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8화 (58/155)

#58

푸티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놀렸다.

위대하신 대 보레알리스 제국의 황제 로제타는 천하에 다시없는 변태가 분명했다.

‘도대체 그 모습 어디에 흥분할 곳이 있다고!’

순하고 성실한, 그러면서도 다정한 서호가 안타까웠다. 로제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주시다니.

‘서호님이 웃으실 때마다 그러시는 거 아니야?’

꽤 합리적인 의심이 아닌가.

거칠게 콧김을 내뿜던 푸티가 이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래도 서호님을 제일 걱정하는 건 또 폐하이시니.’

안겔의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는 로제타를 떠올린 푸티가 손을 들어 올려 양 볼을 짝 내리쳤다.

‘그래, 이리 불경한 생각을 하면 안 돼.’

서호에게 말하는 카나리아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로제타는 이번에 황궁을 찾아왔던 귀족들, 정확히는 제국의 귀족 모두를 조사하라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덕분에 황제의 비밀 호위이자 정보원인 그림자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분들은 안타깝지만.’

로제타는 서호의 안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쁜 생각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았다.

굳게 마음을 다진 푸티가 익숙한 방 앞에 멈춰 서서는 문을 두드렸다.

“서호님, 푸티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호가 푸티를 반겼다.

“푸티 왔어요?”

“네, 서호님. 수업은 다 끝나셨습니까?”

“막 보충 수업이 끝난 참이에요. 이아코스 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책상에 이아코스 왕국에 대한 자잘한 정보가 잔뜩 적힌 종이가 보였다. 집무실을 떠나기 전 로제타에게 아리스에 관한 사항을 들었다.

아리스가 평소처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푸티가 왔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수고했어요.”

서호에게 인사를 건넨 아리스가 푸티를 불렀다.

“푸티? 잠시.”

질문을 해올 거라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푸티가 서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리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방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아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물었다.

“폐하께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

“네.”

“이리 될 거라고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짐작하고 계셨다고요?”

푸티의 물음에 아리스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말했다.

“뻔하지. 서호님의 존재를 알고 있고 비밀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나를 쳐내거나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서호님이 나를 친밀하게 대하시니.”

하긴 푸티가 아리스를 서호의 스승으로 들이밀었을 때부터 이건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푸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지금 아리스의 자리는 꿈꾸던 자리고 원하던 자리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자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리스가 놀란 듯 푸티를 바라봤다.

“왜 놀라세요?”

“너라면 좋은 기회니 잘해 보라고 이야기할 줄 알았거든. 너는 네 자리에 자부심이 크니까.”

“자부심이 크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이 되는 자리라는 것도 아니까요.”

로제타를 근거리에서 모시다 보면 여러모로 다른 이들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아리스는 딱히 출세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리스가 말없이 눈만 끔뻑이며 푸티를 바라봤다. 그 멍해 보이는 얼굴에 푸티가 그를 불렀다.

“아리스?”

아리스가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것 같아. 나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하고. 그래서 말인데, 폐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네게 물어보라고 하시던데.”

다행이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로제타가 이미 그를 받아들인 이상 아리스가 그 자리를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

푸티가 아리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볍게 답했다.

“뭐, 크게 달라질 건 없어요. 딱히 직급이 변하신 건 아니니까요. 지금 당장 뭔가 일을 맡기시지도 않았고요.”

“그래?”

처음과 달리 많이 밝아진 아리스의 표정에 안도한 푸티가 조용한 복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다시 한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푸티가 이대로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아리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뭐, 오늘처럼 그냥 못 본 척하고 모른 척하는 것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푸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리스가 푸티에게로 불쑥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말했다.

“오늘 좀 흉한 걸 봤잖아?”

푸티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푸티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흉하다니요!”

아리스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야?”

아니, 물론 푸티도 그 모습에 질색하고 홀로 욕을 좀 하긴 했지만….

필사적으로 생각을 부정하려던 푸티는 이제 아리스가 푸티와 같은 로제타의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조금 경계를 풀었다.

“그, 그래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아리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푸티에 그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알았어.”

아리스가 그의 팔뚝을 내리치며 조용히 하라고 외쳤다. 이 정도로 큰 소리라면 서호나 다른 이들이 이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푸티의 닦달에 아리스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이제 같은 편이니까 편하게 아리스라고 불러.”

“…그럴까요?”

“그래, 말도 놓아도 돼.”

잠시 망설이던 푸티가 그 손을 붙잡으며 답했다.

“그건…, 차차 할게요.”

“그래.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푸티가 되물었다.

“네?”

“아니야, 나는 이만 가 볼게. 수고해.”

별것 아니었다며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보며 푸티가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긴 한데,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앞으로도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없는 폐하의 최측근이지 않은가.

‘친하게 지내면 좋지 뭐.’

마음을 편하게 먹은 푸티가 서호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

커다란 빛무리가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따뜻한 햇볕이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것 같기도 했고 뜨끈한 물속에 몸을 전부 담그고 있는 것도 같았다.

몸 전체를 감싸는 무언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그 손길과 온기가 싫지 않았지만, 슬슬 열이 올랐다.

‘더워.’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는데 서호가 움직이기도 전 몸을 덮던 것이 사라졌다.

자기가 먼저 자리를 피하려 했으면서 막상 온기가 사라지니 서운해졌다. 서호가 미간을 좁히며 더듬더듬 다시 손을 뻗는데 아까보다는 못하지만 따뜻한 무언가가 몸을 전부 덮었다.

한껏 만족한 서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그 속에 몸을 묻었다.

정말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서호가 더욱 깊은 잠에 빠지려던 그때.

“…서호. 서호?”

익숙한 목소리가 서호를 깨웠다. 전날 요 며칠 배운 이아코스 왕국에 대해 배운 것을 되짚어 보느라 늦게 잔 탓인지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포근한 이불에 푹 감싸여 있던 서호가 투정을 부리듯 웅얼거렸다.

“으음.”

그러자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는 웃음소리가 귀를 채웠다. 목을 울리며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

서호의 입꼬리가 소리를 따라 삐죽 올라가자 따듯한 손이 그 입가를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이내 서호의 얼굴을 전부 감쌌다. 서호의 얼굴보다 커다란 양손이 얼굴을 감싸자 얼굴이 뜨끈뜨끈해졌다.

따뜻한 온기에 다시 잠들 것만 같았지만 떡을 주무르듯 조물조물 얼굴을 매만지는 손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슬쩍 뜬 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둥글게 휘어진 푸른빛과 눈이 마주쳤다.

“…로제타.”

잠긴 목소리에 눈을 찌푸리는데 로제타가 키득거리며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응할 새도 없이 눈가에 쪽,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잠기운이 날아갔다. 서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로제타가 다시 한번 눈가에 입을 맞췄다.

“로제타?”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서호의 부름에 로제타가 고개를 뒤로 물리며 서호와 눈을 맞추더니 여상하게 되물었다.

“왜?”

왜냐니 방금 눈에 입을 맞추지 않았나.

“방금….”

“응?”

하지만 로제타의 얼굴은 정말 너무나도 태연해 보였다. 조금 전의 일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얼굴에 혹시 방금 눈을 뜨고 꿈을 꾼 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하나 눈을 껌뻑이는데 로제타가 아쉽다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서호, 오늘은 저녁 늦게나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

서호가 어색하게 되물었다.

“…바빠요?”

“조금, 그래도 잠들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그래요,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서호는 아직도 로제타가 그의 두 볼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호가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손을 올리는데 로제타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조금 전 입을 맞춘 곳에 다시 입술을 댔다.

시야를 가리는 로제타의 얼굴과 금발. 그리고 작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다녀올게.”

얼굴을 감싸던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몸 전체가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데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훌쩍 멀어지는 로제타가 방을 나서기 전 서호를 돌아보며 생긋 웃더니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통 터치를 하듯 푸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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