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68화 (68/155)

#68

사용인들을 이용해 왕자를 살피라는 명령을 받았던 푸티가 입을 열었다.

“성격이 좋다는 이야기 외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들려오진 않습니다.”

벌써 대단한 걸 알아 오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로제타가 무심히 답했다.

“우리 쪽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잘 관리해.”

괜히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다가갔다가 멍청하게 이쪽 정보를 넘겨주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물론 이렇게 구구절절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그럼에도 로제타는 한 번 더 주의를 주면서 동시에 푸티가 혹할 만한 보상을 드러냈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시종장 자리를 슬슬 넘겨주겠다.”

로제타는 푸티가 꽤 권력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 권력욕보다는 황실과 자신을 향한 충성심이 더 컸기에 그를 직속 시종으로 둔 것이고.

‘눈치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지.’

푸티가 들으면 잔뜩 억울해할 이야기였으나 로제타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로제타의 말에 푸티가 감격해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권력욕과 충성심이 합해지면 푸티는 맡은 바를 더욱 훌륭히 해낼 것이다. 사용인들을 다루는 일에 꽤 재능을 보이는 자이니, 시종장이라는 보상이 과한 것도 아니었다.

의욕이 가득한 푸티를 살피며 로제타가 창밖을 돌아봤다. 아무리 티타임 장소와 집무실이 가깝다고 해도 창문 너머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신력을 이용해 그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 수도 없었고.

‘쓸데없이 궁이 넓군.’

궁의 크기를 좀 좁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게 혀를 찬 로제타가 푸티에게 물었다.

“저쪽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린 푸티가 차를 가져다준 사용인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무난합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딱히 분위기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말이었다.

“서호가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 적당히 내가 부른다는 핑계를 대.”

“네.”

“가 봐.”

그렇게 푸티를 돌려보낸 로제타는 서호의 일정이 그리 길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푸티나 아리스, 그리고 자신 외의 다른 이들, 정확히는 사용인들을 불편해하던 걸 보면 서호는 조금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로제타의 생각보다 티타임은 길게 이어졌다.

‘두 시간.’

로제타는 아리스가 보낸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아리스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면 서호의 옆을 떠나지 말라 명령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찾아와 보고를 하기보다는 보고서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일머리가 있군.’

로제타는 아리스가 전해준 대화를 꼼꼼히 되짚어 봤다. 이곳에서 쓸 가명을 알려주고 공통적인 화제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흔한 대화법이었다. 종종 거슬리는 질문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없었다.

‘카나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의외지만.’

나름 잘 지내겠다는 제스처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살피던 로제타의 눈이 서늘해졌다.

“윤?”

햇빛 윤. 이로써 정말 후궁이 서호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게 더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서호의 이름과 비슷한 방식으로 지어진 이름. 고향이 같은 어미를 가진 이, 거기다가 이름까지 비슷하다면.

“…서호가 신경 쓸 수밖에 없겠군.”

로제타는 어둠에 잠식되어 손아귀에서 부스러지는 펜을 털어냈다. 그리고 점점 더 부식되는 책상을 내려다봤다.

서호가 그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낀 이상 앞으로 서호는 쉽게 왕자와의 만남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막지 못할 테고.’

하지만 이전 날처럼 속이 들끓지는 않았다.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그날의 대화와 키스 때문이겠지.’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던 고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로제타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야지.’

로제타는 서호에게만큼은 되도록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서호에게 자율성을 주겠다면서 이딴 식으로 그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글러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로제타는 나름 최선을 다해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렇게 해야 진정으로 그대를 가지게 되는 걸 테니까.’

로제타는 만들어진 선택이 아닌, 서호 스스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원했다.

***

카나리아의 존재를 서호에게 밝혔다고 해서 윤의 눈을 대신하던 눈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서호와의 티타임 이후 별다른 일정 없이 그에게 주어진 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윤은 생각했다.

‘규모에 비해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군.’

물론 이곳은 황제의 궁이고 황제의 의심을 받고 있는 윤의 주위에는 그를 감시하는 시선이 많았기에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었다.

‘일상적인 수준의 마법이라면 모를까, 마나를 조금만 많이 써도 문제가 생기겠지.’

지금 윤이 있는 곳은 황궁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황제궁이었고 따라서 황제의 군사들이 안전에 예민하게 구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제압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윤이나 이아코스 왕국은 제국에 제대로 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윤은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얌전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진짜로 얌전히 보내지는 않았지만.’

작게 입꼬리를 올린 윤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검지로 쓸며 찻잔 안에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서호의 모습을 살폈다.

‘예상대로 황제와 함께 방을 쓰는군.’

이번에 윤이 이용한 것은 최근 들어 그와 가까워진 사용인들이었다. 황제가 믿는 이들이 아닌 모양인지 자신이 왕자라는 것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용인들.

윤은 그런 사용인들에게 조그만 벌레를 하나씩 붙여줬다. 정확히 말하면 직접 챙겨 온 벌레로 만들어진 그의 패밀리어들이었다.

‘정원이 밖에 있으니까 이상하지도 않고.’

왕국 너머에서 새를 조종하던 것과 달리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조종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벌레의 크기가 작은 만큼 세심한 마나 조절이 필요하지만 이용되는 마나는 크지 않았기에 황실 마법사들도 눈치채지 못할 게 뻔했다.

‘일회용이라는 게 아쉽지만.’

그리고 오늘 윤은 정말 운이 좋게 서호의 방 안으로 벌레를 들여보낼 수 있었다.

‘아리스라는 마법사가 없군.’

그들을 지키는 호위들이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 거리가 먼 상태에서 이 정도의 마나를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찻잔 너머, 서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황제의 직속 시종이라는 푸티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공명이 들리듯 밝은 웃음소리가 귀 안에 울려 퍼졌다.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인 윤 말고는 그 누구도 듣지 못하는 웃음소리였다.

“그래? 푸티가 고생이 많네. 그래서 요즘은 또 누가 말썽이야?”

“어휴, 글쎄 오늘은 주방에서 일하는 애가 그릇을 다섯 개나 깨트렸다니까요?”

“다섯 개?”

“손이 미끄러져서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쳤거든요.”

그러자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친 곳은 없대?”

윤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데 푸티가 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서호님은 너무 친절하세요. 다친 곳은 없어요. 그저 월급이 삭감될 뿐이죠.”

“월급이 삭감돼?”

안타까움 가득한 표정을 확인한 푸티가 단호한 얼굴로 당부했다.

“당연하죠. 그 그릇이 얼마짜리인데요. 그리고 제대로 벌을 줘야 다음에 조심하죠.”

물론 당당한 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푸티가 서호의 눈치를 보듯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으니까.

서호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돌아보자 푸티가 핑계를 더했다.

“정말 황궁 사용인들은 혹사를 당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을 겪지 않는….”

서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런 쪽은 푸티가 잘 알겠지.”

“그런가요?”

“응.”

서호의 단언에 푸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못마땅함을 드러내던 상대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뭐, 그래도 다 깨 먹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만약 그 접시들이 다 깨졌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비틀거리다가 중심은 잡아서 반절도 채 망가지지 않았거든요.”

주로 서호보다는 직속 시종이라는 자가 말을 더 많이 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저 별것 아닌 이야기에 재밌다는 듯 눈웃음을 치는 모습에 시선이 갔다.

자신의 앞에서 보이던 웃음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웃음이었다. 조금 더 편안해 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웃음.

‘어제 이름을 알려줬을 때와 비슷하려나?’

그렇게 잠시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듣던 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들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풀어놓은 벌레를 통해 궁을 살펴봐야 했으니까.

‘한 번에 한 시야만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불편하군.’

애당초 아무리 벌레라고 해도 패밀리어를 여럿 만든 것부터가 규격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컸다.

‘시야를 여럿 공유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해볼까?’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연구라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윤은 미련을 버리고 운 좋게 황제의 방에 들어온 김에 주변을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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