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고작 편지나 주고받길 요구한 건 엄청난 손해지.’
분명 의심할 부분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정보를 주겠다는 말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쪽이 거울에 대한 정보가 간절하다는 게 너무 티가 날 테지만 안겔이 왕자를 황궁으로 데려온 시점에서 이미 그건 밝혀진 거나 다름없었다.
왕자가 말한, 그리고 앞으로 말할 정보가 전부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오늘 이야기도 전부 믿을 수는 없어. 하지만 아예 동떨어진 이야기도 아니었지.’
그 손이 서호를 데려가려던 것이라던 왕자의 말과 그 꿈을 꾸고 난 뒤 이방인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갔다던 이야기가 차례로 떠올랐다.
‘…신력이 있는 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제타는 이미 예전부터 서호에게 신력이 있는 한 그 꿈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걱정해야 하는 건 오로지 서호의 마음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안겔을 돌려보내고 난 뒤에는 그와 더 친근한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은 그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서호는 자신이 그의 옆에 있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둘은 많은 대화를 했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 대화 중에 꿈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꿈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어째서 서호는 단 한 번도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돌아가고 싶어서?’
아니, 아니었다. 서호는 분명 자신과 함께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건 아니었다.
‘서호가 나를 두고 갈 리가 없어.’
로제타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지워내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의심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아직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무슨 사이라고 해봐야 같은 방을 쓰는 친구 정도일 것이다.
고작 친구를 위해 세계를 바꾸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아직은 물을 자신도, 답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지금은 아니야….’
황급히 의심을 머릿속 깊은 곳으로 밀어버린 로제타는 급하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왕자의 제안은 여러모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왕자에게 거울에 대한 정보도 얻어야 했으며 서호가 곧 죽는다는 후궁을 신경 쓰는 것 같으니 한동안 왕자는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의심이 가는 부분은 따로 조사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일 년은 너무 길지. 적당히 핑계를 대서 밀어내야겠군.’
왕자가 효심을 무기로 이쪽에 눌러앉았으니, 이쪽도 그 효심을 이용하면 되는 일이다.
‘적당히 서호의 그리움만 달래면 돼.’
서호는 한 번도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만 혹시 몰랐다.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서호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만 머물게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후궁이 향수병을 가지고 있다니 길게 연을 가져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로제타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니 정말 신기하지 않냐고 종알거리는 서호를 바라봤다.
오늘 생각지도 못했던 서호의 모습을 봤다. 흔들리던 자신 대신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증거를 내놓으라고 이야기하다니.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호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곧 죽을 것 같다던 고향 사람을 내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될까요? 왕자님이 로제타와 동갑이니까.”
나이를 셈해 보던 서호가 손뼉을 쳤다.
“제 어머니 또래겠네요.”
로제타는 동의를 구하듯 그를 돌아보는 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겠네.”
“아, 어머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물어볼 걸 그랬나 봐요.”
편지를 쓰려면 호칭은 정해야 하지 않겠냐는 서호를 보며 로제타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같은 세계의 사람이 반가운가?”
“아무래도 그렇죠. 안겔에게 들어서 여러 세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많은 나라 중 딱 같은 세계 사람이라니.”
심장이 따끔거렸다. 혹여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의 행동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완벽히는 아니어도 조금이나마 서호의 생각을 알기는 해야 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서호가 설령 긍정을 한다 해도 보내줄 생각이 없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그럼에도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아 뒷말을 흐지부지 흘려버렸다. 로제타가 다시 제대로 질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서호가 손사래를 쳤다.
“딱히 직접 만나고 싶지는 않고요.”
“응?”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요.”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가 돌아오면 그를 설득하려 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설명해 주고 그를 겁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 너무 겁을 주면 이 세상을 무서워하고 다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까 봐, 그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면서 이곳에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를 강제했겠지.’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역시 너는 본래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어떻게든 더 빨리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생각대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조급해진 자신은 강제로라도 서호를 가졌을 테고.
하지만 서호는 이 조급함을 읽은 것처럼, 로제타가 그 자신도 모르게 상상했던 최악의 결말을 읽어낸 사람처럼 원하던 답을 들려줬다.
“비슷한 나이도 아니고 어머니 또래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같은 곳 사람이라고 해도 뭘 믿고 왕자를 따라가요?”
의심이 싹튼 순간부터 로제타는 거센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뭐…. 내가 로제타를 처음 보자마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걸 알면서도 손을 잡았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하겠지만 나 원래 사람들한테 쉽게 마음을 여는 편은 아닌걸요.”
하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순수한 이를 잡아먹으라고, 다른 이에게 뺏기기 전에, 그가 도망가기 전에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외치던 짐승의 목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로제타의 경우가 특별한 거예요.”
그리 말한 서호가 로제타에게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뻗어진 손이 로제타의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눈을 감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호의 다정한 얼굴을, 자신을 향한 애정이 가득한 얼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가 울고 있기도 했고 또 나를 보면서 너무 기뻐하니까. 누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천천히 로제타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서호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손을 안 잡을 수 있었겠어요?”
정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게 가능한 걸까?
그가 하는 말, 행동, 웃음, 다정함과 섬세함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지금 당장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벼운 말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알려주고 하루 내내 그를 향한 찬양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로제타가 한숨을 쉬듯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서호의 손이 떨어져 나가기 전 그 위를 커다란 손으로 덮었다.
‘그래, 참을 수 있어.’
그대가 나를 특별하다 해줬으니까. 내게 지금보다 활짝 마음을 열 때까지 참아야 했다.
나를 떠날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여, 그대를 만지고 싶다는 욕망에 휩쓸려 이 다정한 손길과 웃는 얼굴을 잃을 수는 없었다.
로제타는 눈을 감고 서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로제타?”
피곤하냐고 물어오는 그에게 옅게 웃어 주면서도 로제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 눈을 뜨면 예쁜 말을 하는 저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은…, 눈가에 키스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대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탐스러운 볼, 조그맣고 말랑거리는 귀, 희고 곧은 목, 살짝 말려 올라간 고운 입가, 통통한 입술까지. 차례로, 자연스럽게 그대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로제타는 입안 가득 고이는 침을 삼키며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
안겔이 그녀를 따라 들어오는 왕자를 돌아봤다.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게 마법이었군요?”
“그래.”
그녀보다 늦게 출발했으면서 황궁에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린 것 역시 마법 덕일 것이다.
마법사라니,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귀하다는 마법사를 자주 보는 편이긴 했지만 이아코스 2왕자가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섬이라 그런가? 정보가 너무 없어.’
그리고 그보다 더욱 안겔을 뒤흔들었던 건 후궁 그레이스와 서호의 출신지가 같다는 것이었다.
“출신지가 같을 수 있다는 걸 제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왕자가 무심하게 답했다.
“확신하지 못했고, 굳이 그대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마 후자의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안겔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걸 참아냈다.
“…그렇군요. 그럼 편지 말고 다른 목적을 알려줄 생각도 없으시군요.”
비꼬듯 던져진 안겔의 말에 왕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글쎄. 정말 어머니와의 편지를 위해 그를 찾아왔을 수도 있지.”
“하.”
이번에는 비웃음이 참아지지 않았다. 안겔이 비난하듯 왕자를 바라봤다.
“그 핑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러자 왕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방인은 믿는 모양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