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너무 딱딱 들어맞지 않나?’
만약 왕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호에게 꿈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한참 서호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다시 왕자에게 물었다.
“거울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남아 있는 건가?”
“네. 거울은 왕국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니까요.”
그건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정보가 급하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은 건지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그간 그 거울을 통해 몇 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넘어왔지?”
“어머니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입니다. 이쪽 거울을 통해 이동한 사람들과 같은 수죠.”
어쩌면 검증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다시 왕자를 바라봤다.
“기록을 가져왔나?”
“아버지께서는 기록을 직접 관리하십니다. 사실 이곳에 오는 걸 아버지께서는 그리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시거든요.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로든 특별한 존재가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왕자가 눈을 찡긋거렸다. 태도만큼이나 목소리 역시 가벼웠다. 서호가 관찰하듯 왕자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가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기록을 직접 보시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딱히 왕자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나를 위해 왕실의 기록을 빼내 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
자신들이 이아코스 왕실에 거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왕자가 자발적으로 제국으로 와 거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지금 상황이 오히려 더 이상한 거였다.
‘무슨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의심을 가득 담고 왕자를 바라보던 서호는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얼떨결에 질문을 던졌다.
정말 궁금하다기보다는 갑자기 눈이 마주쳐서 저도 모르게 뭐라도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그, 어머니께서 어느 곳 사람인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지구라는 곳의 대한민국에서 오셨습니다.”
“…네?”
서호가 그의 귀를 의심하는데 왕자가 다시 답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오셨어요.”
서호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왕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곳에 와서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어. 지구라는 말도 꺼낸 적 없다고.’
로제타에게도 꺼낸 적이 없던 단어가 낯선 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정말 저 남자의 어머니는 서호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인 것이다.
“서호?”
서호가 갑자기 숨을 멈추자 로제타가 서호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서호가 그 팔에 기대듯 몸에 힘을 풀며 말했다.
“로제타…, 같은 나라 사람이에요.”
“뭐?”
로제타의 얼굴에 충격 어린 빛이 서렸다. 그리고 맞은편에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작대로군요. 서호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머니와 같은 곳에서 오신 분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네?”
왕자의 얼굴에는 숨기지 않은 기쁨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이름과 비슷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정말로 어머니께서 대한민국에서 오신 게 맞다고요?”
“네, 정확히 25년 전에 저희 왕국에 나타나셨죠.”
혼란스러움에 서호가 멍하니 왕자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로제타가 깍지를 껴왔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단단한 손가락에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봤다. 조금 전 로제타를 붙잡아주던 자신처럼 이번에는 로제타가 자신을 붙들어주고 있었다.
불순물 하나 없는 푸른 눈을 마주하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후, 숨을 내쉰 서호가 그 손을 단단히 맞잡자 로제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서호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온 건가? 서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내 사람들과 안겔밖에 없는데.”
그 질문에 서호 역시 의문이 차올랐다. 지구나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는 그레이스라는 후궁이 정말 이방인이라면 자연스레 아는 말이겠지만 서호의 이름은 달랐다.
로제타에게 거울을 통해 나타난 운명이 있다는 게 귀족들에게 알려지면서 자연스레 서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서호의 이름은 신전에 도착한 뒤 안겔에게 들은 거라면 어째서 신전을 찾아간 거지? 그저 거울을 통해 이동해 왔다는 사람이 궁금해서?”
그 물음에 왕자가 처음으로 답을 망설였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또 다른 거울이 신전에 있다는 것을 아버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그걸 통해 오셨으니 관심이 많으셨죠. 그래서 그 거울이 황궁으로 들어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황궁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정확히는 거울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왕자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는 매우 편찮으십니다.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하고 계세요. 향수병도 좀 있으십니다. 그래서 혹시 같은 이방인을 만나시면 기운을 차리실까 하여 이리 염치 불고하고 제국을 찾아왔습니다.”
아리스를 통해 후궁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거기다가 향수병까지 있다니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왕자의 말에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내 이름을 아는 이유도 꺼림칙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거동도 하지 못한다는 몸이 아픈 그의 어머니를 만나려면 서호가 이아코스 왕국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말에 스멀스멀 차오르던 친밀감 위로 의심이 들이닥쳤다.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해.’
안겔이 데려온 이라서 편견 섞인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제국을 떠나 그와 함께 왕국으로 가자는 말을 듣는 순간 저의가 의심되는 것이다.
‘모든 의문이나 문제가 딱딱 해결되는 것도 이상하고.’
하지만 서호가 뭐라 말을 하기 전 로제타가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빠르게 거절을 표했다.
“절대 안 될 말이야.”
서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아무런 뜻 없이 정말 자기 어머니가 걱정되는 것이라고 해도 서호가 왕자를 따라갈 일은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어딜 믿고?’
로제타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그와는 벽에 나타난 눈의 형태로나마 꽤 오랜 시간 마주했던 사이였으며 자신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눈물을 펑펑 흘리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를 이곳에 데려온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고.’
그때 왕자가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염치없이 만나 달라 부탁드리려 온 건 아닙니다. 저는 서호님께서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편지요?”
“네, 어의가 향수병이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진단을 내려서요. 부탁드립니다.”
순간 왕자가 어떤 말을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마음이 흔들렸다. 편지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거울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적당히 친분을 유지하면 좋을 것 같은데.’
로제타가 문제를 제기했다.
“왕국과 제국의 거리는 상당해. 편지를 주고받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
“제가 마법사입니다. 어머니께 바로 편지를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듯 돌아온 답에 서호가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로제타는 서호와 달리 큰 반응 없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쪽 마법사가 편지를 전하는 건?”
“…아버님께서 어머니의 위치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아무래도 많이 편찮으시니까요.”
왕자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담될 일이라는 걸 알지만 부디 좋은 쪽으로 재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간절해 보이는 그 모습에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봤다.
***
로제타는 처음 이아코스 왕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로제타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안겔의 뒤에 있던 이가 왕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정체를 숨기고 음흉하게 황실에 숨어들다니.’
더군다나 서호가 그의 어미와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말에 왕자의 눈에 감돌던 서호를 향한 호감.
‘감히.’
그리 크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정확히 무슨 목적을 가지고 황궁에 찾아왔는지도 모르는 왕자가 서호에게 호감을 품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서호가 후궁과 편지를 주고받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서호가 제국을 떠나는 건 일신의 위험을 핑계로 막을 수 있지만 제국에서, 그것도 황실에서 편지만 주고받는 것까지 막아버린다면 서호가 자신에게 질릴지도 몰랐다.
‘또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면….’
로제타는 어쩔 수 없이 왕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왕자가 마지막에 덧붙인 후궁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서호가 다시 한번 흔들렸기 때문이다.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건 들었지만.’
편지는 길어야 일 년 정도 이어질 거라고 했던가?
‘일부러 거절할 수 없게 이야기를 꺼낸 거겠지.’
하지만 동시에 꽤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다. 로제타는 펜팔을 제안하며 왕자가 내건 조건을 떠올렸다.
‘어머니와 편지로나마 친구가 되어 주신다면 거울에 대한 기록을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건네드리겠습니다.’
아직 왕자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국의 왕자가 단순히 편지를 부탁하기 위해서 신분을 숨기고 제국 황실에 숨어들다니?
‘분명 거울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 텐데.’
다른 세계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올 정도의 간절함과 짙은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왕자는 자신에게 왕국에 이득이 갈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