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여전히 부모님은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슬픔이 덜했다.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어요. 이제 외롭지도 않거든요.”
“외롭지 않아?”
갑작스레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솔직하게 말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친구가 줄 수 없는, 그 끈끈함을 잃으니 지독하게 외로웠었다.
“그게 그리웠거든요. 그런데 로제타와 저는 붉은 실과 운명이라는 울타리가 있잖아요.”
운명, 추상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가족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강하게 연결된 것.
“소속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 혼자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로제타에게는 늘 고마워요. 조금 부담스럽죠?”
쑥스러움에 로제타를 쳐다보지 않고 줄줄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서호는 옆에서 둘려오는 떨리는 숨소리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를 돌아봤다.
“로제타?”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로제타를 발견했다.
“울어요?”
당황한 서호가 서둘러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로제타가 잔뜩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서. 그대는 항상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해.”
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방금 그 말에 좋아할 만한 부분이 어디 있어요?”
부담스러우면 모를까. 하지만 로제타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점점 더 굵어지는 물방울에 서호가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울지 말라니까요? 진짜 울보라니까.”
끝에 가서는 기어이 타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로제타가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서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더니 헐떡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대가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해 줄 줄 몰랐다. 오히려 날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어.”
서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냥, 그냥….”
로제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서호는 마음이 안 좋아졌다.
하긴 이제껏 서호가 좋다는 걸 숨김없이 표현해온 로제타와 달리 서호는 그에게 제대로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가?’
숨기려고 하는 것 같기에 모른 척하긴 했지만 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고,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말에 급격하게 흔들리던 로제타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그날 왕자와 헤어지고 단둘이 대화를 나눈 이후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서호가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로제타의 눈물방울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로제타는 우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더 예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며 로제타의 눈물을 빤히 바라보던 서호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에 서호의 입술이 닿았다.
눈물 특유의 짠맛이 살짝 느껴졌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긴 하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푸슬푸슬 웃은 서호가 입술을 떼어내고 로제타와 눈을 마주했다가 환하게 웃었다.
“아, 그쳤다.”
끝을 모르고 흘러나오던 눈물이 멈춰 있었다.
***
특별하다는 게 이런 뜻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정도의 의미가 있다는 게 좋았다. 그게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후궁에게 편지를 쓰는 걸 지켜보는 동안 다시 스멀스멀 차오르는 소유욕과 불안함을 한 번에 종식시키는 서호의 말 한마디.
다정하게 눈을 닦아주는 손에 염치없이 눈물은 더욱 솟아났다. 멈춰야 하는 걸 아는데, 걱정스레 그를 쳐다보는 눈이 좋아서 계속 울었다.
그리고 눈가에 말랑한 입술이 닿은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꿈인가?’
꿈이라서 자신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꿈이라면….’
핑크빛이 도는 통통한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다시 멀어진 서호가 민망하다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푸티가 그러더라고요. 여기는 친한 사람이면 입 정도는 잘 맞춘다고요.”
푸티라니,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꿈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놈을 칭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벌해야 하는 걸까.
로제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호가 줄줄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쪽에서도 뽀뽀 정도는 가볍게 하는 사람도 있고.”
서호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참 친절하게 했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공허함이 들어찰 무렵, 서호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더했다.
“하지만 일단 저는 아니에요.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그만큼 로제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정말 왜 저러는 걸까?
‘왜 계속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
달싹이는 입술에서 더운 숨이 흘러나왔기에 로제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순수한 애정으로 빛나는 이에게 이 욕망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로제타가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
로제타는 서호가 쓴 편지를 왕자에게 보낸 뒤 저녁을 먹고 서호가 잠이 들 때까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그리고 서호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잠이 들자 드디어 이 인내의 시간이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로제타의 착각일 뿐이었다. 서호가 잠들자 더욱 그에게 손을 대고 싶었다.
‘서호는 모를 테니….’
자고 있으니까 입 정도는 맞춰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입을 맞추고 나면 더한 게 하고 싶어질 게 뻔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계속 저 통통한 입술로 향했다. 분홍빛의 말랑해 보이는 저 입술.
“하아.”
하지만 다행히도 로제타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불빛 사이로 고개를 숙인 남자가 보였다.
로제타가 직접 뽑은 그림자 중 하나였다.
침대 주위를 감싼 캐노피 너머로 무릎을 꿇은 사내가 로제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직 첩자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못 찾아냈다?”
황궁의 거울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왕자의 말을 듣자마자 그림자들을 통해 첩자를 찾아내라 명령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은 첩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형편없었다. 비틀어진 심기를 알아차린 사내가 재빨리 말을 보탰다.
“…국정 회의로 인해 이동했던 귀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틈을 타 첩자가 빠져나갔다면 이제 와서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로제타가 몸을 완전히 틀어 사내를 돌아보자 그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첩자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핑계에 코웃음이 튀어 나갔다.
“사람이 아니다?”
“그분께서 등장하신 이후로 궁에 새로운 사용인이 투입되지는 않았습니다. 기사나 마법사들을 조사했지만 마찬가지로 왕자와 접촉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림자가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조사 결과를 전해 들은 마법사 아리스가 왕자의 마법 실력이 대단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왕국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면 조금 어렵긴 해도 마법을 이용해서 이쪽을 감시할 수 있다는군요. 그리고 저번에 폐하께서 명령하신 카나리아….”
“잠깐.”
서호에게 말을 걸었다는 그 카나리아. 도대체 왜 이제야 생각이 났나 싶을 정도였다.
‘정말 요 며칠 제정신이 아니었군.’
힐끗 서호를 돌아보며 눈매를 파르르 떨던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에게 조금 더 자문을 구해 봐.”
“네. 그리고 명령하신 대로 이아코스 왕국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다시 보고해.”
“알겠습니다.”
“안겔과 왕자는?”
“왕자를 직접 데려온 것치고는 별다른 친분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던 안겔이 준 거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서호를 발견한 순간 무시됐었고.
‘왕자가 한 말을 들어 보면 어째서 안겔이 내게 거울을 줬는지는 뻔하지.’
분명 그 여자는 모든 걸 알면서 자신에게 거울을 줬을 것이다.
‘두려움은 보여도 억울함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 여자가 왕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왕자는 그간 안겔이 숨긴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공개했다.
‘…내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겠지.’
안겔이든 왕자든 자신에게 거울에 대해 아는 모든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자기들끼리도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을 테고.’
왕자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흐트러지던 안겔의 표정을 기억했다. 후궁의 나라를 듣는 순간도 그러했고.
안겔이 거울을 준 목적을 알게 된 이상 지금 처리해 후환을 없애놓는 것이 좋음을 알았다. 하지만….
‘왕자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지금은 안겔을 이용하는 게 좋겠지.’
왕자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안겔을 이대로 두는 것이 더 나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안겔보다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왕자가 더 위험한 인물이었으니.
“두 사람은 계속 감시하고, 정보는 얻는 대로 모두 가져와.”
“네.”
로제타는 부드럽게 서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치미는 조급함을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