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최대한 자주 만나야 하는데.’
황제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허락받은 것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윤은 황제가 정말 그를 1년이나 황궁에 둘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짧은 시간 안에 서호와 최대한 많은 만남을 갖는 게 좋았다.
‘무슨 핑계를 대면 좋을까?’
서호가 거부하지 못할 만한, 그리고 황제가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딱히 서호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황제가 자신과 서호의 친분을 반기지 않는 건 확실했다.
‘안겔과 함께 오기도 했고 여러모로 수상한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윤은 그가 서호에게 친근한 척 다가가자 흉흉하게 빛나던 황제의 눈빛을 떠올렸다.
윤에게는 매우 익숙하던 눈빛이었다. 질척한 감정을 잔뜩 내보이며 상대를 난도질하던 자신과 똑 닮은 금안.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결은 비슷하지.’
황제의 보석 같던 푸른 눈을 떠올리던 윤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생긋 친절한 미소를 꾸며냈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너머에 있을 이를 눈에 담았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왜 저자가….’
그곳에는 그가 전혀 기대치 않던 이가 함께 있었다.
“오, 왔군.”
로제타 보레알리스. 황제가 입을 열자 서호가 그의 시선을 따라 윤을 돌아봤다. 윤은 반사적으로 서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윤아. 왔어?”
윤이 서호의 인사를 받으며 황제를 돌아봤다.
“응, 그런데….”
서호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대와 친분을 쌓을까 싶어 서호에게 부탁했네. 내가 함께 어울려도 괜찮겠나?”
여기서 거절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광스러운 일이군요.”
윤이 짜증스러운 속내를 숨기며 황제를 반겼다.
***
로제타가 예정에 없이 자리에 함께했지만 그럼에도 대화에는 무리가 없었다.
‘반말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왕자에 대한 호감도 믿음도 없는 로제타는 생각보다 순순히 대화에 참여했다. 조금이나마 불편한 티를 내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 무색했다.
‘하긴 내 앞에서만 어리게 굴지 로제타는 황제니까.’
본래 로제타의 위치를 생각하면 사실 그 모든 걱정은 자신이 사서 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이렇게 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일을 해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로제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문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군.”
“소문이요?”
“본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소문에 잘 휩쓸리는 법이지 않나. 특히 바깥 활동이 없다면 더더욱.”
물론 종종 로제타가 윤을 떠보듯 이야기를 던지긴 했지만.
윤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머니의 옆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특별한 직책을 맡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겠지. 어머님께서는 몸이 괜찮아지셨나? 서호가 두 번째 편지를 보낸 걸로 알고 있는데.”
시선을 맞춰오는 로제타에게 작게 웃어준 서호가 윤의 답에 그를 돌아봤다.
“내일이나 모레쯤, 답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편지 외에는 따로 연락할 방도가 없나?”
또 탐색하듯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흐름상 이상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어머님과 관계가 친밀한 것 같은데 그대와도 연락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야.”
윤이 서호의 앞에 디저트를 밀어주며 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래도 서호님의 편지를 받으신 이후로는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서호가 눈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스콘 하나를 집어 드는데 로제타가 어느새 빈 서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래도 항상 옆에 있던 이가 사라지면 마음이 허해지는 법이지.”
서호가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찻잔을 드는 사이 윤이 쾌활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귀찮게 옆에서 잔소리하던 아들이 사라져 편하다고 말씀하시던걸요. 뭐, 왕국에만 있던 제게 미안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건 압니다. 그래서 부러 왕국과는 다른 제국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서호가 입가를 툭툭 털며 대화에 다시 참여했다. 윤의 말에서 궁금한 점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모습을?”
윤은 신분을 숨기고 황궁에 들어온 만큼 따로 데려온 수행원이 없었다. 그런데 제국의 모습을 그레이스에게 보내주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윤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로제타와 서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테이블 위로 상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윤이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줬다.
“마법을 이용해 보내는 거야.”
서호는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각형의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물건의 모습이 서호가 알던 것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어….”
윤이 물건을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마법을 배운 이유 중 하나야. 어머니가 전 세상의 것을 그리워하셔서.”
윤이 홀린 듯 물건을 바라보는 서호에게 제안했다.
“뭔지 아는 것 같은데. 한번 보여줄까?”
서호가 저도 모르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윤이 바로 물건을 작동했다. 물건을 사용하는 과정 역시 서호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물건에서 쭉 튀어나온 것은 기대 어린 눈을 한 서호 자신이 담긴 사진이었다.
서호가 결과물을 보고 로제타의 팔을 붙들며 살짝 흔들었다.
“로제타! 이게 바로 사진이라는 거예요.”
얼마 전 초상화를 남기겠다던 로제타의 말에 사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바로 지금 서호의 앞에 사진기가 있었다.
‘그것도 즉석 사진기야!’
서호가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사진을 붙들었다. 물론 사진을 만지기 전 윤에게 허락을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사진을 집어 든 서호가 로제타에게 가까이 사진을 가져가며 이야기했다.
“봐요. 조금 전 제 모습이 그대로 나왔죠?”
그러자 손바닥만 한 사진을 유심히 살피던 로제타가 의아함을 표했다.
“이렇게 종이로도 나올 수 있었던 건가?”
“네?”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사진이 그럼 종이로 나오지 또 뭘로 나온다고…. 서호가 로제타의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이렇게 작은 물건에 그대의 얼굴이 담겨 있던데. 케이크 앞에서 여러 번 이렇게 생긴 모자를….”
로제타가 말하는 당시의 상황을 빠르게 떠올린 서호가 화들짝 놀라며 로제타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아! 그, 그걸 뽑으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고깔모자를 쓰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던 모습을 로제타가 봤던 것이다.
‘하긴, 그때 영어도 쓴 걸 보면 당연히 그것도 봤겠지.’
부끄러움에 온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아 서호는 다시 사진을 흔들었다. 다행히 로제타는 서호가 애써 끊은 말을 다시 잇지는 않았다.
“확실히 신기하긴 하군.”
“이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고작 사진 한 장에 좀 과하게 좋아한 것 같기도 했다. 민망함에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사실 얼마 전에 사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서호는 여전히 사진을 빤히 바라보는 로제타에게 슬쩍 몸을 기대며 물었다.
“괜찮죠?”
“그렇군.”
화질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더 놀라웠다. 서호가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로제타에게 물었다.
“아리스도 만들 수 있을까요?”
“글쎄, 아무래도 이건 따로 만든 마법 같군.”
로제타가 그렇지 않냐며 윤을 바라보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구나.”
조금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만들어낸 마법을 함부로 가르쳐 달라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때 윤이 서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원한다면 제국을 떠나기 전에 이걸 줄 수도 있어.”
“정말?”
서호가 반색하며 그를 바라보자 윤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어….”
바로 답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뭘 부탁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서호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윤이 로제타를 돌아봤다.
“제 방 주변에는 더 이상 어머니께 보여드릴 게 없어서요. 제가 황제궁을 조금 돌아다녀도 되겠습니까? 서호와 함께요.”
서호가 눈을 찌푸리는데 윤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혼자 다니는 건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서호와?”
반문한 로제타가 서호를 돌아봤다.
“서호와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서호의 옆에는 늘 마법사 아리스가 함께하니까요. 물론 사진을 찍고 나서 폐하께 미리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보내도 괜찮겠다 싶은 것만 추려주세요.”
황제궁 내부의 모습을 마음대로 유출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부탁이긴 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나?’
사진기가 탐이 나긴 했다.
로제타의 아름다운 얼굴을 종종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때가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예쁜 정원을 봤을 때도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새들을 발견했을 때도 사진기가 아쉬웠다. 앨범을 만드는 재미도 있을 테고 과거를 회상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