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과거의 일은 추억이 됐지만, 그 일로 인해 생긴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이 몇 달간의 고생을 기억하는지 서호는 제국에 도착한 이후 항상 자정이 되기 전 잠들어 최소 8시간 이상의 숙면 뒤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호는 자정이 되기 한 시간 전부터 밀려오는 잠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서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푸티에게 찬물을 부탁했다.
“푸티 미안한데, 한 잔만 더 줄래요?”
“서호님, 폐하께서 조금 늦으시는 모양인데 먼저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정까지 30분이 남은 시간이었다.
“…12시 전에 못 올까요?”
푸티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저도 잘….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하긴 회의라는 게 마음대로 딱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싶었다.
“음, 그래도 12시까지는 기다려 볼게요.”
“알겠습니다.”
푸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찬물을 한 잔 더 따라줬다.
“고마워요. 나 때문에 푸티도 못 돌아가고 있네요.”
서호는 평소 그와 로제타가 잠자리에 들면 푸티가 다른 시종과 교대를 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서호가 버티고 있는 탓에 푸티 역시 퇴근이 늦어지는 것이다.
푸티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너무 졸리시면 대화라도 하는 건 어떠십니까.”
확실히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음, 그러는 게 좋을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화젯거리를 생각해 보던 서호는 잠 못 들던 당시의 기억과 함께 떠오른 의문을 풀기로 했다.
“푸티, 내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었잖아요.”
“네, 그러셨죠.”
“내가 그날 이곳에 왔을 때 맨몸으로 왔나요?”
로제타의 손을 붙잡고 이곳으로 넘어오던 그 순간은 생생했다. 하지만 당시 무언가 물건을 챙긴 기억은 없었다.
‘보통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는 않으니까, 함께 오지 않았을까?’
당시의 갑작스러웠던 일련의 상황을 떠올리면 가져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긴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서호님께 물건을 돌려드리지 않았군요.”
서호가 잔뜩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가져온 물건이 있나요?”
“네,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그만 칼이었는데요.”
“…칼이요?”
칼이라니?
‘내가 칼을 챙길 일이 있나?’
서호는 집에 있는 칼을 떠올렸다.
‘집에 있는 칼이라고 해봐야 커터칼이나 식칼 정도 아닌가?’
그런 게 이동 당시 서호의 옆에 있었을 리가 없었다. 서호가 의아해하자 푸티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그만 칼이었습니다. 칼집에 들어 있었는데요.”
칼집? 서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손바닥만 한….”
눈을 찌푸리며 푸티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서호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거 설마 은장도 말하는 건가요?”
“은색이긴 했습니다. 은장도라고 부르는 거군요?”
“그걸 가져왔다고요?”
물건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그 물건이 왜 서호와 함께 이곳에 왔단 말인가.
‘그건 분명 공부방에 있는 책상 서랍에 넣어뒀는데.’
무당이 준 물건이 기이한 일을 일으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가져오셨다기보다는 서호님이 나타나신 그날, 침실을 정리하다 제가 발견한 겁니다.”
역시 자신이 챙긴 것은 아니고 그 물건이 서호를 따라온 모양새였다.
“제가 그걸 볼 수 있을까요?”
제멋대로 따라오는 물건이라니 어딘지 느낌이 불길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살펴는 봐야 할 것 같았다. 서호의 물음에 푸티가 어렵지 않다는 듯 답했다.
“본래 서호님 물건이니 내일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중요한 물건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모호한 서호의 답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호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푸티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자정입니다. 서호님.”
“아, 그렇네요.”
푸티의 말대로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정과 달리 일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해줘야 할 말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별수 없었다.
“그럼 이만 자야겠….”
오히려 기다리는 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서호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서호님?”
“오는 것 같아요.”
“네?”
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으로 한 발짝 걸어갔다.
“로제타가 도착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 외쳤다.
“폐하!”
서호와 푸티의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푸티가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숙였다.
“서호님의 말대로 폐하께서 오셨나 봅니다.”
“…그렇네요.”
스스로도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로제타가 도착한 것이다.
서호는 의문을 뒤로 물리고 한 발 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지금은 오랜만에 보는 로제타를 반기는 게 더 중요했다.
딱히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곧 저 문이 열릴 것이다.
‘셋, 둘, 하나.’
동시에 문이 조용히 열리고 로제타가 나타났다. 열린 문틈 사이로 호수를 닮은 푸른 눈을 발견한 서호가 가볍게 인사했다.
“다녀왔어요, 로제타?”
무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던 눈가가 부드럽게 풀리고 따뜻한 빛이 어렸다. 그리고 이내 그가 녹아내릴 듯 웃었다.
“다녀왔어. 서호.”
별것 아닌 인사말이 귀를 타고 들어와 몸을 크게 울렸다. 전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포근한 울림이었다.
***
결국 그날 밤 서호는 로제타에게 카나리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를 따라 미소 짓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침대 위였으니까.
그리고 침대에 눕고 나니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졌고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서호는 위에서 불쑥 나타나는 아름다운 얼굴에 푸슬푸슬 웃어버렸다.
“잘 잤어요?”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잘 잤어. 그대는?”
“저도요.”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가뿐했다. 서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로제타가 시종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몇 시예요?”
“9시.”
“조금 늦게 일어났네요.”
“늦게 잠들었으니까.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말똥말똥한 저 눈을 보면 이 말은 분명 거짓이었다. 서호가 그걸 지적하려는데 로제타가 방으로 들어서는 푸티를 힐끗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서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그가 눈치챘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에 서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아침을 먹으면서 할까?”
“네. 그래요.”
조금 위기의식이 없나 싶었지만 푹 자고 일어나 로제타의 밝은 얼굴을 마주하니 그가 없을 때 일어났던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호는 딱히 서두르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몸을 씻고 아침 식사까지 마쳤다. 물론 식사 중 전날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했고.
서호의 말이 끝나자 로제타가 물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확실히 수상하네.”
“그렇죠? 정체가 뭘까요?”
로제타가 다시 한번 종을 울리며 답했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고, 애당초 정체를 밝혔다고 해도 그자의 말을 믿기는 힘들지.”
로제타의 말처럼 상대가 순순히 자신이 누군지 말했다 해도 서호는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궁에 손님이 많다고 들었는데 손님 중 하나일까요?”
로제타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 멍청한 이가 있나 싶은데.”
“멍청이요?”
“귀족 중에 내게 덤빌 만한 이는 없을 텐데.”
싸늘하게 내리깐 눈매, 그리고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협적인 분위기.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서호는 그런 로제타의 모습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제국 사람은 아닌 걸까요?”
다시 방긋 미소 지은 로제타가 다정하게 서호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그렇다고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조사해 볼게.”
“네.”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푸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푸티를 따라 들어온 사용인들이 테이블을 정리하여 방 밖으로 떠났다.
‘역시 푸티가 아니면 좀 불편하지.’
사용인들이 들어서는 순간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이 나가길 기다리는데 푸티가 서호에게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푸티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서호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건 뭐지?”
로제타가 서호의 손에 들린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자 푸티가 답했다.
“서호님께서 말씀하셨던 은장도라는 물건입니다.”
“고마워요.”
서호의 인사에 푸티가 빙그레 웃더니 다시 방을 나섰다. 푸티가 떠나자 로제타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왔다.
“은장도?”
“어제 푸티와 이야기하다가 알게 됐는데, 제가 올 때 이게 함께 딸려 왔다고 해서요.”
제멋대로 서호를 따라 이곳에 온 것치고 손안에 들린 은장도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은 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로제타도 알고 있었군요?”
하긴 푸티가 알고 있는데 로제타가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대가 깨어나지 못할 때 들었어. 그래서 그게 뭔데?”
서호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호신용 겸 장식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호신용이라기에는 너무 작은데?”
“뭐, 저도 선물을 받은 거라서요.”
로제타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나?”
“네, 그래요.”
서호의 손에 들려 있어도 작았던 은장도는 로제타의 손에 있으니 어린아이도 가지고 놀지 못할 장난감처럼 보였다.
은장도로 이리저리 살피던 로제타가 검집을 벗겨내더니 말했다.
“장식품이라기에는 날이 잘 서 있군.”
그렇긴 했다. 로제타가 예리한 날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물었다.
“이걸 왜 그대에게 선물해준 거지?”
“벽에 눈이 생기고 나서 무당을 찾아갔었거든요. 그 무당이 줬던 거예요.”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로제타가 은장도를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용한 무당이라고 했었지.”
“네?”
로제타가 서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그대가 한번 용한 무당이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 적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은장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 무당이라는 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내게 해주겠나?”
서호가 로제타와 작은 칼을 번갈아 바라봤다.
“로제타와 아예 상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를 피할 방법으로 무당이 건네준 칼 이야기를 로제타가 딱히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당이 했던 말 중 틀린 것은 없었으니 그녀가 건네준 이 물건도 심상치 않은 것이 분명했다.
‘따라온 건 말할 것도 없고.’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손안에 들린 이 작은 칼은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