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해야 할 일을 까먹는단 말이지.’
충동적으로 윤이라는 숨겨진 이름을 알려줘 놓고 정작 저번 만남에서도 물어보겠다고 생각했던 일을 묻지 못했었다.
‘저번에 새가 달려들던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먼젓번과 달리 정원에서 이뤄진 티타임에서는 딱히 새들이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본래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에게는 약한 편이긴 했다.
‘별것 아니겠지.’
몇 번 살펴본, 그리고 지금 시종과 대화를 나누는 서호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정원을 나설 때 조그만 새들을 유혹하는 향이나 오일을 바르기도 했으니 아마 그와 엇비슷한 일일 게 분명했다.
‘시종이 방정맞은 걸 보니 저치의 생각이었겠지.’
어머니와 서호가 살던 곳은 마법이나 특이한 힘이 없는 세상이었으니 서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종이 무언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또 다른 곳으로 생각이 샜군.’
작게 혀를 찬 윤이 드디어 잡생각을 지우고 방을 둘러보려고 하는데 서호에게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푸티, 답장은 언제쯤 올까요?”
“네?”
맹하니 눈을 깜빡이는 시종처럼 윤 역시 뜻밖의 질문에 나른하게 턱을 괴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서호가 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마법을 써서 왕국으로 보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오래 걸려요?”
시종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시종만큼이나 윤 역시 서호가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음,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을 제외하면 어른한테 편지를 보낼 일이 별로 없어서요. 조금 걱정이 된다고 해야 하나.”
서호가 작게 침음을 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예법이나 이런 거 잘 모르잖아요. 답이 늦어지니까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요.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물어본 게 실례였을까요?”
“전혀 문제가 없는 편지였어요.”
“그래요?”
“네.”
“다행이다.”
시종의 단언에 불안해 보이던 얼굴에 다시 깨끗한 웃음이 담겼다. 그래, 깨끗한 웃음.
서호의 웃음은 꿍꿍이가 있고 비밀이 있는 자들이 보이는 그런 웃음과 달리 오롯이 즐거움과 기쁨만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 웃음에 시선이 가는 것이다. 귀족들에게서, 그의 주변에서는 찾기 힘든 웃음.
윤이 잔상으로 남은 웃음을 덧그리고 있는데 시종이 제안했다.
“…원하시면 답장을 조금 재촉해 볼까요?”
그러자 서호가 손사래를 쳤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답이 올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도 재미있지 않아요? 조금 초조하고 걱정되고 그러면서도 기대되고.”
콧노래를 부르듯 손을 꼽아가며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을 이야기하던 서호의 모습을 눈으로 쫓는데 시종이 눈을 굴리더니 은근슬쩍 이야기했다.
“폐하께 편지를 주고받자고 해보시는 건요? 흔쾌히 받아들이실 텐데.”
순간 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편? 아니, 이건 불쾌함이었다. 이 편지는 다른 이가 침범할 수 없는…. 순간 서호의 얼굴이 크게 일렁이며 흐려졌다.
마법이 풀린 것인가 흠칫 놀랐던 윤은 찻잔을 세게 쥔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는 손에 힘을 풀었다.
사실 이어진 서호의 답에 자연스레 손에 힘이 풀리기도 했다. 넘칠 듯 출렁이던 찻물이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다시 서호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래요? 그리고 내가 이 편지를 기다리는 건 낯선 이와의 편지이기 때문이에요. 편지가 이어질수록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그런 관계요.”
서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어쩌면 같은 걸 공유한 사람들끼리 가지는 약간의 유대감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고요.”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유대감. 그래, 그런 것이 있었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온 이. 그리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
“…서호님.”
시종의 얼굴에 심각함이 감돌았다. 시종이나 황제가 서호와 자신이 가까워지는 걸 반가워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딱딱해진 시종의 표정을 알아차린 서호가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아, 너무 진지하게 들렸어요?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데.”
“본래 세상이 그리우십니까?”
직설적인 시종의 물음에 윤이 다시 서호를 바라봤다. 그는 예전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윤은 찻잔 너머,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서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만약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그의 얼굴에서 보일 모든 감정의 파편을 샅샅이 파악하기 위해 찻잔에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고개가 기울었다.
“로제타처럼 푸티도 그걸 걱정하는군요?”
그리고 그런 윤의 마음이 패밀리어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패밀리어가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서호?”
하지만 윤은 서호의 답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벌컥 열리는 문 사이로 냉막한 푸른 눈이 나타났다.
영역의 주인이 나타났음을 깨달은 윤은 재빨리 패밀리어와의 연결을 끊어냈다.
배짱 좋게 황제의 영역을 멋대로 탐색하고 있었지만 윤은 어디까지가 넘어선 안 되는 부분인지를 알고 있었다.
‘보통 힘이 아니었지.’
응접실에서 황제의 힘을 조금이나마 엿보지 않았던가.
적어도 황제나 서호의 뒤에 있던 마법사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패밀리어를 사용해서는 안 됐다.
‘원하던 걸 찾을 때까지는.’
그러니 오늘은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윤은 코를 박을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 건지 목덜미가 뻐근할 정도였다.
‘너무 신경 쓰고 있어.’
사내의 모든 부분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 옳지 않음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를 그냥 보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도와줘…, 누군가 도와달라고….’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절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볼까.”
서호가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게. 마침 윤에게는 적절한 수단이 하나 있지 않은가.
‘답장을 서둘러야겠군.’
***
“다녀왔어요?”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서 일을 살피고 돌아온 로제타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평소보다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편지를 흔들어 보이는 서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답장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네, 생각보다 빨리 왔죠?”
“그렇네.”
서호가 편지를 보내고 닷새가 지나고 도착한 편지였다. 딱히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기뻐하는 서호에게 딴죽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날 정원에서의 만남 이후, 왕자와 서호 사이에 특별한 만남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던 로제타는 전날 서호가 생각보다 편지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푸티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오늘 기다리던 편지를 사용인을 통해 전해 받은 서호는 전에 없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환하게 피어난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게 되면서도 당장이라도 저 편지를 빼앗아 들고 싶었다.
‘저깟 게 뭐라고….’
로제타는 서호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시커먼 감정을 꼭꼭 숨기며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많이 기다리던 것 같은데 읽어 봤어?”
편지가 도착했다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으면서 로제타의 겉모습은 매우 태연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는 그에게 서호의 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같이 읽으려고 아직 열어 보진 않았어요. 로제타도 은근 관심이 있었잖아요?”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는 서호의 말이 놀라웠다.
로제타의 관심은 서호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신경 써준 서호가 좋았다.
로제타가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렇지. 빨리 읽어 보자.”
“네.”
서호가 긴장한 듯 작게 숨을 내뱉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뜯어 볼게요.”
나중에 자신이 편지를 보내도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 표정을 지어줄까? 유치한 생각을 하던 로제타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다시 편지를 내려다봤다.
서호가 깔끔하게 봉투를 뜯어내고 종이를 펼쳤다. 편지를 살피기 위해 로제타가 서호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편지의 첫 문장을 확인한 로제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대의 글자야.”
왕자의 또 다른 이름을 들었을 때 이미 인정한 부분이지만 이로써 정말 이아코스 왕국의 후궁이 서호와 같은 세계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로 증명된 셈이었다.
“…정말이네요.”
살짝 떨리는 서호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살폈다.
편지에 완전히 빠져든 것처럼 가까이 있는 로제타의 존재를 전혀 개의치 않는 그 모습에 손이 꿈틀거렸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로제타는 충동에 몸을 맡겼다. 나를 제일 많이 생각해 주고, 언제나 마음 한쪽에는 자신이 존재했으면 했다.
로제타는 어리고 솔직한 마음을 담아 바로 앞에 있는 서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일부러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자 편지를 훑던 눈이 빠르게 로제타에게로 돌아왔다.
“로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