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79화 (79/155)

#79

“사실 아리스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폐하께서 이번 일을 잘 끝내면 시종장 자리를 주신다고 했답니다.”

뿌듯해 보이는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시종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본인의 능력과 황제의 인정, 대단한 황제를 보필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오를 미래에 감동한 것이 뻔히 보였다.

아리스는 그 순진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푸티만큼은 용의 입안에 들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서호님이 푸티를 많이 아끼니까.’

서호가 함께하는 한 푸티는 그가 원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것이고 자신 역시 그들을 보며 두려움보다는 즐거움과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리스는 깊게 잔상이 남은 황제의 푸른 눈을 지워냈다. 그리고 푸티의 질문에 집중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을 잘하려면 왕자를 잘 알아야 해요. 아리스가 직접 본 왕자는 어때요?”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왕자와 관련된 사항은 늘 보고서를 올리고 있었고 푸티는 그 보고서를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리스가 물었다.

“사견을 묻는 거야?”

“네, 보고서에는 언제나 객관적인 정보만 적으시잖아요.”

아리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서호와 함께일 때 왕자는 대부분 웃는 낯이었지만 종종 이상한 눈으로 서호를 볼 때가 있긴 했다.

“음, 일단 서호님에게 호감이 있고 친해지려 하는 건 확실하지. 그리고…. 종종 연민 섞인 눈으로 서호님을 보는 것 같기도 해.”

“연민이요?”

“응.”

아리스가 담담히 긍정하는데 푸티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어느 부분에 대해서요?”

“나도 잘 모르지.”

사실 잘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황제의 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함께하게 될 서호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푸티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우리 폐하가 좀 이상하신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호님에게는 잘해 주시잖아요. 그런데 왜 연민을 느끼죠? 우리 폐하가 어디가 어때서?”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푸티에 아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거야.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는 거고.”

하지만 푸티는 아리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웃음소리를 봐요. 서호님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시는데?”

억울하다는 듯 발을 쿵 구르는 푸티를 말리듯 어깨를 붙잡는데, 그가 되레 그런 아리스의 손목을 붙들며 물었다.

“아리스도 서호님이 불쌍하게 보여요?”

잡힌 손목과 억울함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붉은 얼굴을 보며 아리스는 그냥 푸티가 원하는 답을 해주기로 했다.

“그럴 리가.”

“그렇죠?”

“얼마나 행복해 보이셔. 지금도 봐. 이렇게 재밌어하시잖아.”

“그래요!”

푸티가 크게 만족스러워하며 아리스에게 다시 한번 다과를 집어주었다. 무심결에 입에 넣은 다과는 아까보다 더 맛있었다.

‘조금 시끄럽긴 해도. 역시 싫지는 않지.’

그렇게 아리스는 다과를 씹으며 서호가 행복한 이유를 줄줄 나열하는 푸티의 말을 흘려 넘겼다.

***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이 자리가 조금 시끄럽긴 해도 싫지는 않다고.

‘하지만 역시 귀찮네.’

사실 왕자와의 만남에서는 별달리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왕자에게 황제가 내건 조건을 다시 알려준 뒤 그냥 같이 사진기라는 물건을 들고 정해진 구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한 시간이 지나고 왕자는 서호에게 사진을 넘겨주고, 후궁 그레이스의 편지까지 전해준 뒤 깔끔하게 헤어졌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면 오늘 일은 끝나는 거였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신녀 안겔이 서호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기뻐하며 인사를 건네자 서호가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받아줬다.

“우연이네요. 서호님.”

아리스는 비웃음을 삼켰다.

‘계획된 만남이겠지.’

황제의 사람이 되며 그간의 일을 모두 들었기 때문에 로제타를 향한 안겔의 일화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 아리스는 안겔이 황제를 얼마나 싫어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 역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난 뒤 황제에게 혐오를 느꼈으니 왜 안겔이 황제를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서호님에 대한 태도를 보면 긴가민가하지.’

로제타를 대할 때와 달리 서호를 대하는 안겔의 모습은 좀 모호했다.

“요새 솔과 어울리신다고요.”

“아무래도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얼마 전에는 폐하께서도 함께하셨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로제타가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요.”

왕자와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다른 안겔의 태도.

“여러모로 고생이네요.”

“네?”

서호는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듯했지만 조금 전 안겔의 얼굴에 잠깐 모습을 비춘 건 죄책감이었다.

아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겔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다시 매끈한 표정을 뒤집어쓴 안겔이 화제를 돌렸다.

“아니에요. 조금 늦었지만 저번에 보내주신 편지는 감사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아리스와 함께 서호가 썼던 그 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안겔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따로 답장하진 못했지만 잘 간직하고 있답니다.”

서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부끄럽네요.”

“폐하께 서호님 같은 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로제타를 욕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서호를 칭찬하는 말.

그러자 눈을 깜빡거리며 안겔을 바라보던 서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안겔님처럼 로제타를 도와주는 분이 있어서 안심하고 있어요.”

아리스가 감탄하듯 서호를 돌아봤다. 저번 편지도 그렇고 왕자와의 일도 그렇지만 서호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제가 너무 오래 서호님을 붙잡았네요.”

아리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안겔을 돌아봤으나 그녀의 미소는 여전했다. 안겔이 흠 없는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만남을 청하겠습니다.”

“네. 기다릴게요.”

“그럼.”

안겔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그녀와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쯤 아리스가 서호를 불렀다.

“서호님.”

“왜요?”

단아한 얼굴로 다정하게 미소 짓는 얼굴. 조금 전 안겔의 말을 능숙하게 피해 간 사람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서호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리켰다.

“그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제가 들 수 있어요. 오늘 고생 많았잖아요.”

한 시간 동안 두 사람을 쫓아다니는 건 지루하긴 해도 힘든 일은 아니었다. 아리스가 반쯤만 솔직하게 답했다.

“사전에 폐하께서 통제를 해두셔서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그러자 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정정했다.

“그럼 고맙다고 할게요.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담백한 인사였다. 왜 안겔이나 왕자가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런 인사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냉큼 인사를 받자 서호가 재밌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웃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도 서호만 있다면 황제가, 지금 일상이 그다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동시에 서호를 향한 안타까움 역시 사그러들었다.

서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서호의 옆에만 있다면 황제는 괴물도, 이상한 무언가도 아닌 사람이었다.

‘동정하는 게 우스운 일이지.’

그와 함께 아리스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무거운 짐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

함께 그레이스의 편지를 읽고 난 뒤 건네준 사진을 로제타가 흥미로운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서호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 봐야 초반에 잘못 나온, 어쩌다 튀어나온 서호의 손가락이나 옷자락 정도였지만.

“이건 그대가 찍은 건가?”

로제타가 사진 한구석에 불쑥 튀어나온 하얀 무언가를 가리켰다.

서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서호는 사진기를 따로 사용하기보다는 휴대폰에 있는 사진기를 주로 쓰는 편이었다.

한마디로 즉석 사진기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몰랐다.

“렌즈에 손가락이 닿았더라고요.”

바로바로 현상이 되기에 잘못 찍은 사진을 지울 수도 없었다.

모든 사진을 로제타에게 가져오기로 했기에 이쪽에서 먼저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아리스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잘못 찍은 사진까지 전부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참 사진을 살펴보던 로제타가 또 다른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건?”

윤이 정원의 풍경을 찍기에 부러 사진에 나오지 않게 뒤로 물러섰는데 그럼에도 발끝이 나온 사진이었다.

“제 실수예요. 어디까지 물러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행히 그것들 외에 서호의 몸이 나온 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게 불만인 것 같았다.

“저번처럼 얼굴이 나오진 않았네.”

실망한 게 훤히 보이는 그 얼굴에 서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얼굴을 찍지 않았는걸요?”

윤이 찍겠다고 한 건 궁의 모습과 장식품이나 그림이지 않았던가. 서호가 그 사진에 나올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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