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61화 (61/155)

#61

안겔의 부름에 왕자가 로제타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위대하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루미너스 이아코스입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 인사를 받아주지도 그를 향해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서호와 달리 갑작스러운 왕자의 등장에 전혀 놀라지 않은 모양새였다.

“왕자가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는데.”

그리고 안겔은 왕자를 무시하는 로제타의 태도가 기꺼웠다. 안겔을 멋대로 휘두르려던 왕자도 로제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일관적인 사람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안겔은 메마른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답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바를 수행하기 위해서 저분이 필요했습니다.”

“왕자가 필요했다고?”

“왕자님께서 거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신전에 있던 거울인데 어째서 이아코스 왕국의 왕자가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당연한 의문이었다. 안겔이 로제타와 서호에게 알려줬던 과거의 기록 중에 이아코스 왕실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기에 더더욱.

안겔이 돌아올 비난을 예상하며 입술을 달싹이는데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그 거울과 관련된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뭐?”

로제타가 휙 고개를 돌려 왕자를 돌아봤다. 서호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안겔은 부러 말을 헷갈리게 하는 왕자를 째려보듯 바라보며 끼어들었다.

“서호님과 폐하와 똑같은 경우는 아닙니다. 이분께서는 거울을 통해 이곳으로 온 이방인의 자식이세요.”

안겔의 말이 끝나자 왕자가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어머니께서 이방인이십니다.”

태연한 왕자의 말 뒤로 긴 침묵이 흘렀다.

***

이방인, 자신처럼 거울을 통해 이 세계로 온 이의 자식이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는 사이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국에 거울이 있다는 것은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 바, 부득이하게 신분을 숨기고 황실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점 사죄드립니다.”

서호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제가 알기로 과거에 이아코스에 이방인이 나타난 사례는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기록을 숨기셨습니다. 그리고 서호님께서 이용하신 거울과는 다른 거울을 이용하셨고요.”

다른 거울이라니. 서호가 질문을 하기 전 로제타가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서호는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돌아봤다. 조금 전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던 로제타의 눈매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그만큼 왕자가 가져온 이야기는 로제타나 서호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답.

“거울이 두 개라는 소립니다.”

“신녀.”

그 짧은 부름에도 로제타의 들끓는 감정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안겔이 변명을 하지 않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 답과 함께 서호는 모습을 드러내는 신력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일렁이는 신력에 서호가 다독이듯 로제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로제타.”

서호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로제타가 여유를 잃으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다.

서호는 로제타의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일률적인 박자로 그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의 신력이 갈무리될 때쯤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로제타의 손보다 작은 손이긴 하지만 그래도 주먹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을 덮어줄 정도는 됐다.

서호는 작게 숨을 고르는 로제타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우선 이야기를 마저 들을까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오히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거울은 서호와 로제타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물건이었으니까.

“거울이 있다는 왕자님의 말을 저희가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네요.”

이아코스의 왕국에 거울이 있다고 가정하면 왕자가 신전도 모르던 거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서호는 모범적인 학생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내려놓은 지 좀 된 가면이긴 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호감을 사기 쉬운 인상이니까.’

주변에서는 그런 서호를 보고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단정하고 참한 인상을 가졌다고 이야기했었고 서호는 그런 스스로의 특성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그리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엷지도 않게 웃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질문을 몇 가지 더 해도 될까요?”

“질문이요.”

“네. 왕자님의 어머니에 대한 걸 묻고 싶은데…, 불편하실까요?”

제일 먼저 알아봐야 할 건 당연히 왕자의 어머니가 정말 이방인이 맞냐는 것이었다. 서호의 물음에 왕자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질문이라면요.”

서호는 아까부터 볼에 와 닿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평소보다 눈이 살짝 커진 로제타가 눈을 맞춰왔다.

서호가 그를 향해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며 왕자를 눈짓했다. 질문은 로제타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로제타가 주먹 쥐고 있던 손을 돌려 서호의 손을 맞잡으며 아까보다 침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의 어머니, 그레이스 이아코스는 아직도 왕국에 머물고 있나?”

이미 사라진 한기가 다시 발목을 감싸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호는 작게 발을 털어내며 로제타와 왕자의 대화에 집중했다.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궁에 머물고 계십니다.”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제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셨죠. 하지만 저를 낳고 나서는 점점 꿈을 꾸는 빈도가 줄어드셨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예 꾸지 않고 계시고요.”

왕자는 서호가 꾼 꿈을 알고 있었다.

‘안겔이 가르쳐준 건가?’

로제타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왕자를 황궁에 들인 안겔이었다. 그러니 안겔이 왕자에게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렸다고 여기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겔은 자신들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왕자라고 했다. 서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로제타와 왕자의 대화는 계속됐다.

“지금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아니, 꿈과 내 처음 질문이 관계가 있나?”

로제타의 물음에 왕자가 서호를 돌아보더니 답했다.

“꿈과 거울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죠. 짐작은 하셨겠지만 그 손은 이곳의 것이 아닙니다.”

“이곳의 것이 아니다?”

서호를 붙잡은 로제타의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호는 그 손을 털어내지 않았다.

“그리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왕국의 기록에 따르면 손이 나오는 꿈을 자주 꾸고 난 뒤 이방인들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곤 했으니까요.”

“…본래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이번에는 로제타만이 아닌 서호도 놀랐다. 사실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도, 따로 깊게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마 로제타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러니 첫 질문으로 그레이스 이아코스가 아직 왕국에 있냐고 물었을 테고.

꿈의 내용은 평범하지 않았다.

[남겠느냐.]

그 중후하던 물음. 그리고 억지로 자신을 잡아끌던 하얀 손. 로제타의 신력이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사실 때문에 꿈과 그 내용에 대한 심각성을 부러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 겔.”

로제타의 목소리는 흔들림을 듬뿍 담은 채 뚝뚝 끊어졌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찍어누를 것 같은 시커먼 목소리가 응접실을 맴돌았다. 그와 함께 잔잔하던 로제타의 기운이 다시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분명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꿈이 의미하던 바를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감정이 흔들렸다.

서호가 착잡함을 뒤로하고 황급히 로제타를 달래려는데 왕자는 이 심각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태연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들도 있죠. 어머니처럼요.”

하지만 그런 왕자의 태도는 매우 도움이 됐다. 서호는 여전히 꿀렁거리기는 하지만 확연하게 얌전해진 로제타의 기운을 느끼며 왕자를 돌아봤다. 로제타와 서호의 시선을 마주한 왕자가 생긋 웃었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꿈을 꾸지 않으십니다. 이곳에 온 지 25년이 되셨고요. 저희 쪽에서는 저라는 존재가 생기면서 어머니께서 이쪽 세상에 묶였다고 받아들이고 있긴 합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꿈이 줄어들었다고 하셨으니까요.”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거군. 짐작일 뿐이지 않나?”

여전히 거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서호는 왕자의 옆에 앉아 있는 안겔의 창백한 얼굴을 못 본 척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네. 하지만 그 외에도 한 분 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신 분에 대한 기록이 있긴 합니다.”

“누구지?”

“기록상으로는 저희 쪽 거울을 통해 처음 이곳에 온 이방인입니다. 여자분인데, 유일하게 마법을 배우신 분이죠.”

“마법?”

“네, 그래서 저희는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어떤 식으로든 이 세계의 것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제타와 서호의 눈이 부딪쳤다. 신력. 신력을 받아들이고 손을 떨쳐낼 수 있었던 자신.

풍랑이 멈추고 쿵쿵 뛰던 심장이 잔잔해지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의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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