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그들의 조건을 되짚어주자 로제타가 심드렁한 얼굴로 사진을 책상 위에 툭, 올려뒀다.
“그래, 다 재미없는 사진들뿐이야.”
서호가 상체를 숙여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찍은 것 같은데. 구도도 잘 맞고 빛도 예쁘게 들어오지 않았어요?”
마음에 드는 사진 몇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데 로제타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 난 이게 더 마음에 들어.”
그리고는 품속에서 꺼낸 조그만 액자. 그리고 아마 그 액자 안에 있는 건….
“설마 액자에 넣고 다녀요?”
처음 윤이 찍어줬던 그 사진이었다. 저 사진을 받아온 날 내내 사진을 손에 쥐고 다니던 로제타가 떠올랐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멍청해 보이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도.
그걸 느낀 순간 사진을 빼앗으려 했지만 서호가 로제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 이후 안 보이길래 어디 박아둔 줄 알았는데!’
기겁하는 서호는 보이지도 않는 건지 로제타가 기분 좋은 얼굴로 액자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그래. 더 크면 좋겠지만 그래도 작으니 들고 다니기는 편하군.”
“그, 그걸 들고 다녀요?”
서호가 경악하는데 로제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다시 한번 저 사진을 빼앗아 볼까 고민하던 서호는 쓸데없는 데에 힘을 빼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체적으로 로제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대신 서호는 다른 당부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안 돼요!”
“어째서?”
서호가 헛숨을 삼키며 답했다.
“이상하게 나왔다니까요? 설마 벌써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줬어요?”
정말 그런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저 사진을 빼앗겠다 다짐하는데 로제타가 단호하게 답했다.
“내가 보기도 아까우니 다른 이에게 보여줄 리가 없지. 아리스 외에 다른 이가 보진 않았어.”
아리스에게 보여주는 것은 서호도 허락했던 바였다. 처음 사진기에 대해 아리스에게 설명할 때 가지고 있던 사진이 저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아리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물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었다.
‘마법을 충전해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거라고 했었지?’
꽤 희귀한 재능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특히 이렇게 정교하게 모습이 그대로 찍히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는 말에 아리스는 더욱 윤에 대한 경계를 높였다.
그리고 서호는 새삼스럽게 아리스가 정말 대단한 마법사라는 걸 깨달았고.
‘희귀한 재능이라고 해놓고 자기도 그쪽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잖아.’
아리스가 황실 마법사가 된 이후 한 연구들이 전부 마법 물품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단한 인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대로 된 연구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며 시중 비슷한 것을 드는 아리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윤에 대한 경계를 더 높인 만큼 로제타가 아리스 외에 다른 이를 서호의 옆에 붙일 리가 없었다.
‘역시 미안한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아리스가 사진기 자체에 관심이 꽤 커 보인다는 데에 있었다. 훗날 사진기를 얻게 되면 그에게 사진기를 빌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호는 자신이 사진을 찍을 때 뒤에서 유심히 사진기를 살피던 아리스의 눈빛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리스의 말대로 제가 찍어도 사진이 제대로 나오니까 신기하더라고요. 그거 외에는 잘 나왔어요.”
서호가 로제타가 한쪽으로 빼둔 손가락이 나온 사진을 가리키는데 로제타가 다시 흥미가 인 눈으로 사진을 훑으며 물었다.
“또 그대가 찍은 게 있나?”
서호는 몇 가지 사진을 손으로 짚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요.”
로제타가 그 사진들을 따로 뽑아내며 말했다.
“잘 찍었군.”
윤이 찍은 사진에 비하면 구도도 엉망이고 초점이 흔들린 것도 있었다. 절대 잘 찍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사진을 내려다보는 로제타의 눈은 곱게 휘어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든다는 듯 뚫어지게 사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거짓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피식 웃던 서호는 로제타가 한쪽으로 빼놓았던, 자신의 손과 발이 나온 사진 옆으로 사진들을 옮겨놓자 장난처럼 물었다.
“잘 찍었다면서 왜 따로 빼놔요?”
이런 사진을 보내라고 윤에게 줄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올 로제타의 반응이 기대되어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로제타의 답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가지려고. 원하는 건 달라는 조건을 달았잖아?”
서호는 로제타가 윤에게 걸었던 조건을 떠올렸다.
사진을 찍기 하루 전에 미리 돌아다닐 곳을 로제타에게 알리고, 하루에 길어야 한 시간 동안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이쪽에서 파쇄를 원하면 마음대로 사진을 없앨 수 있다.
서호가 의문을 드러냈다.
“파쇄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가져도 모를 테니 상관없지.”
천연덕스럽게 답한 로제타가 서호가 찍은, 다른 사진에 비하면 볼품없기 짝이 없는 사진들을 잘 정리해 서랍 첫째 칸에 집어넣었다.
물론 서호의 모습이 전부 담긴 첫 번째 사진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취향 한번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서호는 편지와 사진을 건네주기 전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나저나 안겔이 정말 만나자고 하면 만날까요?”
로제타가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그래. 나와 함께 나가.”
하긴 윤과도 이렇게 만나는데 안겔만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답을 할게요.”
“그래…. 이제 그만 자는 게 어때? 피곤하지 않나?”
평소와 달리 바깥 활동이 많지 않았냐며 방에 돌아온 순간부터 자신을 걱정하던 로제타였다. 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겨우 한 시간 돌아다녔다고 피곤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지는 않는데요.”
로제타의 손이 서호의 눈가에 닿았다. 로제타가 눈 밑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감기는 이 눈은 뭐지?”
눈꺼풀이 무거워진 게 맞긴 했다. 하지만 그건 벽난로 덕에 따뜻해진 방의 온도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로제타는 오늘 일을 하다가 늦게 돌아와서 슬슬 서호가 잠들 시간이기도 했다.
“…원래 이 시간에 자잖아요.”
로제타의 손길에 더 눈이 감기는 것 같아 서호는 그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로제타는 지금 안 자요?”
그러자 로제타가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나는 조금만 더 보고.”
양을 보아하니 볼 내용이 좀 많이 남은 것 같았다. 서호는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지 않고 기다려줄 수 없을 게 뻔했다.
“…알았어요. 미리 인사할게요. 잘 자요.”
서호가 로제타의 손을 놓으려는데 그가 그 손을 잡아당기며 답했다.
“서호도.”
네 번째 손가락에 쪽쪽 입을 맞춘 로제타가 손을 놓아줬다. 사진에 튀어나온 손가락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서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로제타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왜?”
서호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허락 맡으라니까요?”
로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뻔뻔하게 답했다.
“싫다고 했는데. 잘 자. 서호.”
그리고 서호의 몸이 일순간 허공에 붕, 뜨더니 휙 침대 위로 날아갔다.
“엄마야.”
서호가 쿵쿵 뛰는 심장을 붙잡았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이동이었지만 갑자기 몸이 허공에 뜬 느낌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서호가 놀라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서호의 몸 아래 깔려 있던 이불이 자기 혼자 쑥 빠져나가더니 그의 몸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얼른 자.”
이 역시 로제타가 한 것이 틀림없었다. 서호는 아직 시도도 하지 못할 정도로 능숙한 신력 사용이었다.
‘옷이 닳거나 찢어진 곳은 없는데.’
마법으로 봤을 땐 사람을 이동시키는 건 쉬운 축에 속했지만 새벽이라는 특성을 섬세하게 조절해 감춘 뒤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않고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서호가 작게 감탄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이불을 이곳저곳 살피며 어디 신력 때문에 변한 곳이 없나 살피는데 다시 한번 로제타의 힘이 이불을 움직였다.
“윽, 숨 막혀요.”
코끝까지 닿은 이불에 서호가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호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몸에 힘을 뺐다. 포근한 이불에 휘감긴 몸이 얼른 잠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낮은 웃음과 함께 사각거리는 펜촉의 소리 역시 점점 더 서호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늘어트린 서호는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기분 좋은 장작불 소리 너머로 로제타가 물었다.
“서호, 잠들었어?”
곧 잠들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무거웠다. 그 생각을 끝으로 서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풍덩, 몸이 깊고 시커먼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두운 바다가 무섭지는 않았다.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따뜻한 물. 다시 생각해 보니 바닷물은 아닌 것 같았다.
바다에서 이렇게 숨을 쉴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물이 짜지도 않았다.
‘응?’
서호는 번쩍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서호는 스스로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 물속에 잠긴 것처럼 입고 있던 옷이 흐물거리고, 머리카락 역시 널리 퍼져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숨을 쉴 수 있었고 몸이 정말 편안했다.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