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서호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서호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푸티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서호님? 깨어나신 게 아니…, 세상에! 서호님, 열이 나시나요?”
푸티가 얼굴이 붉어졌다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서호는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그게 도대체 뭐야?’
아프신 거냐며 호들갑을 떠는 푸티의 목소리가 멀리서 흩어졌다. 정말 미안하지만 조금 전 일어난 일 때문에 푸티의 목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래도 스킨십이 많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정말 뭐지?’
혼란스러워하면 할수록 점점 더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더 빨개지셨….”
푸티의 말에 서호가 저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당겨 그 속에 얼굴을 숨겼다. 정말, 정말 너무 부끄러웠다.
***
수업이 전부 끝나고 아리스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레 물었다.
“서호님, 정말 폐하께 말씀을 드린 겁니까?”
폐하, 로제타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온 순간 서호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네?”
서호의 커다란 움직임에 책상이 흔들리자 아리스가 흔들리는 잔을 붙잡았다.
“서호님, 괜찮으십니까?”
서호가 책상에 부딪혀 아픈 무릎을 살짝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눈가에 와닿던 그 촉감이 떠올랐기에 서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 뭐라고요?”
아리스가 걱정스레 서호의 다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폐하께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드리셨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농담을 했던 것도 같았다.
“아, 그건 아닌데. 오늘 바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한번 다가오는 입술을 떠올리는데, 아리스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내일이라고 했던가요? 신녀님이 오는 게.”
“네, 맞아요.”
“걱정되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걱정이 됐었다. 로제타는 갑작스러운 안겔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적의 속셈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그 끝에 자신이 위험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했었지만.
그런 로제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안겔이 돌아온다니까 다시 그 꿈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글자 공부를 하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거기에 더해 신력을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식적으로 그날의 기억을 지우려 노력했다. 안겔이 무언가를 알려줄 테니 그녀가 연락하기 전까지는 모른 척해도 될 거라고.
하지만 도피는 정말 잠깐이었다. 안겔의 소식이 들려옴과 함께 그날의 소름 돋던 차가운 감촉이 발목 어귀를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제타의 돌발 행동 때문인지, 솔직히 오늘은 그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서호가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데 푸티가 끼어들었다.
“오늘 영,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아침에는 열도 나시는 것 같았고.”
“그렇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두 사람의 눈빛에 서호가 손사래를 쳤다.
“아팠던 건 아니고…, 방 안에 온도가 좀 높았었나 봐요.”
다시 한번 똑같은 상황이 머릿속에 재생되기 전 서호가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그래서 아리스, 오늘은 뭘 가르쳐줄 거예요?”
요 며칠 아리스는 계속해서 이아코스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로제타가 안겔이 그날 이후로도 종종 신전에서 이아코스 왕자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고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가 아는 건 다 이야기해드렸는데요. 굳이 그 이상 더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푸티는 왕국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
“딱히요, 왕국은 특이한 풍습이 있지도 않고. 문화도 저희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푸티를 돌아봤던 서호가 문화라는 말에 눈이 번쩍였다. 그래, 문화. 여기는 따지자면 해외였다.
키스 정도야 그냥 친한 사이면 우습게 하는 것 아닐까?
‘입술도 아니었잖아.’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하는 나라는 지구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볼인데, 눈가에 입을 맞추는 것도 인사인가?’
볼이랑 눈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았다.
‘아닌가?’
서호가 힐끗 아리스와 푸티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서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묻지 말까?’
하지만 만약 정말 별 뜻도 아닌데 혼자 오해하고 로제타를 어색하게 여기면 그가 상처를 받을지도 몰랐다.
‘그래, 모르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니까.’
서호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아리스.”
“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서호가 친절하게 웃는 아리스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조금 전 이야기랑은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여기는 인사로 눈에 키스를 하나요?”
“…네?”
여전히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굳어 보이는 그 표정에 서호가 불안하게 되물었다.
“…아니에요?”
서호가 아리스를 빤히 바라보는데 옆에서 푸티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아하하, 서호님!”
큰 웃음소리에 놀란 서호가 푸티를 돌아보자 푸티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그럼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서호가 눈을 빛냈다.
“아, 그래요?”
푸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친한 사이면 입을 맞추는 것 정도야 우습죠.”
거짓 하나 없어 보이는 순수한 얼굴에 서호가 안도했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아마 안도가 맞을 것이다. 꽉 막혀 있던 것 같은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리는 느낌.
그리고 동시에 또 조금 이상한….
‘이상한? 뭐가?’
스스로도 모를 이 이상한 느낌이 뭘까 고민하는데 아리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푸티를 불렀다.
“푸티?”
그러자 푸티가 입꼬리를 귀에 닿을 듯 끌어올리며 친절하게 제안했다.
“차를 더 드릴까요, 아리스?”
서호와 푸티를 번갈아 바라보던 아리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찻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푸티가 아리스의 잔에 차를 가득 따라주며 서호의 빈 찻잔을 돌아봤다.
“하하하, 서호님도 더 드세요.”
감정을 정의해 보려 노력하던 서호가 머릿속을 비우며 잔을 들어 올렸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꼭 지금 정의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테니까. 아리스와 푸티의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했고.
“…고마워요.”
푸티가 차를 졸졸 따라주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다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오해할 뻔했네요. 고마워요, 푸티.”
그러자 옆에서 아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한 건지 아닌 건지.”
“네?”
서호가 그를 돌아보자 아리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새로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특별히 더 배울 것이 없으니 복습이나 하죠.”
“네, 그래요.”
“시험까지는 좀 그렇고 그냥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세요.”
서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음, 다른 거예요?”
서호의 지적에 아리스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느낌이 다르죠.”
하긴 점수를 매기는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질문이 시작되자 푸티가 빈 주전자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크흠,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리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던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푸티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푸티의 입에서 서호에게는 들리지 않는 한숨이 튀어나왔다. 오늘 아침 서호의 얼굴이 왜 빨개졌는지 대충 짐작한 푸티가 입을 쭉 내밀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야?”
속으로 참을성 없는 로제타를 욕하는 것도 잠시, 푸티는 불안하게 흔들리던 서호의 눈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내가 잘 둘러댔으니 망정이지.”
역시 로제타가 아무리 능력이 없다고 푸티를 비난해도 푸티는 정말 훌륭한 시종이었다.
푸티가 뿌듯하게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훌륭해!”
***
안겔은 신전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왕자와 마주했다.
계속되는 왕자와의 만남을 윗선이 유심히 살펴보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아픈 가족을 가진 이가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신녀인 안겔을 찾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핑곗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안겔은 계속되는 왕자의 고집에 미간을 좁혔다. 최근 잠을 줄이면서 생각을 거듭한지라 눈이 너무 건조했다.
안겔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물었다.
“정말 신분을 감추실 건가요?”
“황제나 이방인에게는 정체를 밝히겠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정체를 숨길 거네. 왕국에 거울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신전이 꽤 시끄러워질 테니.”
왕자의 말대로 신의 유산이라는 거울이 왕국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신전에서는 물건을 회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왕자가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수행원들을 이렇게 데리고 다니시면 다들 금방 왕자님의 정체를 눈치챌 텐데요.”
지금도 방 밖에는 왕자의 수행원들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안겔의 지적에도 왕자는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