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60화 (60/155)

#60

“그 수행원들을 이용해 위치를 교란할 거야. 수행원들은 그대가 보낼 신관들과 함께 전부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확실히 왕자가 황실에 있다고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일국의 왕자가 수행원도 없이 돌아다니다니. 자국도 아닌 타국인 이곳에서?

“…아무리 황실이라지만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내 한 몸 지킬 힘은 있어.”

안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신전을 떠나야 하는데 왕자와 말싸움을 할 시간은 없었다.

‘무슨 수가 있겠지.’

여태껏 왕자가 숨기는 또 다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그를 대했지만 왕자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안겔이 자리를 정리하며 이야기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정대로 황궁 앞에서 만나면 될까요?”

“그래. 시간에 맞춰 가도록 하지.”

안겔은 왕자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왕국으로 떠날 고위 신관들을 찾아가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겔의 부탁을 받아 왕국으로 떠나기로 한 이들은 신녀인 안겔을 존경하는 이들로, 제대로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저들이 뭐라도 알아내길 바라는 수밖에.’

마차에 올라탄 안겔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어젯밤 돌아온 로제타는 딱히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로제타가 정말로 은장도에 줄을 달아 펜던트처럼 만들어왔고 그걸 자신의 목에 걸어준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도 없었다.

조금 딱딱하게 로제타를 대하던 서호 역시 로제타가 평소처럼 행동하고 몇 번 웃음을 지어주자 금방 어색함이 사라졌다.

‘나, 좀 단순한가?’

그리고 지금, 한숨 잘 자고 일어나자 서호는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힐끗 로제타를 돌아봤던 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맞춰오는 그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서호, 왜?”

전날 당신이 한 키스가 정말 아무 뜻도 없었다는 걸 되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서호가 평소와 달리 머리를 넘겨 이마를 깐 로제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적당히 답했다.

“머리를 넘기니까 다른 사람 같아서요.”

로제타가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별론가?”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사용인을 다시 불러 머리카락을 흩트릴 모양새였다. 로제타의 뒤에 서 있던 푸티의 얼굴이 흐려지자 서호가 재빨리 답했다.

“아니요, 잘생겼어요.”

실제로 머리를 깐 로제타는 잘생겼다. 평소보다 더 깔끔하고 냉정해 보이는데 그게 잘 어울렸다.

서호의 말에 로제타와 함께 푸티가 크게 안도했다.

“그대도 아름답다.”

그리고 흘러나온 로제타의 말에 서호가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서호는 굳이 로제타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이랑 같은 패턴이 될 테고.’

서호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나도 꾸미긴 했으니까.’

하얀색의 흘러내릴 듯 부드러운 셔츠와 단정한 검은 바지는 얼핏 보면 평범해 보였지만 천이 고급스러운 건지 전체적인 태가 달랐다.

‘옷을 안 입은 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지만 평소보다 키가 더 커 보이는 것도 같았다. 거기다가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고, 옅게나마 화장까지 하니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였다.

“저는 조금 어색해요.”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야. 이렇게 모처럼 꾸민 김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좋겠지.”

“초상화요?”

로제타가 푸티가 다듬어줘 깔끔하게 드러난 서호의 목덜미를 간질이듯 매만졌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에 서호가 흠칫 떨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로제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이 모습을 그대로 남길 수 있을 만한 화가를 찾아볼까?”

사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에 서호는 바짝 치켜올렸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본래 스킨십이 많은 이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서호는 여전히 그의 목 뒤를 매만지는 로제타의 손을 무시하려 애쓰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초상화는 그리는 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지 않나?’

딱히 그려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평소보다 꾸민 이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서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음, 마법으로 남기는 방법이 있지는 않나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있나?”

로제타의 물음에 푸티가 답했다.

“아리스님에게 여쭤보겠습니다.”

“괜찮은 화가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 푸티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지금쯤 안겔님께서 응접실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안겔이 도착했을 거라는 말에 로제타가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 준비됐어?”

“후우, 네.”

사실 오늘 서호가 이렇게 단장을 한 이유가 로제타와 함께 안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호의 한숨 소리에 로제타가 걱정스레 물었다.

“서호, 긴장돼?”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그래도 로제타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문제가 생기면 로제타가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함께 안겔을 만나는 게 어떻겠냐는 로제타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거울에 대한 이야기는 궁금하고.’

자신과 관련된 일이니 가감 없는 정보를 알고 싶었다.

“…….”

긴장을 풀기 위해 크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서호가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로제타를 올려다봤다.

“로제타?”

서호의 부름에 로제타가 미소 지었다.

“응.”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호가 그걸 발견하기 전 푸티가 그런 로제타를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크흠, 이제 가실까요?”

“그래. 서호?”

서호가 팔짱을 끼라는 듯 손을 내미는 로제타의 손을 슬쩍 밀어내며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아무리 로제타가 스킨십을 좋아한다지만 팔짱을 끼는 건 좀 그랬다.

‘혹시 실망하는 건….’

슬쩍 로제타의 눈치를 보는데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리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안심한 서호가 그런 로제타와 발을 맞춰 이동했다.

같은 궁 내에 있었기에 응접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로제타는 사용인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걸 손을 들어 말린 뒤, 괜찮겠냐는 듯 서호를 돌아봤다. 서호가 고맙다고 입술을 달싹였다.

로제타의 손이 불쑥 위로 올라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손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데 로제타가 고개를 돌리며 사용인에게 눈짓했다.

사용인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면서 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서호님께서 오셨습니다!”

곧이어 활짝 열리는 문 너머의 은발을 발견한 서호는 잠시 의아함을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

응접실에서 로제타를 기다리던 안겔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왕자를 의식하며 자세를 더욱 꼿꼿이 했다.

약속대로 황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만난 왕자는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신관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안겔과 함께 황궁으로 들어와 응접실에 자리한 지금은 천연덕스럽게 안겔의 시중을 들었고.

‘황궁의 사용인들까지 속일 생각이겠지.’

안겔이 빈 그녀의 잔을 채워주는 왕자의 손을 꺼림칙하게 바라보는데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와 서호님께서 오셨습니다!”

안겔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호와 함께 오다니?’

사용인이 무언가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건 잠시였다. 정말로 서호가 로제타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선 것이다.

화려한 외모를 가진 황제보다 더 시선이 가는 사람, 그들과 다른 생김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호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멍하니 서호를 바라보던 안겔은 로제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 축복이 가득하시길. 그리고 서호님.”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로제타의 무심한 눈이 안겔의 뒤에 서 있는 왕자에게로 향했다.

말없이 왕자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서호에게 소파를 손짓했다.

“우선 자리에 앉지. 서호?”

“아, 네.”

서호와 로제타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안겔이 그에 맞춰 자리에 앉자 로제타가 곧장 입을 열었다.

“웬일로 사람을 데리고 왔군.”

그간 안겔은 황실에 올 때 다른 신관을 데려온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지적이었다.

신전 내부에서야 일반 신관이 고위 신관들의 시중을 드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일단 신전은 대외적으로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안겔은 왕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 로제타와 서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 사용인을 향해 눈짓했다.

“말을 길게 늘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죠? 폐하. 사람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말없이 안겔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이내 손을 들어 사용인을 모두 내보냈다.

“자, 그래서 내가 명령한 건?”

명령이라는 말이 굉장히 거슬렸으나 안겔은 웃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뒤에 있는 왕자를 쳐다봤다.

“그 전에 소개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왕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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