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로제타가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서호의 손을 다시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약속을 그리 빨리 잡는 걸 보니 느긋한 성격은 아닌가 보지.”
서호가 그의 손을 붙잡아오는 로제타의 손을 단단히 맞잡아 주며 되받아쳤다.
“로제타는 느긋하다 못해 느린 편이고요?”
약간의 타박이 섞인 서호의 말투를 알아차렸는지 로제타가 눈을 굴리며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가 로제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냥 빨리 처리하고 와요. 나도 최대한 빨리 와 볼게요. 같이 점심을 먹는 건 어때요?”
로제타가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데 약속을 취소할 순 없어도 만남을 빨리 끝낼 수는 있었다. 서호가 대안을 제시하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호가 그런 로제타의 등을 쭉쭉 밀어주며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네, 그러니 이제 빨리 가요.”
서호에게 등을 밀리던 로제타가 문에 도착하기 전 서호를 돌아봤다.
“다녀올게.”
로제타의 시선이 서호의 볼 주위를 배회했다. 순간 서호는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로제타는 어제처럼 볼에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또 입을 맞출까 봐 마음을 졸이던 서호가 안도했다.
로제타는 정확히 어제 그가 입을 맞췄던 볼을 손끝으로 쿡, 찌르더니 돌연 홱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러자 문 옆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인사를 건넨 뒤 로제타를 따라 빠르게 방을 나섰다.
서호는 멀어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푸티가 그렇듯 대기하고 있던 아리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표정이 그게 뭐예요?”
그러고 보니 푸티와 달리 아리스는 로제타가 이렇게 대놓고 투정을 부리는 걸 본 건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리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는 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좀 깨죠?”
아리스가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며 답했다.
“…폐하께서 서호님을 굉장히 아끼시는 걸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아리스의 모습에 괜히 자신이 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아리스를 방에 들이면 몸을 일으킬 줄 알았는데 계속 그래서 저도 조금 당황했어요.”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폐하의 사람이 됐다는 뜻이겠죠. 자, 그럼 서호님. 이제 가 보실까요?”
서호가 재빨리 시계를 돌아봤다.
“약속 시간은….”
“지금 나가시면 딱 맞습니다.”
하긴 약속 장소가 그리 멀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서호나 로제타 모두 본래 나갈 준비는 다 끝난 상태였으니까. 서호는 지체하지 않고 아리스와 함께 바로 방을 나섰다.
응접실로 걸어가는 길, 아리스가 말을 걸었다.
“답장이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로제타도 그레이스가 나랑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고요.”
“적어도 하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아리스는 그레이스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자신이 윤과 너무 친하게 지낼까 염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푸티도 그렇고 다들 걱정이 많네.’
서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려 아리스를 올려다봤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죠?”
아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경계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고작 펜팔 친구를 얻기 위해 제국 황실에 숨어드는 건 이상하니까요.”
“저도 일단 경계는 하고 있는데요.”
윤의 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나라 사람이 맞다는 게 확실시되고 나서 그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한 경계는 나름 착실히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서호가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그렇게 안 느껴져요? 그럼 그만큼 내가 연기를 잘하나 봐요.”
그러자 아리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서호님이 왜 폐하와 잘 지내실 수 있는지 알겠습니다.”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 조금 고민하던 서호는 억울해졌다.
“그거 지금 내가 제멋대로라는 소리예요?”
아리스가 별다른 답 없이 생긋 웃기만 했다. 무언의 긍정에 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리스는 참 짓궂은 데가 있어요. 그래서 재밌고 좋지만.”
“서호님은 굉장히 솔직하시고요.”
“그게 내가 아리스에게 마음을 연 증거고요.”
아리스의 말을 인용하며 웃는데 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 서호가 아리스를 따라 걸음을 멈추며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아리스에게 말했다.
“내가 윤에게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전부 말하면 그때 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아요.”
정말로, 서호는 아직 왕자를 선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웃는 낯이었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의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레이스라는 분을 본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윤은 경우가 다르지.’
서호는 전에 한번 본 적 있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리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잠시 뒤 아리스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그렇군요.”
일자로 굳어 있던 입꼬리가 다시 위로 올라가고 평소의 그로 돌아온 아리스가 다시 서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서호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로제타가 오늘 만남을 허락한 걸 보면 적당히 친분을 쌓는 건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지만 서호님이 맞겠죠.”
“그럼 적당히 친해져 볼게요. 자, 웃는 건 어때요?”
아리스가 서호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보며 답했다.
“평소와 똑같으십니다.”
“그럼 됐어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응접실을 가리키며 돌아본 아리스의 얼굴에서 걱정이 가신 걸 확인한 서호의 마음이 편해졌다.
‘다들 나를 너무 순진하게 보지.’
로제타는 물론이고 푸티 역시 자신을 무슨 어린애를 보듯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들과 비교하면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자신은 아직 다 컸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이로 따지면 이쪽도 나름 성인이었다.
아리스와의 수업을 통해 이쪽 세상의 상식을 어느 정도 익혔고 따라서 로제타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위치와 의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로제타와 어떤 의미로든 깊은 관계가 있는 자신에게 갑작스레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
아리스는 저번 날과는 달리 편한 마음으로 하하 호호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을 지켜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으신 분이야.’
푸티가 너무 부둥부둥, 우리 서호님이 너무 착하고 순진하시다며 걱정하기도 했고 수업 때 직접 본 서호가 워낙에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아리스 역시 자연스레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거랑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다른 건데.’
아리스는 웃는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대화를 마무리하는 서호를 쳐다봤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헤어질까요?”
“바쁘십니까?”
아쉽다는 티를 내는 왕자의 말에도 서호가 미안하다는 듯 답했다.
“이다음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제가 다시 만남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호에 왕자가 제안했다.
“그럼 내일은 어떠십니까?”
그러자 서호가 곤란해했다.
“미안해요. 내일은 수업이 있는데….”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다음에는 저번처럼 편하게 윤이라고 불러주세요. 말을 놓아주시면 더 좋고요.”
놀란 듯 왕자를 바라보던 서호가 이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음…. 그래요. 다음에는 우리 둘 다 말을 놓도록 해요.”
“그럼.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도요.”
아리스는 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서호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응접실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서호가 물었다.
“아리스, 무슨 생각 해요?”
아리스는 솔직하게 답했다.
“마지막에 나누신 이야기는 폐하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서호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아까 들었잖아요. 한글을 읽을 줄 알던데요.”
아리스는 서호와 왕자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오늘 대화의 주제는 후궁 그레이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편지 이야기가 나왔고 왕자가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글자를 알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쪽에서 편지를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부분을 염두에 둘 것을 알 텐데도 굳이 그 사실을 밝힌 이유는 서호와 더 친해지기 위함일 것이다.
‘뭐, 왕자가 편지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이쪽도 의심하고 있던 부분이지만.’
어제 황제가 내린 명령 중에는 앞으로 왕자가 서호와의 대화 중 편지를 읽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는지 확인하라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저번 카나리아 일처럼 왕자가 먼저 확답해준 덕에 로제타의 의심이 사실이 되었지만.
“…그렇죠. 그러니 서호님의 편지를 읽을 수 있을 테죠.”
“네. 그러니 더 친하게 지내려고요.”
원래라면 이런 서호의 태도를 걱정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정확히 서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서호가 만만한 성격이 아닌 걸 파악했으니까.
다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폐하께서 싫어하실 텐데.’
황제가 직접 이 꼴을 보았더라면 두 사람이 말까지 편하게 하며 지내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서호를 방에 데려다준 뒤 곧 황제가 온다는 푸티의 말에 방을 나서던 아리스는 푸티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왜 그러세요, 아리스?”
“…고생 좀 하겠다.”
“네?”
“아니야. 나 보고서 쓰러 갈게.”
“아, 네. 수고하세요.”
아리스는 멀어지는 푸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오늘 황제에게 보고서를 직접 전할 이에게도 명복을 빌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