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서호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노란색의 카나리아를 떠올리던 서호는 책을 정리하며 그를 부르는 아리스에 정신을 차렸다.
“아, 아리스.”
서호는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아리스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 서호는 그가 누구를 찾는지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스가 서호에게 물었다.
“푸티는요?”
서호는 산책이 끝난 뒤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한참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아리스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급하게 할 일이 있다며 방을 나선 푸티를 떠올렸다.
‘아리스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떠난 건 처음이지.’
시종이 전해준 것이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방을 떠난 푸티는 수업이 끝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서호의 답에도 아리스는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 역시 서호처럼 푸티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모양이었다.
푸티는 웬만해서는 아무리 아리스와 수업 중이라도 방을 떠나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아리스가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하여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는 편이었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아리스가 서호와 눈을 마주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늘 그렇듯 수업이 끝난 뒤에 하는 질문을 던졌다.
“수업이 어렵지는 않으십니까?”
“네, 해석이 자연스럽게 되니까요. 이게 제 실제 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호의 걱정에 아리스가 서호를 격려했다.
“열심히 하시니까 서호님의 실력이 맞을 겁니다.”
“고마워요.”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그럼 상식 수업을 해볼까요?”
아리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마 푸티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일 것이다.
푸티는 서호가 혼자 방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런 편이었는데 특히 요즘 황궁에 손님이 늘었다며 더 열심히 서호를 챙기고 있었고.
‘딱히 손님이 늘었다고 해서 소란스러워진 것 같지도 않은데.’
서호는 아리스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네, 그래요.”
“요즘 폐하께서 많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어요.”
어제는 로제타를 아예 보지 못했었다.
바쁠 거라고 로제타가 미리 이야기해 주긴 했지만 방에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건지는 몰랐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걸까?’
황궁에서 하는 회의라고 들었는데 방에 돌아오지 못할 정도면 얼마나 바쁜지 짐작이 갔다.
‘하긴 황제니까.’
로제타가 자신에게 너무 거리낌 없이 행동해서 서호는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하지만, 그는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저번에 대륙 지도를 보고 제국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던가.
‘역시 새 이야기는 로제타가 돌아온 뒤에 해야겠다.’
서호가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을 얻는 와중 서호의 답에 그가 로제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한 아리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방에 돌아오지 않으셨군요. 회의 때는 밤을 새우는 일이 빈번하죠. 아무튼 그 때문에 지금 궁에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귀족들이 가득합니다.”
제국 전역이라니, 그래서 푸티가 황궁에 손님이 많다고 한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걱정대로 로제타는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게 맞았고.
“그래요?”
“네, 황제궁 주위에는 다가오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요.”
순간 서호는 카나리아를 떠올렸다. 아까 산책하러 나갔다가 마주친.
‘그 새도 이번 손님한테서…, 아니야. 그전에도 봤잖아.’
잠시 그 생각을 부정하던 서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서호에게 왔던 카나리아와 이번 새가 같은 새가 아닐 가능성은 충분했다.
노란색 카나리아가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을 리가 없으니까.
‘말을 하는 카나리아가 많은 건 아니겠지.’
아리스를 통해 배운 상식 중, 새가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았던가.
“서호님?”
“아, 아니에요. 그래서요?”
“서호님은 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푸티와 같은 의미의 질문인가 싶었지만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았다. 서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묘한 얼굴로 물었다.
“궁에만 있는 게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폐하와 푸티 외에 따로 친분이 있는 분이 없으시죠.”
서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아리스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음, 아리스.”
“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서호는 이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요. 친구들도 많고 교우 관계가 나름 좋았어요.”
친구도 많았고, 심하게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급우들과 무난하게 지냈다.
그래, 무난하게.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 주변에 남은 사람 중에 내가 진짜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물론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속을 터놓을 사람이었던 그 친구가 서호에게 아주 많이 미안해했을 뿐.
그제야 서호는 알아차렸다.
‘생각보다 내 모든 걸 보여줄 사람이 별로 없었어.’
부모님과 제일 친한 그 친구 하나. 그들이 서호의 가장 여린 속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
“그냥 텅 빈 느낌이었어요.”
공허하고 생각이 사라졌다. 살고는 있는데 생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로제타를 만났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다가 오랜만에 누군가 제 옆에 있는 거예요.”
서호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리스를 향해 빙긋 웃었다.
“주변에서 계속 로제타가 붉은 실로 연결된 운명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저도 마음을 연 건지, 아니면 로제타가 먼저 내게 마음을 활짝 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 서호가 실제로 보지는 못했으니 사실 그게 큰 의미가 되어 서호에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로제타가 보여주는 감정이 너무 반짝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끌렸다.
“아무튼 오랜만에 다른 사람을 제 선 안에 들인 거거든요. 그런데 누군가랑 관계를 엮는 걸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가, 로제타 한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하기도 제가 좀 벅차요.”
그 커다란 감정을 돌려주려고, 그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는 것만으로도 서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로제타의 마음이 서호가 겪어 온 그 어떤 감정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서 더 큰 노력이 드는 것이다.
서호가 멋쩍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아직 이 세계에 적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요. 제 생활 반경이 좁아서 세계가 바뀌었다는 충격이 덜한 것 같기도 하거든요.”
아직 완전히 이곳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을 하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서호의 진심이었다.
서호의 말이 끝나자 아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시군요.”
조금 전 아리스의 묘한 질문이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호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푸티도 그렇고 아리스도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이번에 로제타가 급한 일을 다 끝내면 한번 황궁 밖으로 나가 보자고 말은 해보려고요.”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제가 조금 서툴러서 친구를 사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그렇게 답한 서호가 장난스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로제타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푸티도 있고 푸티만큼은 아니어도 아리스와도 이렇게 종종 편안하게 대화를 하고요.”
아리스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입가에서 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그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서호가 웃음이 사라진 아리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 아리스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왜 푸티가 그렇게 서호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겠습니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서호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리스 역시 자기가 이야기해놓고 민망해졌는지 서호처럼 눈을 굴렸다.
그 모습에 웃음이 튀어나오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푸티가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호님.”
서호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푸티.”
그건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티.”
푸티가 아리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서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서호님, 폐하께서 예정대로 오늘까지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 정말요? 그럼 오늘은 같이 자겠네.”
순간 푸티와 아리스가 깜짝 놀라 서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서호가 물었다.
“왜요?”
멍하니 서호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어감이 이상해서….”
“어감이요?”
서호의 되물음에 아리스가 답했다.
“아닙니다. 그게 자연스러우신 것 같은데….”
그때 푸티가 끼어들었다.
“아리스님.”
눈을 치켜세우는 푸티에 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하하, 수업이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어요. 다음 수업 시간에 뵐게요.”
“네, 서호님.”
서호는 푸티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가는 아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신기하게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다들 괜찮은 사람이었다.
로제타도, 푸티도, 그리고 아리스도.
다들 서호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모든 인연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신녀 안겔과 아까 그 카나리아가 있으니까.
‘아직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호가 힐끔 시계를 돌아봤다.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오늘 꼭 이야기해야겠지.’
지금 시각은 오후 4시, 그러니 최대 8시간만 기다리면 로제타를 만날 수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나면 로제타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고 나서 로제타랑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네.’
아니, 여기 오기 전 집 벽에 그의 눈이 나타난 이후 처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를 잠 못 들게 했던 눈을 떠올린 서호가 키득거렸다.
당시에는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막상 지금 와서 떠올리면 나름 추억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화겠지만.’
서호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턱을 괴고 시계를 바라봤다. 시계에서 들려오는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