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루미너스는 서호를 만나러 정원으로 향하기 전 서호가 어머니를 위해 쓴 편지를 다시 떠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글자라 읽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반가웠던 글씨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글자이자 그에게만 몰래 알려주셨던 글자.
처음 글자를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뜻이야?’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라는 뜻이지.’
‘내가 배운 적 없는 글자야.’
왕자라는 위치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천재라는 위명에 맞게 사멸된 과거의 문자까지 배운 적이 있었던 루미너스도 처음 보던 것이었다.
그 말에 어머니가 그리움 가득한 얼굴로 종이 위 글자를 매만지더니 말했다.
‘그야 아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거든. 엄마가 옛날에 쓰던 거야. 가르쳐줄까? 대신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면 안 돼. 특히 아버지한테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 둘만의 비밀이 생긴다는 게 좋아 열성적으로 글을 배웠다.
그리고 글을 가르치는 동안 어머니는 꽤 행복해하셨고.
편지에 적힌 글자는 어머니의 둥글둥글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사내의 생김새처럼 단정한 모양새와 그 모양새만큼이나 정갈하던 편지.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셨나요? 제 이름은 이서호라고 합니다.
이름에서 아셨겠지만 루미너스 이아코스 왕자님을 통해 우리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런 곳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네요.
반가운 마음에 보낸 이 편지가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알려주세요.
저는 서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긴 미사여구를 생략한 짧고 간략한 내용이었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편지였다. 꾸밈없는 편지라 더욱 시선이 갔고.
‘윤아.’
다정하던 목소리. 다갈색의 부드러운 눈.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그가 다가서면 옅게나마 미소를 지어주던 그 입가.
그의 중간 이름 솔라를 따 만든 그들만의 애칭. 따뜻하게 볼을 매만지던 손을 떠올린 루미너스는 표정을 굳혔다.
이방인을 생각하다 어머니를 떠올리다니 안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지.’
추억의 글자를 눈에 담은 순간 틈이 생기는 건 사내가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이기에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무작정 이용할 수도 없게 됐고.’
가벼운 마음으로 카나리아를 보냈던 과거와 지금의 마음가짐이 다른 건 루미너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루미너스가 새에 대한 걸 밝히자 서호는 어색함과 당황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놀람보다는 어색함과 당황을 느낀다는 건 이 새가 자신의 소유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밝히길 잘했군.’
훗날 황제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냈다면 문제가 커졌을지도 몰랐다.
‘뭐, 지금도 문제 삼으려면 할 수 있겠지만…, 원하는 정보가 있으니 그리하진 않겠지.’
루미너스는 서호의 뒤에 호위로 따라온 마법사를 바라봤다. 평온한 듯 보이지만 마법사의 눈은 기민하게 자신을 좇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서호는 어느새 그의 주위를 통통 뛰어다니는 카나리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응접실이 아닌 햇빛 아래에서 보는 서호의 머리카락은 루미너스의 것처럼 새카맣지는 않았다.
‘갈색빛이 도는군.’
카나리아의 움직임이 마음에 드는 듯 주변을 돌아보던 눈동자와 자연스레 생기던 웃음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작은 일에 기뻐하고 놀라며 슬퍼하던 어머니.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환하게 드러내던 분. 그래서 루미너스는 어머니의 옆에 있을 때면 편안했다.
그를 속이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자 아낌없이 사랑을 퍼붓는 어머니는 그에게 늘 안식처였다.
‘그리고 이 사내는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고.’
루미너스가 다시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놀라셨습니까?”
“…네.”
서호가 손가락에 머리를 비비는 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답했다.
‘귀여운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보통 사람들은 귀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니 그의 반응은 평범한 것임에도 이런 것까지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루미너스는 계속해서 서호의 경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는 서울이라는 지역 출신이셨죠. 어머니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서호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 아마 어머니라는 분과 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았을 거예요.”
확실히 어머니는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겠군요.”
“어머님께서 서울에 사셨을 때는 제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지금의 서울이라도 알고 싶다 우길 수도 있겠지만 루미너스는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스무 살이 됐어요.”
어머니가 이곳에 왔을 때의 나이와 엇비슷했다. 루미너스는 어머니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가요? 그쪽도 스무 살이면 성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맞아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음, 대학생이었다고 하셨죠. 이곳에 오신 건 스물한 살 때이십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거울 속에 이상한 문양이 생긴 게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하셨고요.”
“그렇구나.”
관심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대화에 크게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뒤에 있는 호위의 눈치를 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안겔을 통해 서호의 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얻은 뒤였다. 저 사내는 서호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 곁을 지키던 마법사였고 당연히 황제의 사람일 것이다.
루미너스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를 보며 생긋 웃다가 다시 서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서호님께서는 이곳에 잘 적응하고 계십니까?”
굉장히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만약 여기서 서호가 조금이나마 불편함을 표현한다면….
하지만 서호는 망설임 없이 답할 뿐이었다.
“네. 다들 친절하고 많은 걸 알려주고 있어요.”
그의 얼굴에는 주변 이들을 향한 믿음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이곳에 적응하는 걸 조금 힘들어하셨습니다.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나셨었나 봅니다.”
“그리울 수밖에 없겠죠.”
그 얼굴이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그리움이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움에 파묻혀 있지는 않은 모습.
‘원래는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루미너스가 담백하게 물었다.
“서호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런 질문을 받을지 몰랐다는 듯 서호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뭐,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좋은 이들이 옆에 있고요.”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루미너스는 뒤에 있는 마법사가 나서기 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조금 전 자신의 질문들은 충분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법한 것들이었다.
“그렇군요. 서호님의 편지는 어머니께 잘 전달했습니다.”
“편지를 언제쯤 받아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하지만 연락이 오는 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솔….”
이름이 어색한 모양인지 눈을 굴리는 그 모습에 입술이 달싹였다.
‘윤, 나의 햇빛. 나의 태양.’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린다는 생각이 든 순간 루미너스는 또다시 충동에 몸을 맡겼다.
“편하게 윤이라고 불러주세요.”
“…윤이요?”
서호의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 놀란 게 보였다. 그와 함께 앞으로 쏟아지는 상체.
“윤. 어머니께서 저를 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햇빛 윤 자를 썼죠.”
“…좋은 뜻이네요.”
배시시 웃는 얼굴에 눈이 갔다. 편안하게 풀린 얼굴과 반가움. 비슷한 이름을 쓴다는 게 여러모로 좋게 작용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눈매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루미너스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귓가에 다시 한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어머니에게만 보여주던 가식 없는 웃음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피어난 그 웃음 이후 분위기 역시 일변했다. 중간중간 윤이라고 불리는 그 호칭에 손끝이 오므라드는 것만 빼면 정말 완벽했다.
뒤에 있는 마법사나 황제는 반기지 않겠지만.
***
서호를 아리스에게 맡기고 집무실로 들어선 로제타는 왕국과 관련된 일을 가장 먼저 처리한 후 안겔에 대한 보고서까지 살핀 뒤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대기하고 있던 푸티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 방은 로제타가 집무실에 등장하는 것을 불편해하던 보좌관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국정 회의가 끝나고 로제타가 서호와 시간을 보낼 무렵, 푸티가 본래 집무실 옆에 급하게 만든 로제타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로제타는 그저 요새 집무실을 자주 방문하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로제타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보좌관들은 일을 잘하는 이들을 뽑은 것일 뿐, 믿을 만한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