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7화 (57/155)

#57

왕자는 거울 소유자가 아니라면, 거울을 오랜 시간 지켜본 것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록을 훔쳐 읽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굳이 거울이 하나 더 있다는 거짓말까지 만들어낼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거울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만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왕자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잔뜩 날이 선 태도에도 왕자는 여상하게 답했다.

‘마찬가지야. 내가 궁을 떠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네. 그러니 만나게 도와주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야.’

안겔은 쉽게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왕자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하지는 않았고 지금 당장 말을 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왕자님께서 제게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시나요?’

‘아마?’

‘그분을 만나려는 이유를 제게 알려주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그래.’

흔들림 없는 시선, 그리고 거울에 대해 말할 때마다 보이는 은근한 적의. 뭐가 됐든 저 사내가 거울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적의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선택지가 없는 거군요.’

안겔이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왕자가 바로 황제를 찾아갈지도 몰랐다. 그러니 왕자를 믿든 믿지 않듯 안겔은 그를 도와야 했다.

‘그래, 하지만 그대에게 그다지 피해가 가진 않을 거야. 나도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러 온 것은 아니니.’

‘자리는 마련해드리죠. 다만 그 전에 합의해야 할 일들이 있군요.’

포기에 가까운 허락 뒤 안겔은 정신을 차리고 협상에 임했다. 황제에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이며 숨겨야 할 부분은 어느 정도인지 자잘한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신전에는 그가 거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숨기라는 지시를 받았다.

‘지시라니!’

신의 사랑을 받는 로제타도 아닌, 왕자일 뿐인 자에게! 안겔이 분함에 기어이 입 밖으로 욕을 내뱉었다.

“망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겔은 이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휘말렸어.”

마냥 화를 내고 분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차피 황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니까, 완전히 계획이 틀어진 것도 아니야.”

왕자가 한 이야기를 정말 다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 덕에 꽤 그럴듯한 정보를 얻게 되지 않았던가.

‘황실로 돌아갈 명분은 충분해.’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힌 안겔이 펜을 들고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흔들리는 속내와 달리 종이 위 글씨는 반듯하고 우아했다.

마지막 인사를 마무리한 안겔이 다시 한번 편지를 살펴봤다.

“어느 정도 경계를 사는 건 받아들이겠다 했으니, 이 정도면 되겠지.”

애당초 왕자가 안겔에게 다가온 이상, 로제타가 왕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을 테니 쓸데없이 환심을 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안겔은 편지를 봉한 뒤 곧장 그녀를 보필하는 신관을 불러들였다.

“황제 폐하께 보내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신관이 방을 나서고 다시 홀로 남은 안겔이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하얀 종이를 꺼내 이름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왕자에게 휘말리고 있는 지금,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고위 신관을 보내야 한다면, 내 사람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지.”

안겔은 그녀를 잘 따르는 고위 신관들의 명단을 살피며 어떤 이를 이아코스 왕국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까 고심하기 시작했다.

***

서호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푸티에게 무언가를 보고 받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서 아리스가 속삭였다.

“오늘 집중이 안 되죠?”

서호가 입가를 축 내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사실 저도 그리 집중이 되지는 않더군요. 조금 소란스러웠지 않습니까.”

하긴 오늘 푸티가 이래저래 잔뜩 경직되어 있긴 했다.

“푸티도 조금 긴장한 눈치였죠?”

서호의 물음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아리스가 덧붙였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평가받는 느낌이었달까요?”

장난스러운 답이었으나 그 안에 진심이 가득했다.

“음, 공부방을 따로 달라고 해볼까요?”

서호의 제안에 아리스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서호는 그게 무언의 긍정임을 깨달았다.

그사이 푸티가 다시 방을 나서고 로제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서호. 오늘 수업은 거의 다 끝났지?”

“아, 네.”

평소라면 수업이 끝나고 난 뒤에 다과를 들며 이 세계에 대한 상식 수업을 가장한 수다를 떨었겠지만 로제타 때문에 긴장했다는 아리스에게 그것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나도 로제타가 있으니까 조금 어색하고.’

서호가 아리스와 시선을 맞추는데 로제타가 그 시선을 끊어내듯 말했다.

“서호, 안겔에게 편지가 왔어.”

그 말에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보고 아리스가 책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히 하실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니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아니, 그대도 있게.”

로제타의 말에 아리스가 흠칫, 자리에 멈춰 서며 되물었다.

“네?”

로제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그대도 알게 될 이야기야. 신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서호와 수업을 할 텐데.”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아리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알아도 되는 이야기가 맞습니까?”

로제타의 시선이 아리스에게 닿았다.

“일이 이렇게 될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푸티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봐.”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아리스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긍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서호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그를 불렀다.

“서호, 편지 내용은 간단해. 알아낸 것이 있고 그걸 알려주기 위해 황궁을 방문해도 좋겠냐는 질문이야.”

안겔이 황궁으로 돌아오다니. 서호가 눈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지려다가 아리스를 쳐다보자 로제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조금 복잡해 보이는 아리스의 표정을 살피던 서호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안겔을 일부러 내보낸 것 아니었어요?”

“맞아. 하지만 정보를 얻었다고 하니 무시할 수는 없지. 정보만 보내라고 한들 그걸 들을 사람도 아니고.”

아리스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호가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려 하는데 로제타가 말을 더했다.

“그리고 이쪽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던 것 같더군. 그전까지는 뭘 찾아낸 기색이 없었거든.”

서호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이 이야기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였다.

“정보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거짓일 거라고 생각해요?”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비꼬듯 돌아온 답에 서호가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편지를 보내기 전, 한 사람과 대화를 했어. 다른 제국 귀족 하나와도 대화를 하긴 했지만, 대단한 대화를 하진 않았다는 걸 확인받았고.”

“그게 누군데요?”

“이아코스 왕국의 2왕자.”

“이아코스 왕국이요?”

왕국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았지만 이름 외에는 서호가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무역을 주로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는 기억하는데.’

서호가 눈을 찌푸리는데 로제타가 아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리스. 그대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서호에게 이아코스 왕국에 대해 알려주는 거야.”

입을 다물고 있던 아리스가 물었다.

“자리를 비우시는 겁니까?”

질문을 한 건 아리스인데 로제타는 서호를 보며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저녁 식사 전까지는 돌아오지. 푸티는 곧 돌아올 거고.”

“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준 로제타가 훌쩍 방을 떠났다.

스치듯 귓가를 매만진 손길을 떠올리며 귀를 만지작거리던 서호가 다시 의자에 앉는 아리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그거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될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던 그거요.”

아리스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답했다.

“제가 폐하의 사람이 됐다는 소립니다.”

“원래도 황실 마법사잖아요?”

로제타가 황제니 황실 마법사는 당연히 로제타의 사람이 아니었나?

“그렇긴 하죠. 그냥 제가 폐하 쪽으로 줄을 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잘된 일입니다.”

서호가 평소보다 굳은 아리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잘된 얼굴이 아닌데요? 저 때문에 피해를 본 건가요?”

“피해는요.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겁니다. 딱히 권력욕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신다는 걸 거절하는 편도 아닙니다. 앞으로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그게 조금 걱정될 뿐이죠.”

여전히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호에게 아리스가 첨언했다.

“앞으로 푸티 같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서호님과는 더 친해질 수 있겠군요.”

“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단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시작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게 맞지 않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안 될 것 같았다. 서호는 나중에 푸티에게 한번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마무리했다.

“그래요. 알려줘요.”

“네. 이아코스 왕국이라는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이아코스 왕국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