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64화 (64/155)

#64

서호. 왕자의 말대로 서호는 초반과 달리 왕자가 어미의 이야기를 꺼낸 이후 태도를 달리했다.

서호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 안겔로서도 반겨야 할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호를 멍청이 취급하는 것 같은 왕자의 태도는 거슬렸다.

‘다 저 사내가 재수 없기 때문이야.’

로제타처럼 신에게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감히 신녀인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며 명령을 내리는 저 사내가 싫기 때문이 분명했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의 곁에는 황제가 있어요.”

“그래. 그렇지.”

오늘 이어진 충격적인 이야기의 연속에 여태껏 그녀를 보던 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치게 반질거리던 눈동자.

‘신력에 공격당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황제의 몸 안에 숨어 있을 그것이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아 더 겁이 났다.

특히 꿈이 뜻하는 바와 꿈을 꾼 이방인들이 본인들의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녀를 부르던 황제의 목소리는 너무나 두려웠다.

절대 그 모든 것을 알면서 황제에게 거울을 줬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드는 그 엄청난 분노.

하지만 황제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에 화가 날 겨를도 없었다.

‘그건 생명체가 가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어.’

하지만 눈앞의 자는 그걸 정면으로 받아놓고도 태연하게 하기로 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었다. 덕분에 안겔을 향한 분노는 금방 사그러들었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눈치를 못 챈 건가, 아니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안겔이 실력을 가늠하듯 왕자의 몸을 훑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녀님, 신관님의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안겔이 왕자를 쳐다봤다.

“가시죠.”

왕자는 별다른 인사도 건네지 않고 문을 열더니 사용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저 때문에 손이 더 갔네요.”

“아닙니다, 신관님.”

방금까지의 날카로우면서도 상대를 비웃는 것 같던 얼굴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제 그곳에는 쾌활한 얼굴을 젊은이가 있을 뿐이었다.

안겔이 부러 그 모습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왕자가 스스로를 소개하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솔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솔님. 이쪽으로.”

그러고 보니 황궁에서는 그를 솔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조금 전 대화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황제와 서호에게도 사내의 가명을 말하지 않은 것도 같았다.

안겔은 완전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

방을 안내받은 뒤, 사용인이 물러나자 루미너스의 얼굴에 어렸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로제타 보레알리스.’

루미너스는 오늘 처음 실물로 마주한 황제를 떠올렸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아름답다는 찬양은 꽤 유명했는데, 과연 소문처럼 황제는 매우 아름다운 자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시커먼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입맛을 다시는 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울을 사용한 이상 당연한 거지만.”

아버지만큼이나 이방인에게 집착하는 자. 동시에 아버지보다도 더 큰 권력과 힘을 가진 자.

이번에 황궁에서 있었던 국정 회의는 루미너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됐었다.

이아코스 왕국은 오랜 시간 제국의 귀족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정 회의에 참여했다던 귀족들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뭐, 그들도 그리 아는 것이 있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이방인을 향한 황제의 소유욕과 주변에 대한 경계는 모두가 입을 모아 전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 그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이서호.”

실제로 직접 본 이방인은 마법으로 본 것보다 더 생기가 가득했고, 멍청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첫 만남 당시, 어리벙벙하게 굴던 모습이 깊게 남아 있어서 그랬던지 오늘 당당하게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끝에 가서는 조금 태도가 변했었지만.

“…이서호.”

다시 한번 사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루미너스는 삑삑- 울리는 울음소리에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에 가까이 난 나뭇가지에 노란색의 카나리아가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들키려나?’

아마 그럴 것이다. 황제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국정 회의가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황궁으로 모여들던 귀족들 틈에 패밀리어 한 마리를 집어넣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지금도 황제는 말하는 카나리아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황궁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았으니 조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시간을 더 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밝히기도 했고, 서호라는 이방인이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지 않았던가.

‘정말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거울이 사용됐다는 걸 알아서, 거울을 살피기 위해 황궁에 패밀리어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사로잡는 생김새에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들은 이름이 어머니를 연상시켜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무리를 해서 신녀 안겔에게 접근했다.

‘본래 이런 방법으로 황궁에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신녀가 황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끝을 알면서 거울을 준 줄 몰랐지.’

신녀가 모호하게나마 끝을 알고 있다는 건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일이 더 귀찮아졌다.

자신은 황제와 안겔 사이의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서호라는 이방인이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자신도 마냥 모른 척 이방인을 지켜볼 수는 없게 됐다.

‘황제가 움직이기 전 처리해야겠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나리아를 바라보는 루미너스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

이아코스의 왕자인 루미너스를 만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늘, 서호는 로제타와 함께 편지를 작성 중이었다.

마지막 인사말을 마무리한 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한글로 써도 되겠어요?”

“그래, 그편이 안전하니까.”

편지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왕자는 필연적으로 편지를 건드릴 수밖에 없고,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편지를 훔쳐볼 수 있다는 로제타의 말은 서호도 동의하는 바였다.

거기에 더해 로제타는 왕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정말 편지를 전해주기는 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서호는 로제타의 주장대로 일단 한글로 편지를 작성했다.

“왕자가 이 글자를 알면요?”

“그럼 후궁이 정말 그대와 같은 나라 사람인 거지.”

“제 머릿속을 읽을 순 없었을 테니 아마 맞을 텐데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지구, 대한민국을 말한 이상 그 여인이 정말 같은 나라 사람인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스에게 그런 마법이 없다는 걸 확인까지 받았기에 더더욱 서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아?”

“그렇긴 하죠.”

로제타의 말처럼 마지막 의심을 지워내기 위해 시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한글을 사용하는 게 나쁘지 않았고.

서호가 마지막 온점을 찍는데 로제타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썼어?”

“그냥 가벼운 안부 인사예요.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앞으로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는 정도? 아, 내가 누군지도 썼어요.”

“그래?”

로제타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이기에 서호가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냥 지금 쓴 걸 그대로 다시 써줄게요.”

한글로 썼던 편지를 조금 느리긴 하지만 망설임 없이 제국어로 술술 바꿔 쓰자 로제타가 감탄했다.

“이제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군.”

일전에 안겔에게 편지를 썼던 때와 비교가 되긴 했다. 스스로가 봐도 확실히 는 실력에 기분이 좋아졌다. 서호가 방긋 웃었다.

“선생이 훌륭한가 봐요.”

“제자가 훌륭한 거지.”

서호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서호가 새로 써주는 편지를 살피며 대단하다 추켜세워 주던 로제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예전에 그대를 보다가 이런 글자를 본 적이 있다.”

로제타가 서호의 손에서 펜을 받아 가더니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이게 무슨 뜻이지?”

그가 써놓은 것을 내려다보던 서호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걸 여기서 볼 줄 몰랐는데.”

“응?”

서호가 우아한 필기체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해피 버스데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에요.”

로제타가 서호가 쓴 편지와 그가 쓴 글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대가 쓴 이것과는 글자가 다른 것 같은데.”

“제가 쓰는 이 글자랑은 다른 언어예요.”

“그래?”

로제타는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글자일 게 분명한데 획이 부드럽고 어색한 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글씨체에 감탄하던 서호가 물었다.

“그나저나 이런 걸 다 기억해 두고 있었어요?”

“그날 그대가 울기에.”

눈을 깜빡이던 서호가 멋쩍게 웃었다.

“아. 그런 것도 봤구나.”

“…왜 울었는지 물어도 되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음,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지금도 보고 싶은가?”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보고 싶죠.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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