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왜?”
로제타는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나려는 서호의 허리를 감싸며 뒤에서 그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서호의 냄새.’
아, 품 안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이 좋았다. 코밑에서 솔솔 나는 자신과 같은 향기도.
평소와 조금 다른 스킨십에 어색한 듯 몸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강하게 그를 뿌리치지 못하는 서호가 좋았다. 목을 울리며 웃음을 흘린 로제타가 서호의 어깨에 턱을 괴며 아무렇지 않게 편지를 눈짓했다.
“내게 무슨 내용인지 알려줘. 응?”
맞닿은 피부 너머로 긴장한 서호의 몸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조금 더 달라붙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하얀 목에 코를 묻고 잔뜩 향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러면 긴장한 몸의 떨림을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쿵쿵 뛰는 이 심장 소리도.’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뿌리쳐질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참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강하게 서호를 끌어안으면 그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에 열이 차오를 것 같았다.
‘그건 곤란하지.’
흘끗 시선을 돌리자 붉어진 서호의 귀가 보였다. 말랑거릴 것 같은 귓불을 무는 대신 로제타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바짝 굳어 있는 서호에게 투정을 부리듯 어깨에 얼굴을 문댔다.
“서호?”
그러자 서호가 부르르 몸을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로제타 조금 떨어져 주면….”
“싫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부러 입 밖으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젓자 또다시 서호의 어깨에 그의 얼굴이 문질러졌다. 그러자 서호가 윽,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안고 있어도 돼요. 대신에 그렇게 문지르지 좀 마요.”
“그래.”
적당히 사욕도 채운 데다가 서호가 더 이상 편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편지는 꼭 확인해 봐야 했기에 로제타는 어쩔 수 없이 서호의 허리를 감쌌던 양손 중 하나를 뻗어 편지를 든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자, 이제 편지에 집중할까?”
다시 한번 서호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한숨에 기어이 열이 차올랐다.
서호에게는 절대 티 낼 수 없었기에 로제타는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핥으며 조금 뒤로 몸을 물렸다. 자신이 불편해하는 그를 위해 몸을 물린 줄 알고 서호가 작게 고맙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진해.’
얼핏 방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푸티가 질색한 낯으로 조용히 방을 떠나는 게 보였으나 로제타는 당연히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서호는 지난 며칠간 기다리던 편지를 받았음에도 전혀 편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여전히 로제타의 입술이 닿았던 볼은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허리를 감싼 손과 편지를 든 손목을 쥔 커다란 손.
넉넉하게 그의 몸을 감싼 커다란 품은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어깨에 닿은 턱과 체온에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간지러워.’
드러난 목에 사락거리며 닿아오는 로제타의 머리카락은 간지럽기까지 했다. 서호가 손을 들어 목을 긁으려다가 그곳에 자리한 로제타의 얼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재촉하듯 다시 한번 손목을 단단하게 잡아 오는 로제타에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읽었다.
“서호 씨.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편지를 받아, 도대체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어요.”
편지를 읽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목에 힘을 줬다.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된 한글이 너무 반갑네요. 한글을 쓰지 않은 지 오래돼서 내가 지금 제대로 글을 쓰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꾹꾹 눌러쓴 글자. 담백해 보이는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그리움이 보이는 듯했다.
‘분명 그랬는데.’
처음 편지를 읽을 때만 해도 모든 단어가 머리에 새겨지듯 진하고 무겁게 다가왔는데 지금은 그를 감싼 로제타 때문인지 아까와 같은 느낌은 없었다.
“서호 씨만 괜찮다면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으면 좋겠네요.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지만 첫 편지이니만큼 오늘은 여기서 편지를 줄입니다.”
“흐음.”
로제타가 작게 숨을 내쉬자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서호는 편지가 다 끝난 것을 핑계로 그를 밀어내기로 했다.
“추신, 나를 그레이스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마지막 문장과 함께 서호가 몸을 돌리며 로제타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덕분에 그를 감싸던 몸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서호와 로제타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마주한 푸른 눈을 피하듯 슬쩍 시선을 돌린 서호가 그를 밀어내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내용이에요.”
“그렇네.”
서호가 여전히 잡혀 있는 한쪽 팔을 살짝 흔들었다.
“음, 이제 가서 씻는 건 어때요?”
“왜?”
“당연히 바깥에 나갔다 왔으니까요? 잠들기 전에는 씻어야죠.”
“조금 나중에 씻어도 괜찮은데? 나는 지금이 좋거든.”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다시 서호를 끌어안으려 했다. 슬쩍 몸을 물린 서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그러죠?”
서호가 눈에 힘을 주자 로제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저번에는 서호가 먼저 입을 맞췄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로제타가 너무 시무룩해 보여서 나름 용기를 낸 행동이기도 했다.
“그건 그냥, 나한테도 로제타가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응, 고마워.”
로제타의 해맑은 웃음에 서호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라고 했으니 괜히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고 해요.”
“응?”
“미리 말하고 하라고요.”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로제타가 예고를 하면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았지만 서호는 고집스럽게 로제타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서호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럼 지금 또 해도 돼? 볼이 빨개서 귀여워.”
로제타가 다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 말에 서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악! 하지 마요.”
서호가 도망치듯 뒤로 물러나자 로제타가 그만큼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라고만 했지, 허락받으라고는 안 했잖아.”
그래, 미리 말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허락을 받으라고 해야 했다! 서호가 다급히 말을 정정했다.
“그럼 허락받아요!”
언제나 그렇듯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건 싫은데.”
로제타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서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지금도 많이 참고 있거든. 키스마저 거부당하면 또 울걸?”
황당한 소리에 그를 밀어내던 것도 잊은 서호가 다시 그의 품에 파묻히며 물었다.
“지금 협박해요?”
“협박이라니, 그냥 내가 그만큼 그대를 좋아한다는 뜻이야.”
귀 옆에서 감미로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묵직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서호는 로제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대체 그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하지만 로제타의 품 안이 포근해서, 서호는 그냥 그를 따라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품 안이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
지난밤 편지를 다 읽고 조금 부끄러운 시간이 지난 뒤 로제타에게 편지와 함께 왔었던 윤의 쪽지를 전해줬을 때 그는 흔쾌히 윤과의 만남을 허락했다.
‘정말이지.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로제타는 지금 잔뜩 투정을 부리며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로제타에게 붙잡혀 침대에 앉아 있던 서호가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을 걸었다.
“로제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었잖아요.”
별다른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금발이 서호의 손 아래에서 부드럽게 살랑였다. 그러자 그 손길을 느끼듯 눈을 감고 있던 로제타에게서 나른한 답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급한 일은 다 처리하고 나왔으니까.”
사실 서호도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저렇게 울상을 짓고 있으니 로제타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급한 일을 다 처리하고 왔다면 뒤에서 푸티가 저렇게 안절부절 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호는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푸티에게 작게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로제타를 다독였다.
“빨리 가서 일해야 평소처럼 돌아오죠.”
“늦게 가도 평소처럼 돌아올 수 있어.”
여기서 지내며 느낀 바로 추측해 본다면 황제인 로제타를 대놓고 타박할 수 있는 이가 없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 윤과의 약속 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호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치워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곧 나가야 하는걸요?”
서호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곱게 감겨 있던 눈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잠기운 하나 없이 맑은 푸른 눈이 서호를 응시했다.
“그게 싫은 건데.”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뚱한 기색이 엿보였다. 서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제는 된다면서요?”
“…너무 성급했어.”
확실히 어제 로제타는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었다. 뭐, 그게 정말 충동적인 허락이었다고 해도 이미 서호가 답신까지 보낸 이상 이제 와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일단 상대도 왕자였으니까.
여전히 미소를 띤 서호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이미 편지까지 보냈잖아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