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74화 (74/155)

#74

“…그렇군요. 폐하께서도 보지 못하십니까?”

윤은 신녀가 가진 힘이니 신력을 가진 로제타 역시 붉은 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긍정했다.

“그래.”

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단히 다물리는 턱을 살피며 서호가 물었다.

“괜찮아요?”

“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서요. 붉은 실이라니. 여태껏 무작위로 선택되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붉은 실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충격적인 건지는 서호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안겔이 흘리듯 덧붙였다.

“붉은 실을 볼 수 있는 건 대대로 신녀뿐이었으니까요.”

신녀인 그녀 자신만이 가진 능력을 강조하는 모양새였다.

서호는 여유롭게 칼질을 하는 안겔과 한껏 가라앉은 윤을 번갈아 살폈다.

‘왜 저러지?’

날카로운 인상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잘 웃던 윤은 붉은 실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한번 의문이 생기자 서호는 윤에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서호를 보는 로제타의 입가가 축, 아래로 쳐졌다.

***

윤이 입을 다물면서 안 그래도 그다지 밝지 않았던 식당의 분위기는 더욱 엉망이 됐다. 불편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였다.

처음부터 별로 먹지 못했던 로제타처럼 서호 역시 그 이후로는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었기에 두 사람은 예정대로 푸티에게 야식을 부탁했다.

서호는 야식을 놓고 물러가는 푸티와 인사하며 로제타를 돌아봤다. 그리고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물었다.

“로제타, 역시 윤의 반응이 이상했죠?”

“…그랬지.”

서호가 여전히 먹을 것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로제타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며 물었다.

“왜 붉은 실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할까요?”

식사가 끝난 후 따로 편지를 전해줄 때도 윤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었다. 서호가 여전히 미동도 없는 로제타의 손을 음식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하면서도 입은 움직일 수 있잖아요. 빨리 먹어요. 너무 안 먹었잖아요.”

가만히 서호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서호의 재촉에 결국 음식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딱히 맛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음식을 삼켰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 서호가 다른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며 제안했다.

“그게 별로면 이걸 먹어 보든가요.”

“서호는?”

“나는 아까 좀 먹었잖아요.”

사실 평소와 달리 단둘이 있어도 로제타의 분위기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어서 흥이 좀 죽었다. 다행히 이번 것은 아까보다 입맛에 맞았는지 씹는 속도가 좀 빨라진 것 같았다.

“술이 먹고 싶다지 않았어?”

로제타의 물음에 서호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에요. 그냥 다음에 마셔요.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왠지 로제타는 또 술만 마시고 음식은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서호가 술을 옆으로 밀어내며 새로운 음식을 로제타의 앞으로 밀어줬다.

“서호야도 먹으라니까.”

순간 서호가 귀를 의심하며 로제타를 바라봤다.

“…네?”

그러자 로제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서호야.”

서호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 조금 전에요. 서호야도?”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로제타가 고집을 피우듯 눈에 힘을 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부르는 건 상관없는데, 방금 그건 아니에요. 모든 호칭에 야를 붙이면 안 돼요.”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건가?”

“네.”

“어렵군. 그대의 글을 배워야겠어.”

하지만 조금 전 들었던 ‘서호야도’라는 말의 충격 때문인지 서호는 글을 잘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딱히 좋은 선생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새삼스레 글 선생님인 아리스가 대단하게 느껴졌고 푸티가 왜 글을 가르칠 정도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배우고 싶어.”

“…로제타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학생이면 좋겠네요.”

“당연하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리자 다행히 분위기도 부드럽게 풀렸다. 로제타의 입가에 맴도는 웃음을 살피던 서호는 일단 식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가벼운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아까 안겔이 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실이요.”

“실이 더 두꺼워졌다는 거?”

“네. 그러니까, 이쯤에 있는 것 같죠?”

서호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둘의 발목 사이를 어림잡아 가리켰다. 그러자 로제타가 서호를 따라 테이블 아래 발목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래, 그쯤인 것 같아.”

하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서호는 그 사이에 자리한 붉은 실을 볼 수는 없었다. 서호가 텅 빈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못 보는 걸까요?”

조금 아쉬웠다.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한데.”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로제타의 답에 서호가 장난스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한번 부탁해 봐요. 로제타 사랑받는다면서요.”

신에게 사랑받는 아이라니 혹시 몰랐다. 안겔 역시 신녀가 된 후로 보이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얼른 해보라고 로제타를 툭 치자 힐끗 서호를 돌아본 그가 성의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보게 해주세요.”

“뭐예요. 그게.”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그래도 부탁하는 사람의 말투치고는 참 열의가 없었다. 푸핫, 웃음을 터트린 서호는 확인하는 것처럼 발아래를 바라보는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

그러자 로제타가 서호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래, 변화가 없네.”

“당연히 그렇겠죠.”

간절히 소원을 빌어도 들어줄까 말까 할 텐데 그런 태도로는 당연히 원하는 걸 들어줄 리가 없었다.

적어도 두 손을 모으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도 조금 아쉽긴 했다. 서호가 힐끗 다시 한번 발목을 내려다봤다.

***

기분 좋게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안겔은 콧노래를 부르며 원하던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안겔의 예상대로 이아코스 왕자가 안겔의 방에 나타났다.

“제대로 설명하지.”

당황스러웠던 것이 맞긴 했던지 왕자는 안겔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왕자는 마법을 쓴 건지 어느 순간 안겔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안겔은 방에 무단 침입한 왕자를 비난하지도,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안겔의 답에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여유롭던 모습과 상반되는 다급함이 달가웠다.

안겔은 오랜만에 우위에 선 상황을 즐기며 생글생글 웃었다.

“이래 봬도 신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물건이니까요. 당연히 신전 쪽에도 숨겨진 정보가 있답니다.”

“…붉은 실에 관한 것은 사실인가?”

“사실이랍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신전에 기록을 요청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실제로 과거 신녀들이 붉은 실을 봤다는 기록은 신전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저쪽이 거짓이라고 우긴다면 안겔로서도 무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붉은 실이 보이는 건 신녀인 안겔뿐이었으니 별다른 증거를 내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이상 증거를 내세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는데.’

그냥 그녀도 숨겨놓은 정보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주는 정도이길 바랐는데, 왕자의 반응이 생각보다 더 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왕자의 눈에는 안겔을 향한 의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눈에는 희망이 감돌고 있었다.

“실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고 했던 그 말도 사실인가?”

그리고 곧바로 던져진 질문.

왕자는 그간의 모호한 태도와 달리 본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실을 끊고 싶은 건가?’

처음 황궁에 왔을 때의 서호와 황제에게 왕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아낀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건 매우 순화한 표현일 게 뻔했다. 안겔은 왕자가 거울을 입에 담을 때 얼핏 보이던 증오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어미를 아낀다는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왕자를 바라보던 안겔은 재촉하듯 그녀를 쳐다보는 왕자의 시선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운명으로 태어나지만 그게 영원하지는 않으니까요. 당연히 끊기기도 하고 더 강하게 엮이기도 한답니다.”

“물리적으로 실을 끊을 수 있나?”

숨기지 못하는 간절함. 그 감정을 읽은 순간 안겔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는 태연하게 답했다.

“글쎄요.”

살짝 말끝을 흐리며 무언가 숨기는 것이 더 있다는 듯 묘한 태도를 보이자 왕자가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망설이듯 잠시 머뭇거리던 왕자는 짧은 고민 끝에 말했다.

“…이방인이 본래 세계로 돌아갈 때 거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안겔이 원하던 것을 똑바로 꿰뚫는 말이었다.

안겔이 가진 것은 그저 이방인들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간단한 기록과 그들의 붉은 실이 시간이 갈수록 얇아지다 끝내 끊어졌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서호와 황제의 앞에서 말한 것을 제외하고 여태껏 왕자가 안겔에게 더 가르쳐 준 것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첫 만남 당시 그가 이방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려준 뒤 한 말.

‘이방인이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하지.’

굉장히 모호한 말이었다. 왕자는 거울이 어떤 식으로 필요한 건지, 어떻게 이방인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정확한 방법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왕자는 안겔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붉은 실이 중요한 모양이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비밀이 있을 수도 있고.’

안겔은 무지로 인한 조바심을 삼키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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