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77화 (77/155)

#77

아쉬움을 삼킨 서호가 안 된다는 뜻을 담아 눈을 부릅뜨는데 눈이 마주친 로제타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건만 잘 지켜주면 그리하도록 하지.”

서호가 경악해 로제타를 바라보는데 로제타가 귀엽다는 듯 손을 뻗어 서호의 눈가를 매만지더니 다시 윤에게 말했다.

“대신 조건은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되겠나?”

“네. 감사합니다, 폐하.”

윤을 돌아본 순간 다시 무미건조해진 입가. 예의를 지키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지만 아무리 봐도 로제타는 아직 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

속을 알 수 없는 태도에 한숨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윤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온 서호는 당연하게도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왜 받아준 거예요?”

“응?”

“궁을 돌아다니는 거요.”

그 말에 아, 소리를 낸 로제타가 손목의 단추를 풀어내며 답했다.

“원하는 걸 하나씩 들어줘야 그쪽도 진짜 속내를 말하겠지. 그리고 그편이 감시하기에는 더 수월할 거야.”

“네?”

“돌아다닐 곳은 황제궁에 한정되어 있고, 그렇다면 궁 이곳저곳에 그림자들을 심어두기에도 좋지. 아리스도 조금 더 마음이 놓일 테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서호가 다시 반박하려는데 로제타가 챙겨온 사진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대가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로제타가 사진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마음에 들어. 실제로 보는 것보다는 별로지만.”

사진을 서호의 옆에다 두고 번갈아 바라보던 로제타가 침대 끝에 앉더니 옆을 두드렸다. 서호가 얼떨결에 그 옆에 앉자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말했다.

“서호. 가지고 싶은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돼.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은 내가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로제타가 다정한 얼굴로 당부했다.

“다음에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싶다고 해줘. 알았지? 나 때문에 뭘 포기할 필요는 없어.”

고마운 말이었으나 동시에 미안한 말이기도 했다.

‘짐작했던 반응이야.’

긴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헌신적인 로제타를 알아서, 그가 곤란할 것 같은 일에 부러 말을 더하지 않았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속마음을 들킨 이상 로제타가 마음을 돌리지도 않을 텐데.’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로제타가 고집스레 사진기를 권할 것을 알았다.

‘서로를 배려한다고 말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이럴 때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로제타.”

하지만 감사 인사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신보다 더 기쁘게 웃는 로제타를 보니 걱정이 쌓였다. 너무 대놓고 사진기를 반겼던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며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지는 않을 거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거였다. 정말 자신 때문에 큰 손해를 보는 건 싫었으니까.

다행히 로제타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너무 위험하거나 상황이 안 되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냥 처음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조금 고집을 부리는 것 같으면 설득을 하려고 해도 되고.”

“이해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호는 로제타의 손에 들린 사진으로 시선을 내리며 아름다운 푸른 눈을 자연스레 피했다.

항상 받기만 하는 관계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서로를 배려하되 선을 지키는 관계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가슴속 한구석에서 자라나던 죄책감이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

오늘은 서호와 함께 왕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는 말에 오랜만에 연구를 이어 가던 아리스는 그를 부르는 사용인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아리스를 보며 같은 황실 마법사들이 숙덕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 직속 시종의 줄을 잡았군.”

“그럼 폐하의 사람이 됐다는 말이 사실이야? 부럽네.”

“뭐가 부러워? 마법사가 연구도 하지 못하고 맨날 시중이나 드는데.”

“하지만 이번에 들어 보니까 연구비가 엄청 책정됐다고 하던데?”

“연구할 시간이 없잖아!”

“그래도 부럽다. 이대로만 가면 아리스가 수석 황실 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던데.”

“평민 중 처음으로 수석 황실 마법사가 된다고? 대단하네.”

“뭐가? 뒷배경으로 그 자리에 서 봐야 오히려 평민들을 더 욕보이는 거야.”

생각해 보니 숙덕인다기보다는 들으라고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연구실을 빠져나오던 아리스는 그의 눈치를 보는 사용인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저들의 말 중 틀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딱 하나만 빼면.

‘푸티의 줄을 잡았다고?’

아리스는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로제타가 아닌 푸티의 줄이라니? 그렇게나 푸티의 힘이 크게 평가되다니 너무 신기했다.

맹탕 같은 허연 얼굴을 떠올린 아리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소리를 내자 사용인이 흠칫 놀라며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리스가 괜한 화풀이를 할까 봐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아리스는 사용인의 심신 안정을 위해 다시 표정 관리를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리스는 지금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상과는 조금 다르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연구비를 삭감당하고 월급마저 깎여 여태껏 어쩔 수 없이 남들이 하는 만큼 연구를 이어 가긴 했지만, 사실 아리스는 그리 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구에 흥미가 없는 거지.’

황실에 들어올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숙식이 해결되며 월급도 많이 받고 마법사로서는 최고의 영예라는 황실 마법사가 됐지만 황실 마법사는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

‘이번 대 황제가 특이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황제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 있는 걸 싫어했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기사들이 황제의 옆에 있지 못하는 것처럼 황실 마법사들 역시 황제의 곁에 머무는 걸 금지당했었다. 때문에 더더욱 황실 마법사들은 연구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늘 똑같고 지루한 일상.’

그렇다고 대단한 일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지루하긴 해도 돈은 많이 주니까, 적당히 시골에 내려가 노년까지 풍족히 살 정도의 돈만 모으면 일을 관두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이렇게 황제와 엮이게 되면서 주변이 떠들썩해진 것이다.

‘지루하지 않은 건 좋지.’

높으신 분의 모든 것들을 숨김없이 보게 되는 게 그리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함께 질색하며 욕을 할 수 있는 이는 있지 않은가.

“도착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황제궁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사라지는 사용인을 뒤로하고 로제타와 서호의 방이 있는 복도에 들어섰던 아리스는 피곤한 얼굴로 복도 끝에 서 있는 푸티와 부딪칠 뻔했다.

“푸티?”

“아리스.”

아리스의 어깨에 얼굴을 박을 뻔했던 푸티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아리스를 알아보더니 다시 순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그 간극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아리스는 주변을 휘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

복도 끝자락에서 날카롭게 눈을 치뜨고 있는 걸 보니 꼭 이 길목을 막고 있는 모양새였다. 푸티가 아리스의 뒤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들어갈 필요가 없어서요. 겸사겸사 다른 이들도 못 오게 막고 있고요.”

아리스는 황제의 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답했다.

“즐거우신 모양이네.”

지금 이 소리의 주인공은 서호와 로제타였다.

그리고 푸티는 지금 저 커플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싫기도 하고, 혹 눈치 없는 사용인이나 손님이 분위기를 깨는 것도 방지할 겸 이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아리스가 다시 한번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푸티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기껏 와줬는데 좀 기다려야겠어요.”

또다시 작게 속삭이는 푸티에 아리스가 재빨리 주변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이제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그들 주위를 감싼 불투명한 막을 손으로 건드리던 푸티가 밝게 웃었다.

“고마워요.”

아까보다 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만족한 아리스가 조금 전 서호와 황제의 일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왕자를 만나고 왔는데 기분이 좋으시네?”

푸티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따라갔던 건 아니라서요. 저는 왕자님의 방을 둘러봤거든요.”

아리스가 다시 한번 황제의 방 쪽을 돌아봤다. 자신 역시 굳이 저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불렀던 사용인의 말에 따르면 로제타가 자신을 오라고 한 건 확실했다.

‘급한 일이면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아리스는 마침 적당한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로제타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됐다곤 해도 아직 아리스는 황제의 속마음을 다 읽는 재주가 없었지만 푸티는 달랐으니까.

“폐하께서 날 왜 불렀는지도 몰라?”

“마법 물품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서호님과의 시간이 더 중요할 테니까 대기해도 괜찮아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푸티는 알고 있었다. 푸티의 확답에 아리스가 편안하게 벽에 등을 기대며 질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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