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전날 밤의 인내와 짜증이 무색하게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로제타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 잠에서 깨어난 서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 이후 로제타는 햇볕이 내리쬐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서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 종이를 넘기는 선이 고운 손가락.
사락, 사락-.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띠는 입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발음해 보는 도톰한 입술.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안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좋네.’
입가로 웃음이 새어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소리를 내면 책을 집중해서 읽던 서호가 고개를 들어 로제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웃는 로제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있음을 잊지 않고 바라봐주는 눈이 좋긴 했지만 그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로제타가 책을 눈짓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서호가 몇 장 남지 않은 페이지를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이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렇게 로제타가 미지근한 찻잔을 한 번 더 비웠을 때, 서호가 책을 탁, 덮으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가득 담겨 있는 만족을 느낀 로제타가 물었다.
“책이 괜찮았어?”
“네. 재밌었어요.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간간이 나오는 말장난도 재밌네요.”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로제타는 서호가 읽은 책의 저자를 잘 기억해 두었다. 기분 좋게 여운에 빠져 있던 서호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로제타는 지루했죠?”
“지루하긴, 나도 좋았어.”
서호를 보는 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서호가 그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눈짓했다.
“뭐, 보고 있었어요?”
“응. 이것 때문에 즐거웠던 건 아니지만.”
서호가 로제타의 손에 들린 종이에 관심을 가졌다.
“뭔데요?”
어차피 서호에게 해줘야 할 이야기였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네?”
때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들어와.”
오늘은 예정된 수업이 있는 날이 아니었기에 서호가 놀란 듯 그를 불렀다.
“아리스?”
여기 왜 왔냐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는 부름에 로제타는 아리스가 답을 하기 전 손에 들린 종이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 아리스는 수업이 아니어도 자주 방에 올 거야. 서호, 노란색 카나리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아.”
“그때 그 새랑 정확히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해?”
작게 침음성을 내던 서호가 기억을 더듬어 답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 이름을 물었어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를 돌아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인 왕자가 새를 통해 이쪽을 감시하는 건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 대단한 마법사겠죠.”
아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같은 궁에 머무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기에 그들은 같은 궁에 있어야 했다.
“같은 궁에 있는 게 감시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서호도 마냥 약하기만 한 건 아니고.”
새삼스레 다시 한번 서호에게 신력이 옮겨간 것이 감사했다.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신력 덕에 서호가 이곳에 머물 수 있다면 더더욱.’
아리스가 서호를 돌아보며 로제타의 말에 동의했다.
“다행인 일입니다.”
“서호가 의식하지 않아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힘이 본능적으로 서호를 지키겠지. 하지만 혼자 두는 건 불안하니, 마법사 아리스?”
“네.”
“한동안 서호의 호위 역할을 해 줘야겠어.”
아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러겠습니다.”
그때 서호가 조심스레 나섰다.
“그럴 필요가 있어요? 주변에 나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호를 바라보던 로제타는 왕자가 마법사임을 밝힌 이후 서호를 지키고 있던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로제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알겠어?”
“네. 다섯 명쯤 있죠?”
정말 서호는 이제 신력을 완전히 그의 것으로 만든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서호, 그들이 전부 다 구별되기도 하나?”
“대충요.”
다행히 서호는 긍정의 답을 했다. 어울리지 않게 또 한 번 신앙심이 솟아올랐다.
“그들을 잘 기억해 둬. 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나타나면 경계하고.”
“아리스는요?”
“아리스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야.”
아리스까지 그게 좋겠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 서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때맞춰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방 안에 들어선 푸티가 로제타에게로 다가와 편지 하나를 건네줬다.
“이아코스 왕자님께서 괜찮다면 함께 티타임을 갖자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로제타의 물음에 뻔한 답이 돌아왔다.
“서호님에게요.”
“단둘이?”
“네.”
로제타는 서호에게 편지를 읽어 봐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은 뒤, 편지를 열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앞으로 꽤 긴 시간 황궁에 머물게 될 테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준 것도 고마우니 함께 티타임을 가지는 게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추신에 적힌 말은 거슬렸지만.
“편안한 대화를 위해 단둘이 만나자는군.”
로제타는 편지를 접은 뒤 아리스를 돌아봤다.
“호위를 데리고 가는 건 상관없겠지.”
황족이나 왕족들에게 시종이나 호위들은 당연히 뒤따르는 것들이었기에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로제타의 말에 아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요청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서호 그대가 싫지 않다면.”
로제타가 서호를 돌아봤다.
‘지금 당장 서호가 위험한 일은 없어.’
후궁과 서호가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건 양쪽 모두에게 득과 실이 있었다.
서호가 왕자와 후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저들 역시 서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로제타는 왕자의 눈에 약하게 감돌던 호감을 떠올렸다. 왕자가 서호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걸로 인해 서호가 안전하다면 로제타는 그 관심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하겠어, 서호?”
로제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서호가 답했다.
“…한번 만나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피하기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로제타의 말처럼 신력도 있으니까요.”
푸티가 슬쩍 로제타의 눈치를 봤지만 로제타는 특별한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 대신 문제가 생기면 신력을 뿜어내는 거야. 그럼 내가 바로 찾아갈게.”
서호가 생긋 웃었다.
“그럴게요.”
로제타는 왜 이렇게 순순히 서호를 보내주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푸티나 아리스의 시선을 외면하며 왕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물론 굳이 이 편지를 로제타가 직접 작성한 이유는 서호와 로제타 사이의 유대를 보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유치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편지를 보여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이며 이 편지를 자신이 보았음에도 네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사이가 굳건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
바로 다음 날 마련된 왕자와 서호의 티타임은 꽃이 예쁘게 핀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날씨는 그리 덥지 않았고 활짝 핀 꽃은 서호의 눈을 즐겁게 했다.
‘집무실에 있을 거라고 했지?’
로제타의 집무실은 서호가 있는 정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가까운 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은 서호를 안심하게 했다.
그래, 눈앞의 상대를 제외하면 이 티타임은 나쁘지 않았다.
‘어색해.’
필요에 의한 자리라고는 하지만 자기를 솔이라 불러 달라고 한 왕자와의 시간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기도 했고, 그를 보자 노란색 카나리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조금 차갑고 날카로웠던 것 같은데.’
카나리아를 통해 들었던 목소리와 지금의 왕자는 풍기는 느낌이 달랐다.
왕자는 쾌활한 인상의 사내였는데 그건 그가 가진 이목구비 때문이라기보다는 웃고 있는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무표정을 하고 있으면 긴 눈매와 얇은 입술 때문인지 서늘해 보였지만, 로제타가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생겼다면 사내는 조금 날카롭게 생긴 미남이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그때 목소리랑 어울려.’
그때 다시 한번 웃음과 함께 왕자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둥글게 휜 눈과 보조개가 파인 볼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데 왕자가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없앨 겸 재미있는 걸 보여드릴까요?”
“재밌는 거요?”
“네.”
잠시 고민하던 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눈을 찡긋거리더니 손을 뻗었다.
서호의 뒤에 서 있던 아리스가 앞으로 한발 나서더니 작게 왕자를 불렀다.
“왕…, 솔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그리 말한 왕자가 손을 조금 더 위로 올리는데 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새 하나가 그의 손에 날아들었다.
왕자가 살짝 웃으며 손가락 위에 올라선 새를 눈짓했다.
“본 적 있으시죠?”
왕자의 손 위에 올라간 노란색의 카나리아. 조금 전까지 서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서호가 놀라 왕자를 바라보자 그가 설명을 더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황궁에 제 눈이 있었죠. 바로 이겁니다.”
카나리아가 왕자의 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매우 귀여웠지만 서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나리아요.”
“제 목소리 어디서 들은 것 같지 않으십니까?”
“새를 통해 말을 거신 게 왕자님이라는 소린가요?”
“네, 맞습니다. 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음, 폐하께서도 재밌다고 생각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군요.”
이걸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서호가 슬쩍 아리스를 돌아봤으나 그 역시 지금 이 상황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기가 직접 새를 통해 그를 감시했다고 알리다니. 정말 예측 불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