여줄래요?”
그러자 로제타가 고개를 저으며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눈이 아플 것 같아서 그래요. 따가울 텐데. 응?”
달래듯 다정한 서호의 말에 움찔 몸을 떤 로제타가 작게 웅얼거렸다.
“지금 나는 못생겼어.”
“네?”
“이리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서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요? 그리고 얼굴만 안 보여준다고 끝나요? 배가 다 젖었는데.”
그러자 로제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최고만을 그대에게 주고 싶고….”
“로제타는 늘 그래요. 그리고 귀여우니까 괜찮아요.”
“거짓말이야.”
서호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낸 뒤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본판은 변하지 않는 법이에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놔두면 점점 더 못나지겠죠?”
로제타가 머뭇머뭇 얼굴을 떼어내고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역시나 배에 얼굴을 비빈 탓인지 눈이 아까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서호가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이거 눈에 덮고 있어요. 아까 들었죠? 곧 아리스가 올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돼요.”
로제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바로 누운 로제타의 눈 위에 손수건을 올려주고는 말을 건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많이 놀랐어요?”
“…응.”
차라리 그때의 일을 제대로 이야기해 주는 게 로제타가 심적으로 안정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서호가 더듬더듬 이불 위를 헤매는 로제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도 놀랐어요. 그런데 정말 잠깐이었어요. 신력이 날 지켜줬거든요.”
“응.”
“로제타가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안 무서웠어요. 실제로 지켜주기도 했고요.”
짧은 침묵과 함께 로제타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제 생각과는 달랐다. 서호가 붙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손도 잡아주고 잠도 깨워줬잖아요?”
“갑자기 그대의 몸이 흐려졌어. 신력이 약해지고, 몸이 차가워졌어.”
로제타가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심장도 느려지고 숨도 거의 안 쉬었어.”
서호가 로제타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놀랐겠다.”
“나는…, 무서웠어.”
“그래요.”
“그대가 떠날까 봐 겁이 나.”
먼저 붙잡았던 손이 세게 붙잡혔다. 사실 조금 아팠지만 손을 풀어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