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5화 (55/155)

#55

4장. 햇빛

“그럼 이만.”

안겔의 인사에 제국의 귀족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녀님.”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마지막 인사와 함께 몸을 돌린 안겔은 방금 귀족에게 들은 제국의 상황을 되새겼다.

‘서호의 존재를 밝혔다니.’

품 안에 꼭꼭 숨겨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겔의 예상과는 다른 행보였다.

물론 황제궁의 수많은 사용인이 모두 입을 다물지는 않았겠지만, 서호에 대한 소문이 퍼지더라도 로제타가 절대 서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서호의 존재를 공개한 것도 아니야.’

방금 저 귀족만이 아닌 최근 신전을 찾아온 여러 제국 귀족들의 공통된 말에 따르자면, 귀족 중 서호를 실제로 본 이는 없었다.

‘서호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말에 불쾌함을 드러냈다고 했어.’

로제타의 소유욕은 여전히 건재했다.

‘최대한 빨리 황궁에 찾아가 봐야겠어.’

둘의 사이가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파악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귀족들에게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로제타가 인정할 만한 가치를 가진 정보를 찾아가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랬다. 안겔은 아직도 서호가 꾼 꿈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안겔이 낮게 혀를 차며 도서관으로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안겔님.”

안겔이 그를 돌아보자 일반 신관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죠?”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겔의 눈썹이 작게 치솟아 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손님? 오늘 더 약속된 손님이 있었던가요?”

거울에 대한 조사가 너무 늦어져 부러 오늘 오후 일정을 빼놓은 참이었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안겔이 불편함을 애써 숨기는데 신관이 얼굴 가득 곤란함을 담고 말했다.

“이아코스 왕국의 2왕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아코스라면 제국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무역으로 이름 높은 해상왕국이었다. 제국에서도 여러 귀족이 이아코스 왕국의 물건을 좋아했고.

예정되지 않은 방문임에도 거절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진 이였다.

아무리 신전이 나라에 구속받지 않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황족이나 왕족에게까지 뻣뻣하게 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신녀라는 이 자리가 그런 높은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니 안겔이 이 만남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왕자가 무슨 일로?’

안겔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신관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혹 따로 내게 말해줄 정보가 있나요?”

“예정되지 않은 방문이라 신전에서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국정 회의 때문에 수도로 올라왔던 귀족들의 방문이 많기도 했고요.”

긴 핑계에 안겔이 짜증스레 미간을 좁혔다가 앞을 손짓했다.

“그래요.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으니 일단 가죠.”

안겔은 신관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녀가 아는 2왕자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름이…, 루미너스 S 이아코스.’

왕비가 아닌 후궁의 아들이었지만 후궁을 향한 왕의 사랑이 극진했기에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왕비도 죽었지.’

하지만 왕세자를 단단히 받쳐주던 왕비가 죽었음에도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왕자는 병에 걸려 칩거 중인 어미의 병간호를 가장 우선으로 하여 언제나 성안에 박혀 있는 인물이었다.

‘그게 왕자 본인의 선택인지, 아니면 아비의 명령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외출을 삼가는 왕자, 아픈 어머니, 갑작스러운 신전 방문.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라도 해달라고 하는 건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후궁의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 예정되지 않은 방문도 이해됐고.

‘후궁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윗선에 해야겠네.’

각 나라의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도 신전을 위해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적당히 안타까움을 표하며, 신전에 기도를 올리겠다 하면 되겠지.’

왕국까지 같이 가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고위 신관 두엇을 보내면 꽤 괜찮은 체면치레가 될 것이다.

안겔은 도착한 응접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들어오게.”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돌아보는 신관에게 눈인사를 건넨 안겔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꿀을 녹인 듯 짙은 금안을 마주했다.

“신녀 안겔.”

응접실 안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 먹물 같은 새카만 머리를 가진 저 사내가 바로 2왕자 루미너스 이아코스일 것이다.

“축복이 함께하시길, 전하.”

빠르게 사내를 훑은 안겔이 인사를 건네자 사내가 그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안겔이 자리에 앉자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가 차를 내어줬다.

신전을 찾아오는 높으신 분 중 다과를 직접 챙겨오는 이들이 적지는 않았기에 안겔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받았다.

안겔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먼저 갑작스러운 방문을 사과하지.”

“아닙니다. 전하. 신전은 모두에게 늘 열려 있는 곳인걸요.”

안겔은 처음 이야기를 전해 받았을 때 느꼈던 짜증을 숨기고 판에 박힌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왕자는 그리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대의 시간을 더 빼앗지 않기 위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하는데.”

그래도 로제타와 달리 예의를 차리기는 했다. 사실 아무리 바빠도 안겔에게 로제타처럼 막무가내로 구는 이가 별로 없었으니 당연한 태도이기는 했다.

“네, 전하. 그러시죠.”

“수행원들을 밖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괜찮겠나?”

응접실에 단둘이 남게 되어도 괜찮겠냐는 물음이었다. 높으신 분이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자 하는 것 역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사내와 단둘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로 추문에 휩싸일 일은 없었고 또한 성력이라는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있었기에 안겔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겔의 허락에 왕자가 곧장 수행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왕자가 곧장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찾아온 이유는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네.”

“네, 뭐든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안겔이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픈 가족을 가진 이가 하는 질문은 뻔했다.

죽음 뒤의 세상이라든지, 아픈 이를 위한 기도, 축복에 관한 질문들.

대충 적당한 답을 떠올리며 잔을 손에 쥐는데 왕자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대, 거울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던 안겔의 손이 허공에 멈추며, 견고하던 가면에 커다란 금이 갔다.

***

서호는 은장도를 꺼림칙하게 바라보면서도 그걸 부득불 자신에게 주는 로제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들고 다니라고요?”

“칼 자체에 특별한 게 느껴지지는 않아. 서호는 뭔가 느껴져?”

“아니요, 딱히.”

로제타나 서호 모두 칼에서 어떤 힘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당이 준 것이고 칼이 자신을 따라온 것은 기이한 현상이었기에 이걸 들고 다니는 게 맞는지 확신이 안 들었다.

“서호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무당이라는 자, 그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확실히 로제타의 말처럼 무당은 서호에게 나름 호의를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과 검을 준 뜻을 생각하면 마냥 좋게만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서호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로제타가 서호의 손목을 붙잡으며 그를 불렀다.

“서호.”

“네?”

로제타가 검지로 서호의 손목 안쪽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토닥이듯 말했다.

“빛의 힘에는 여러 능력이 있어. 그러니 그대의 감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

본래 로제타의 힘이었으니 이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호는 로제타와 달리 아직 이 힘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했다.

서호가 여전히 머뭇거리자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거 가지고 있고 싶잖아?”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사실 서호는 제멋대로 따라온 이 검이 불길하면서도 동시에 본래 세계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날 입고 온 옷도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스스로도 왜 이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의미가 좀 달랐다.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저쪽 물건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서요.”

서호의 솔직한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가지고 다녀.”

“로제타는요? 이거 별로잖아요.”

자신만 생각하면 이쯤에서 로제타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이건 서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작게 신음을 냈다가 답했다.

“…그렇긴 해.”

역시 이건 지금까지처럼 푸티가 보관하게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럼 됐어요. 이거 볼 때마다 불편해할 게 뻔한데.”

서호와 로제타는 그가 일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 하루 대부분을 함께했다. 늘상 함께하는 이가 불편해하는 물건을 굳이 고집을 피우며 가지고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로제타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가지고 있고 싶지도 않은걸.’

서호가 검을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로제타가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그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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