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불편하고 조금 기분이 나쁘긴 한데. 그래도 괜찮아.”
그게 뭐가 괜찮냐고 쏘아붙이려는데 로제타가 눈매를 곱게 내리깔며 말했다.
“그대가 날 두고 어딜 가진 않을 테니까.”
수줍은 듯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서호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로제타가 확인받듯 물었다.
“그렇지?”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서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그를 붙잡지 않은 반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래, 여기에 끈을 달아 펜던트같이 만들어줄 테니 목에 걸고 다니도록 해.”
다가온 손이 서호의 명치께에 닿았다. 얇은 옷 너머 닿은 손끝이 그 아래로 미끄러지듯 쭉 내려왔다.
“이 정도 길이로 끈을 만들면 옷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을 거야.”
명치보다 조금 아래로 닿은 손이, 그리고 그 손을 따라 내려간 시선이 뭔가 평소와 달랐다.
달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푸른 호수 같던 눈이 안개가 낀 것처럼 잔뜩 가라앉았다.
흙탕물이 튄 것 같은 그 눈에 서호가 흠칫 놀라 조금 더 아래로 향하려는 로제타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 고마워요. 로제타.”
로제타가 별다른 반발 없이 손을 떼어냈다.
“고맙긴.”
웃음 짓는 그 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서호를 향한 애정으로 반짝거리는 그 눈을 마주하자 딱딱하게 굳던 몸이 다시 부드럽게 풀려갔다.
아까의 그늘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착각인가 봐.’
서호가 자연스레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
로제타는 수업을 받는 서호의 모습을 지켜보며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손끝에 닿았던 몸 너머 작게 떨리던 서호의 심장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경직되던 서호의 몸도.
‘아직 손을 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대놓고 긴장한 티를 내니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자 안심한 듯 풀어지던 얼굴을 떠올리자 입안이 바짝 메말랐다.
로제타는 그를 힐끗 돌아보는 서호에게 웃어주며 푸티가 가져다준 음료를 마셨다. 꼭 해야 하는 회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 며칠 그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기에 이렇게 한가로이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때가 떠오르는데.’
어두운 방 안, 거울 너머 서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때.
사실 지금과 그때를 비교하면 당연히 직접 서호를 볼 수 있고 그를 만질 수 있으며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지만 그럼에도 로제타는 종종 그때가 그리워졌다.
‘나 외에 아무도 서호를 볼 수 없었고 또….’
서호의 은밀한 곳까지 전부 볼 수 있기도 했다.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샤워하던 서호 덕분이었다.
희고 긴 깨끗한 목을 따라 내려가면 톡, 도드라진 쇄골이 있었고 그 아래를 따라 내려가면….
“아.”
다시 그를 돌아보는 서호와 눈이 마주친 로제타가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그림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서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로제타는 힐끗 고개를 내려 그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흠.”
“지루하진 않으십….”
서호에게 다과를 건네주고 로제타의 테이블 위에도 다과를 올리려던 푸티가 반쯤 내던지듯 접시를 내려놓았다.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푸티를 바라보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뒤로 한발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계속되는 소란에 로제타의 눈이 찌푸려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호가 그들을 돌아봤다.
“푸티?”
푸티가 거의 자리에서 펄쩍 뛰며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냈다.
로제타가 잔뜩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는 푸티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러자 푸티가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더니 평소처럼 맹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호님. 죄송합니다. 시끄러우셨죠?”
“음, 아니에요.”
서호의 관심이 떨어져 나가자, 푸티가 다시 한번 로제타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폐하,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그의 아래에서 눈을 돌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푸티에 로제타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됐다. 잠시 자리를 비우지.”
“네, 네. 그런데 어딜?”
멍청하게 되묻는 모습에 로제타가 무심히 답했다.
“욕실.”
“네?!”
아까보다 훨씬 더 커다래진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로제타가 미간을 좁히는데 다시 한번 서호가 푸티를 불렀다.
“푸티?”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하.”
서호가 로제타와 푸티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로제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 푸티의 모습에 쯧, 혀를 찼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양 고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호,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고마워요.”
“아리스 그대도 수고하게.”
“네, 폐하.”
로제타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자 푸티가 서둘러 로제타의 옆에 붙어 섰다.
“하하하, 제가 물을 받겠습니다.”
당연한 것을 굳이 말로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번잡스럽군.”
서호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로 그를 타박하는 로제타에 푸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될 텐데.”
“죄송…, 네. 시정하겠습니다.”
푸티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로제타를 따라 욕실로 들어섰다. 다행히 욕실 문이 닫히자 푸티는 빠릿빠릿하게 목욕 준비를 마쳤다.
“저는 나가 있을까요?”
“그래.”
푸티가 서둘러 욕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커서 다시 한번 혀를 찬 로제타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목욕을 오래 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서호의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했다. 로제타는 조금 전 서호를 볼 때와는 달리 잔뜩 지루한 낯으로 욕조에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
안겔은 웃고는 있지만 평가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2왕자의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응접실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왕자의 수행원들과 일반 신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녀를 기다리던 신관이 서둘러 다가왔다.
“…대화가 길어지신 듯한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윗선의 명령을 받아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다행히 그 감정을 터트리지 않은 안겔이 조금 빠른 어조로 줄줄 이야기를 쏟아냈다.
“왕자님께서 왕국에 고위 신관 두엇을 보내 어머님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오늘 만남을 포장할 만한 핑계로 어미를 들먹이는 건 왕자와 합의된 사항이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아.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건가요?”
“평소와 그리 다르진 않다던데.”
“네, 그럼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오늘 더 이상 일정은 없지?”
“그렇습니다.”
“알겠다.”
안겔은 응접실에서 나오는 왕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예법에 맞지 않는 빠른 움직임에 몇몇 신관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안겔은 개의치 않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쾅, 거칠게 닫히는 문이 그녀의 심경을 대변해줬다. 안겔은 문을 닫자마자 풀릴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오롯이 그녀만의 공간에 들어온 안겔은 억지로 끌어올리던 입꼬리를 축 내려뜨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상황이 점점 더….”
안겔은 튀어나올 것 같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그녀를 협박하던 왕자를 떠올렸다. 거울을 들먹인 왕자는 입을 꾹 다물고 경계하듯 그를 바라보는 안겔에게 태연하게 요구했다.
‘이런 정보라면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나와 이방인이 만날 자리만 마련해주면 되네. 그대에게 해가 가지는 않을 거야.’
왕자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입을 나불거렸지만 서호와 약속을 잡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아는 게 많아 보이는 왕자에게 서호와 만날 기회를 주다니? 이쪽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너무 컸다.
‘무슨 짓을 하실 줄 알고요?’
‘내가 이방인을 어찌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건가?’
왕자가 안겔을 위아래로 훑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안겔이 이를 악무는데 왕자가 웃음을 지우고 또 한 번 안겔을 압박했다.
‘지금 반응을 보니 거울을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알고 있던 것 아닌가? 그런데도 황제에게 거울을 줬다면…. 그쪽 생각이 대충 짐작은 가.’
안겔이 테이블 아래 보이지 않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되물었다.
‘협박하는 건가요?’
‘내게는 다른 방도도 있다고 말하는 거네.’
안겔만이 안다고 생각했던 거울의 비밀을 아는 왕자가 황제를 찾아가 모든 걸 밝힌다면 정말 끝이었다.
‘…왕국의 이야기는 기록에 없었어요.’
‘숨겼으니 당연하지. 이쪽도 왕족이니 비밀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야.’
안겔은 왕자의 나이를 떠올렸다. 로제타와 동갑이라고 했나?
‘이 거울은 오십여 년간 반출된 적이….’
불신을 표하는 안겔에 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 거울이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웃긴 것 아닌가?’
또 다른 거울이 있다니 더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안겔이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 거울이 같은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그대는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왕자의 말처럼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왕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