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냥 따로 만나서 차를 마셔도 되잖아요.”
“차와 식사가 달라?”
“그야 불편하잖아요. 식사는 편한 사람이랑 하는 게 좋은데.”
그러자 로제타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제타가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안겔이 불편해?”
“나보다는 로제타가 불편하지 않아요? 안겔만이 아니라 윤도요.”
서호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간격에 다시 그를 불렀다.
“로제타?”
로제타가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마냥 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해.”
일자로 단단하게 맞물린 입술을 보니 확실히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호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으면 돌아와서 우리끼리 뭐라도 먹을까요?”
괜히 그곳에서 억지로 먹기보다는 돌아와서 간단하게나마 끼니를 때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야식을 먹는 거죠.”
아직 제대로 마셔 보지 못한 술을 함께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서호가 손을 꼽아가며 줄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야식은 건강에 좋지 않지만 하루쯤은 괜찮을 거예요. 나 술도 마셔 보고 싶은데, 아직 마셔 본 적 없거든요. 어때요?”
말을 하면서 점점 더 기대가 차올랐다. 서호가 활짝 웃으며 로제타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로제타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까보다 편안해진 웃음에 서호의 기분도 나아졌다. 야식은 뭐가 좋을까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서호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서호가 아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로제타가 서호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갈까?”
“네.”
서호가 방을 나서기 전 미리 준비해둔 봉투 하나를 챙기자 푸티를 따라나서던 로제타가 물었다.
“서호, 그건 편지야?”
답장이 조금 빠른가 싶었으나 굳이 다 쓴 편지를 늦게 줄 필요는 없었다.
“아, 네. 식사 끝난 뒤에 건네주려고요.”
“이번에 또 약속을 잡은 건 있고?”
“없어요.”
“저번에 회의가 끝나면 궁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었잖아. 이번에 시간을 내 볼까?”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했다. 그 이후에 일이 줄줄이 생겨서 결국 흐지부지됐지만.
하지만 궁에 안겔과 윤이 있는 지금은 딱히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에요. 신경 쓸 게 많잖아요, 아직. 이번 일이 다 끝나면 놀러 가요.”
“궁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
“딱히 그런 적은 없어요. 궁도 넓고 여기서 사귄 사람들은 전부 궁에 있잖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아직까지는 전혀 답답하거나 지루해 본 적이 없었다.
“답답해지면 말할게요.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지금 나가 봐야 마음껏 놀지도 못할 것 같고.”
“그래, 꼭 말해야….”
끊어진 로제타의 목소리에 서호가 로제타를 올려다봤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봤다.
“서호야. 또 보네?”
막 도착한 것처럼 보이는 윤이었다. 서호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게. 저녁 약속이 있는 줄 몰랐어.”
서호에게 인사를 건넨 윤이 로제타를 돌아봤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제타가 그의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서호를 돌아봤다.
“서호야?”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서호가 로제타가 뭘 묻는지를 깨닫고는 답했다.
“아. ‘야’는 그냥 이름을 부를 때 붙는 말 같은 거예요.”
로제타가 다시 윤을 돌아보자 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하.”
황당하다는 듯 또는 어이가 없다는 뜻이 가득 담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에 대해 서호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로제타가 서호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안겔도 있고 공적인 자리이니 안에서는 예의를 갖춰서 말하는 게 좋겠어.”
확실히 분위기가 너무 풀어져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아무리 말을 놓기로 했다지만 만나자마자 스스럼없이 자신을 부른 그에 서호 역시 놀랐었다.
“그럴게요.”
서호의 답을 들은 로제타가 푸티를 바라보자 그가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식당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안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로제타가 안겔의 인사를 받아주며 자리로 향했다.
서호가 안겔과 눈인사를 하며 로제타의 옆자리에 앉자, 윤이 안겔의 옆자리이자 서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로제타의 시선이 그런 윤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눈치를 보던 푸티가 사용인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바로 음식을 내왔다.
하지만 음식의 세팅이 끝난 후에도 식당에는 묘하게 칙칙한 침묵이 감돌았다. 식사를 시작하지도, 그렇다고 무슨 말도 꺼내지 않는 로제타에 서호가 그를 바라보자 그제야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로제타가 식기를 들자 다른 이들이 그를 따라 식사를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역시 불편해하면서….’
윤과 안겔을 마주한 순간부터 급격하게 표정이 사라진 로제타를 서호가 슬쩍 돌아보는데 그가 식기를 내려놨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건 두 사람 모두에게 확인할 게 있어서네.”
서호가 거의 손이 닿지 않은 로제타 앞의 접시를 바라보는데 로제타가 윤을 불렀다.
“우선, 왕자?”
“네, 폐하.”
“앞으로 서호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 같은데 거울에 대한 정보를 더 받을 수 있겠나?”
서호는 접시에서 눈을 떼어내며 대화에 집중했다. 잠시 곤란한 낯을 하던 윤이 서호와 눈을 마주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원본까지는 무리더라도 사본이라도 만들어 달라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노력하겠습니다.”
로제타의 딱딱한 말투에도 윤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과 눈을 맞추는 윤에게 작게 눈인사를 건넨 서호는 어느새 로제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겔을 쳐다봤다.
“…신전에서 사람이 찾아왔던데.”
“네.”
“이유는?”
안겔이 윤을 쳐다보며 답했다.
“왕자님이 저와 함께 황궁에 있다는 걸 눈치챘더군요.”
“누가?”
잠시 머뭇거리던 안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레이 신관입니다.”
“그게 누구…, 사브리나 공작의 딸인가.”
안겔이 말한 이를 로제타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누군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질문하기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로제타가 안겔에게 물었다.
“내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가?”
안겔이 다시 한번 윤을 돌아봤다.
“왕자님께서 신전 측에는 거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럼 내가 왕자를 초대한 걸로 하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로제타가 여전히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접시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음 음식을 내오라 손짓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접시 역시 거의 비워지지 않았다. 평소 로제타가 잘 먹던 음식이 분명했는데. 아무리 야식을 먹자고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안 먹어도 되는 건지 신경이 쓰이던 와중, 사용인들이 식당을 나서자마자 안겔이 서호에게 말을 붙여왔다.
“서호님.”
안겔이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서호가 조금 놀란 티를 내며 답했다.
“아, 네.”
안겔이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는 말했다.
“폐하와 더 가까워지신 모양입니다.”
“네?”
더 가까워졌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안겔이 식탁 아래 가려 보이지 않는 발목을 바라보듯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붉은 실이 더 단단하게 엮였네요. 이렇게 단단하게 연결된 건 정말 오랜만에 봐요.”
“아.”
그 말에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졌다. 서호가 작게 웃으며 머뭇거리는데 안겔이 심려 섞인 얼굴로 물었다.
“그날 이후 또 꿈을 꾸신 적은 없으시죠?”
“네. 그날 이후로는 없어요.”
“또 꿈을 꾸시거든 꼭 제게 발목을 보여주세요. 저번처럼 실에 영향이 가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그녀가 자신에게 선뜻 호의를 베푼다고 믿기는 어려웠기에 로제타를 바라보자 그가 괜찮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다행히 표정도 아까보다는 풀려 보였다. 안심한 서호가 안겔에게 답했다.
“그럴게요.”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윤이 의아함을 표했다.
“붉은 실이요?”
처음 듣는다는 듯 의문이 가득한 윤의 얼굴에 오히려 서호가 더욱 놀랐다.
“모르세요?”
“네, 붉은 실이라는 게 뭡니까?”
왕국에도 거울이 있었고 그레이스도 거울을 통해 이 세계로 온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역시 붉은 실의 존재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호가 제일 처음 들었던 게 붉은 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윤은 붉은 실에 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안겔님에게 거울을 통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로제타와 제가 붉은 실로 엮여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서호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눈만 깜빡이던 윤이 안겔을 돌아봤다.
“…정말입니까?”
“모르셨나요? 너무 당연해서 굳이 꺼내지 않은 이야기인데….”
서호가 윤을 돌아보기 전 이채가 돌던 은빛 눈을 바라보는데 그가 안겔에게 부탁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안겔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엮인 인연의 실을 말하는 거랍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실이 얇아질 수도 있고 더 질겨질 수도 있죠. 실이 끊기는 경우도 있고요.”
“아까 들어 보니 실이 보이시는 것 같던데.”
안겔이 다시 한번 테이블 너머 서호와 안겔의 발목을 살피는 것처럼 아래를 내리깔아 보더니 답했다.
“네. 신언을 한 이후부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됐고 만지게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