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5장. 그림자
“왕자의 방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로제타가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지만 그림자는 보고를 이어 갔다.
“신녀의 방에서 그녀 외에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마나의 흔적으로 보아 왕자가 공간 이동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 중입니다.”
로제타가 여전히 그림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아리스의 의견인 건가?”
“네.”
“지금은?”
“각자의 방에 따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 가 봐.”
상황 때문에 큰 생각 없이 그림자의 일원으로 넣은 아리스는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았다. 서호와 왕자의 대화를 전부 기억할 만큼 기억력이 좋기도 했고.
그림자를 돌려보낸 로제타는 은은한 불에 비치는 서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깊게 잠이 든 서호는 매일 밤 자신이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까?
언제나 그렇듯 한참 어여쁜 얼굴을 내려다보던 로제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이불 끝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서호의 발목을 쳐다봤다.
‘정말 나한테 신경을 쓰긴 하나 보지.’
로제타는 갑자기 보이게 된 붉은 실을 응시하며 삐죽 입꼬리를 올렸다. 서호의 발목에 잔뜩 묶여 있는 붉은 실은 로제타의 시커먼 마음을 시각화한 듯 어지럽게 엉켜 발목 전체를 꽁꽁 붙들고 있었다.
‘그대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야.’
아무리 손으로 풀려고 노력해도 풀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묶인 실들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로제타가 손을 뻗어 서호의 왼쪽 발목을 건드렸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실을 직접 만질 수는 없었다. 하긴 이걸 만질 수 있었다면 그들 사이에 잔뜩 엮인 이 줄 때문에 생활이 불편해졌을 것이다.
“실을 볼 수 있게 된 건 좋지만 그대의 발목을 볼 수 없는 건 아쉽네.”
바지 아래 간간이 드러나는 분홍빛의 색이 예쁜 복사뼈와 가는 발목은 로제타가 사랑하는 서호의 수많은 요소 중 하나였다.
아쉬움에 혀를 차는데 로제타의 시야에서 서서히 붉은 실이 사라져갔다. 로제타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대를 가지게 해달라고 빌어 볼까.’
신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 소원도 들어주지 않을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인데.
하지만 로제타는 그 소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서호는 남의 힘이 아닌 로제타 그 자신의 힘으로 얻어야 했다.
로제타는 이제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실이 잔뜩 엉겨 붙어 있던 서호의 얇은 발목을 조심스레 쓸어냈다.
‘그대가 왕자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다는 건 알아.’
왕자가 서호와 말을 놓는 사이가 됐다는 건 점심 식사가 끝나고 푸티가 건네준 보고서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호가 왕자에게 정말로 마음을 연 게 아니라는 것도 전해 들었고.
하지만 친한 척 입을 놀리는 왕자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상상 이상으로 불쾌했다.
‘서호야.’
둘만이 아는 글자가 있는 것도, 그걸 서호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이 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와만 연결된 실.’
아무리 둘 사이가 가깝고 친근하게 보여도, 서호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걸 확인하게 되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오르던 불안감이 가라앉았고 언제나 허기지던 이 관계에 대한 갈망도 나아졌다.
‘내 운명.’
드러난 발끝이 시린 듯 서호가 작게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움츠렸다. 힘이 들어간 발끝이 귀여웠다. 살살 발끝을 매만지자 간지러움 때문인지 서호가 몸을 웅크렸다.
몸을 완전히 말은 서호를 보며 로제타가 킥킥 웃었다. 그리고 복사뼈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서호의 몸에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몸을 돌려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침대에 가득 배어 있는 향기와 편안하게 잠든 서호.
서호를 눈에 가득 담고 로제타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
네 사람이 식사를 함께했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늘, 서호는 수업을 마치고 아리스를 떠나보낸 뒤 로제타를 돌아봤다.
‘열심히 하네.’
그날 글자를 배우겠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로제타는 정말로 서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를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던 서호는 결국 아리스가 사용하던 방식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아리스가 가르치기 시작한 것부터 하나씩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필기를 남겨둬서 다행이야.’
서호가 로제타의 앞에 멈춰 서서 그가 쓴 한글을 살피는데 로제타가 서호를 올려다봤다.
“어때?”
“잘 썼어요. 이제 인사말은 쉽게 쓰네요.”
“그래?”
뿌듯하게 웃는 얼굴이 예뻐서 다시 한번 그를 칭찬하는데 로제타가 공부를 하던 종이를 정리하며 물었다.
“서호, 오늘 왕자와 만난다고 했었지?”
그날 식사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네.”
“나도 같이 나가지.”
“그래요.”
단둘이 만나기로 한 자리에 갑자기 로제타가 끼어도 괜찮은 건지 살짝 고민했지만 로제타가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요?”
“그냥, 한번 봐둬야 할 것 같아서.”
하긴 그날 왕자의 모습이 많이 이상했으니 로제타 역시 그가 신경 쓰이긴 할 것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서호가 로제타의 손목을 가리키며 웃었다.
“같이 나가는 건 좋은데 그건 지우고 가는 게 좋겠어요.”
꽤 열중한 모양인지 엉망이 된 손목이 보였다. 서호의 손끝을 따라 손목을 살피던 로제타가 손을 뒤로 숨겼다.
“이건….”
“로제타도 언제나 완벽한 건 아니네요.”
이제 와 보니 로제타가 황급히 챙긴 종이들 밑에는 어색한 모양으로 쓰인 한글이 가득했다. 서호가 키득거리며 계속 변명하려는 로제타를 끌어다 욕실로 밀어 넣었다.
“내가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알겠다니까요, 얼른 깨끗이 씻고 나와요.”
“그, 서호?”
서호는 로제타를 뒤로하고 문을 닫은 뒤 그가 숨긴 종이를 빠르게 살폈다.
부끄러움 때문에 붉어진 얼굴과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귀여웠다. 한참을 글자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던 서호는 종이 곳곳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예쁘게 적기 위해 꾹꾹 눌러쓴 글씨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외로울 틈이 없다니까.’
그레이스에게 한글로 된 편지를 받으면서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호는 그의 이름과 함께 적인 로제타의 이름을 손으로 덧그리다가, 물이 꺼지는 소리에 그중 두 이름이 가장 잘 적힌 종이 한 장을 빼내 자신의 필기 사이에 숨겨뒀다.
‘챙긴 걸 알면 부끄러워하겠지.’
다시 로제타의 종이를 잘 정리해둔 서호는 완전 범죄를 꿈꾸며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욕실에서 나오는 로제타를 반겼다.
“깨끗하게 씻었어요?”
“응.”
보란 듯 손목을 보여주던 로제타가 얼른 옆으로 다가와 종이를 은근슬쩍 옆으로 밀어내는 게 보였지만 서호는 모른 척 외출복을 꺼내 들었다.
***
윤은 방을 나서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최근 며칠간 안겔과의 대화로 정신이 없었지만 그는 지금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붉은 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붉은 실이라는, 거울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긴 했지만 그 실의 존재를 모를 때도 이방인들은 거울을 통해 잘만 자기 세계로 돌아갔으며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었다.
안겔 역시 본래 세계로 돌아갔던 이방인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고 알려줬고.
‘이방인이 돌아가고 난 뒤에는 하나같이 남아 있던 인연의 실 역시 삭아 문드러졌다고 하더군요.’
본래 세계로 돌아간 이를 다시 불러오지 못한다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는 말이기도 했다.
“숨기고 있는 게 더 있을지도 모르지.”
붉은 실에 대해 숨긴 것처럼 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번 스스로가 가진 정보의 정확성이 깨지자 의심은 늘어만 갔다.
따라서 그날의 대화는 자연스레 길어졌지만 알맹이는 없었다.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이들의 대화는 길어질수록 헛바퀴를 돌았다. 서로 숨긴 것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두 사람은 처음 그들이 얻으려고 했던 정보 외에는 상대에게서 다른 것을 더 얻어낼 수 없었다.
“먼저 다른 걸 알려주지 않는 이상 입을 다물겠지.”
그러니 안겔과 관련된 일은 잠시 묻어둘 필요가 있었다. 거울에 꽤 관심이 많은 이이니 만약 그녀가 필요하다면 또 다른 정보를 주며 교환을 요구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윤은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서호의 목소리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항상 함께 움직이는 마법사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밝게 느껴졌다. 그 밝은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과 함께 아쉬움이 들었다.
‘만날 기회가 별로 없지.’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서호는 그어둔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친근하게 말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자신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함께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두세 번 만난 이에게 마음을 툭 터놓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저번의 식사 때도 붉은 실에 대해 신경 쓰느라 별다른 말을 나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