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72화 (72/155)

#72

왕자와 함께 황궁에 온 지 일주일 하고 하루가 지났다. 안겔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렸다.

‘정보를 얻는 게 너무 느려.’

그녀의 사람을 왕자의 수행원과 함께 이아코스 왕국으로 보내면서 정보를 전달할 끈을 만들기는 했지만 제국과 왕국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아직 한 번도 정보를 받아 보지 못했다.

‘사람을 심은 보람이 없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에 반해…. 왕자는 또 서호를 만났다지.’

왕자는 수완도 꽤 좋았고 운도 좋은 편이었다. 편지를 핑계로 서호와 함께할 시간을 만든 데다가 어머니가 그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더욱 쉽게 서호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왕자의 의도대로 서호가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황제가 막지 않은 건가? 아니면 그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큰 건가?’

서호가 왕자를 대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아직 그가 왕자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오늘 확인하면 되겠지.’

안겔은 조금 전 사용인이 전해준 저녁 식사 초대를 떠올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야겠네.”

식사 초대와 함께 자신에게 개인적인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참이었다. 황궁까지 찾아올 만한 개인 손님이라니, 대충 누가 왔을지는 짐작이 됐다.

‘신전에서 보냈겠지. 그래서 황제가 나를 식사에 초대한 거고.’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안겔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신관 두 명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겔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아한 낯을 했다.

“어쩐 일인가요?”

안겔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그들이 안겔을 따라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어째서 신전에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굉장히 직설적이었다. 어떤 경로로 파악했는지 신전이 왕자가 안겔과 함께 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로 본론을 꺼낼 만큼 저 신관이 다혈질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인간이 다루기는 쉽지. 문제는 누가 보냈냐는 건데….’

안겔이 무해한 미소를 흘리며 입가를 가렸다.

“거짓말이라니요?”

그러자 신관 중 하나가 더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전은 신녀가 이아코스 왕자와 함께 움직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안겔은 일반 신관 주제에 그녀를 빳빳하게 쳐다보며 추궁하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안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다 사내를 어디서 봤는지 알아차렸다.

‘프레이의 사람이었던가.’

저들이 프레이를 보좌하는 걸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프레이의 사람이라니, 윗선에서 보낸 사람보다는 나았다.

안겔은 더욱 당당하게 답했다.

“왕자님과 함께 온 게 아닙니다. 행선지가 겹쳤다고 봐야겠죠.”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왕자와 안겔은 신전을 떠난 시간도 달랐고 황실에 도착한 시간 역시 근소하게 달랐으니까.

그들은 그저 궁 앞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이었다.

안겔이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도 왕자와 함께 동행한다는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즉, 저들은 왕자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뿐 안겔이 그와 동행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일은 없어.’

그러니 이들은 안겔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왕자를 찾아가야 했다. 어째서 신관인 척 사람들을 속이고 황궁에 있는 거냐고.

안겔의 말에 신관의 얼굴에 분함이 들어찼다.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데 그걸 말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 꼴이 꽤 마음에 들어 안겔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서 그걸 물어보기 위해서 황궁까지 왔나요?”

“…바쁘시지 않다면 신전으로 돌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역시 프레이는 안겔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겔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황실에 왔다는 데까지는 짐작하고 있는 것일 테다.

안겔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 폐하께서 부탁하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신전에서는 폐하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로제타를 들먹이자 신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겔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이제 더 할 말은 없으시죠? 실은 이제 곧 폐하와 함께할 식사가 잡혀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짧은 만남은 파했다.

손쉽게 신전의 사람을 쳐낸 안겔은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 다짐했다.

‘또 사람이 올지도 몰라.’

왕자가 황궁에 있다는 걸 프레이가 알아차렸다면, 그녀만이 아니라 윗선에서도 곧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지금처럼 안겔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이가 아니라 제대로 그녀를 압박할 만한 언변을 지닌 자가 올 가능성도 컸다.

‘일이 귀찮아지겠지.’

그러니 그 전에 행동을 시작해야겠다.

황제도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신전의 간섭도 없는 지금이 가장 움직이기 좋은 때였다.

응접실을 나서 방으로 돌아오던 안겔은 복도 끝에서 나타난 인물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솔.”

그러자 안겔이 그렇듯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왕자가 마주 인사했다.

“신녀님, 평안하셨습니까?”

“그래요.”

안겔이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왕자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멈춰서 물었다.

“신전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왕자가 이곳에 있는 걸 들켰으니 무슨 일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기에 안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다른 일은 없답니다. 이만 준비하러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아, 식사요. 저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안겔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래요? 그럼 그대도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안겔은 왕자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화장대로 향했다. 옷차림을 단정히 한 안겔은 거울을 빤히 바라봤다. 거울 너머, 신녀가 된 이후 색이 변한 안겔의 은안이 반짝 빛났다.

‘나만이 가진 것을 이용해야지.’

왕자가 거울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지 않은 것처럼 안겔 역시 왕자에게 숨기고 있던 것이 있었다.

‘이걸 왕자가 중요하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그 외에도 다른 숨겨진 정보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해.’

그래서 그가 먼저 안겔에게 접근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녀만이 가진 힘, 오로지 그녀만 가진 이 눈을 이용해 안겔 자신만이 사용 가능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

칭찬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민망했다.

‘더 아름다운 사람을 옆에 두고 이렇게 칭찬을 받아도 되나?’

하지만 그런 서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티는 너무 아름다우며 잘 어울린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식당 상황을 살펴보고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푸티가 방을 나서자 윙윙 울리던 귀가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푸티는 참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간혹 너무 과하게 서호를 추켜세울 때가 있었다.

‘그 점은 로제타랑 비슷한 것 같아.’

이곳 사람들의 특성인지 뭔지 서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표현이 풍부한 편이었다.

“서호, 아….”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보며 그의 말을 끊어냈다.

“이미 칭찬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됐어요.”

그 말에 로제타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칭찬을 하려던 게 아닌데?”

조금 민망해진 서호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요?”

“저번에 이야기했던 초상화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

서호는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호가 입술에 힘을 주는데 로제타가 불쑥 다가와 서호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물론 그대의 입술은 충분히 귀엽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지만.”

금방 떨어지지 않고 조금 길게 입술을 내리누르는 로제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놀리니까 재밌어요?”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림을 그려주는 마법은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림을 남기려면 결국 화가를 불러야 할 것 같아.”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로제타가 편한 시간에 사람을 불러요.”

로제타가 기뻐하며 물었다.

“같이 그리게 해 줄 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니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대신 나도 하나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후보군을 몇 명 골라올 테니 함께 그림을 그릴 화가를 고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해요. 그런데 로제타.”

“응?”

“굳이 함께 식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서호는 오늘 갑자기 정해진 이 저녁 식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윤을 만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그레이스와 한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거울에 대한 정보를 더 주겠다는 확답을 받기 위해서, 신전 측 사람들이 안겔을 찾아온 이유를 묻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굳이 식사를 함께해야 할까?

‘식사만큼은 편안하게 하는 게 좋지 않나?’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는 로제타에게 서호가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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