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2화 (52/155)

#52

로제타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세력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로제타는 아첨하거나 옆에서 귀찮게 구는 귀족들을 싫어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황제파와 귀족파의 경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황권은 강력하지.’

로제타는 열심히 일하는 황제가 아니었으며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황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효율을 중시했고, 어느 선택이 더 도덕적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로제타는 딱 황제로서 해야 하는 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력은 균형을 찾았다.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움직이지 않는 황제.’

본래도 제국보다 덩치가 작았던 왕국들은 알아서 제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건 제국 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로제타는 그에게 반기를 들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귀족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문제를 만들면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귀족들은 로제타에게 유일하게 반기를 들었던 1황자와 그 밑 세력들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잘못 보였다가는….’

그렇게 로제타의 힘을 아는 귀족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제국은 유례없이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어떻게 행동해도 로제타의 마음을 살 수 없고 오히려 귀찮게 군다고 처리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귀족들은 예전처럼 세력 싸움을 하지도 않았으며 평민들을 수탈하지도 못했다.

괜히 로제타의 눈에 띄었다가 한순간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귀족이나 평민들 모두 보편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정치싸움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족의 힘이 작위와 부를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로제타가 황제가 되고 몇 년 사이에 급변한 귀족사회에서 일인자로 군림하는 이가 바로 사브리나 공작이었다.

법에 어긋나지 않고 도덕적으로 문제 되지 않게 적당히 선을 지키며 로제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공작.

‘그런데 왜?’

선을 잘 아는 공작이 지금 로제타가 대놓고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는데 그것에 반발하듯 행동한 것이다. 회의장 안 귀족들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귀족들이 놀란 것처럼 로제타 역시 갑자기 이 일에 끼어든 사브리나 공작의 행동이 의외였는지 공작에게 물었다.

“공작이 이런 일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로제타가 사브리나 공작의 행동에 분노를 표하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지금이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다.

황제의 주위로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몇몇 귀족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으나 사브리나 공작은 덤덤하게 자기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인 것은 맞지 않습니까.”

회의장 안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귀족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처음 입을 연 백작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귀족 중 일인자인 공작이나 불편한 분위기를 만드는 황제를 탓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백작에게로 책임이 전가된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정말 오랜만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모두가 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사브리나 공작의 배짱에 감탄하기도 했다. 로제타의 시선을 정통으로 이렇게 오랜 시간 받아내고 있으면서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참 말없이 공작을 바라보기만 하던 로제타가 황좌에 깊게 등을 기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그러자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회의가 끝난 뒤 독대를 청합니다.”

로제타의 냉랭한 시선이 공작에게로 와 박혔다. 모두가 로제타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로제타가 공작을 보던 시선을 돌려 회의장 안의 귀족들을 바라보며 회의의 재개를 알렸다.

“공작과의 독대가 예정되어 있으니 회의를 더 서두르겠다. 다음.”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나 기민하게 살피던 이들이 서둘러 이번에 나서야 하는 귀족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귀족이 간신히 앞으로 한발 나서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부 지방의 백작령에서 일어난….”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회의가 재개됐다.

***

로제타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브리나 공작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공작이 별말 없이 곧장 그를 따라왔다.

회의장과 제일 가까운 응접실로 향한 로제타는 차가 나오기도 전, 공작이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본론.”

공작 역시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신전에 사람을 풀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로제타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러니까 공작이 주제넘게 회의장에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로제타가 차갑게 물었다.

“내가 내 행동의 이유 하나하나까지 이야기해 줘야 하나?”

“그럴 필요까지야 없지만, 아비가 딸을 걱정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로제타가 귀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딸이 다칠까 걱정이 되는 건가.”

“폐하. 신전은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옵니다.”

그래, 신전은 그 어디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신전은 어째서 이렇게 이 나라에 관심이 많은 건지.

신전은 로제타가 신에게 이름을 받았다는 걸 그들의 모든 행동의 이유로 삼았다. 그렇게 먼저 선을 넘은 건 저쪽이었다.

그러니 이제 로제타도 신전을 건드릴 이유는 충분했다.

“따지고 보면 나 또한 신전 소속이 아닌가.”

“이것은 경우가 다른….”

로제타는 공작의 말을 잘라냈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굳이 반기를 들면서까지 나를 부른 이유가 있겠지. 예의를 차리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해.”

아무리 로제타가 회의를 빨리 끝내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벌써 하루의 끝인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우지 말 걸 그랬지.’

최소한의 수면 시간은 보장해 달라는 귀족들의 요구에 다섯 시간의 휴식을 준 게 문제였다.

로제타는 초조하게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자정까지는 고작해야 15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로제타가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사브리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신전을 건드리시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신전에서 손을 떼시지요.”

로제타는 공작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로제타가 신전에 사람을 심자마자 로제타가 신전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고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로제타가 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내 밑에 둠으로써 내가 얻는 게 더 많으면?”

“모든 이들이 폐하의 행동을 반기지는 않을 겁니다.”

로제타가 무심한 눈이 공작을 훑었다.

“공작은 그걸 반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인가 보군.”

“그러합니다. 힘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니까요.”

“이미 힘의 균형은 틀어진 지 오래야.”

“하지만 겉으로나마 그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지요.”

들어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신전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귀찮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안겔이 수상쩍은 속내를 품고 있고 그로 인해 서호가 다친다면, 로제타는 기꺼이 신전을 가질 생각이었다.

로제타에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서호였다. 로제타가 거절의 뜻을 밝히려던 그때 공작이 다시 입을 놀렸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분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너무 힘을 많이 줘서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로제타는 그의 손 아래 바스러진 의자의 팔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답했다.

“내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를 건드릴 사람도 없겠지.”

“폐하.”

로제타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지금 이 건방진 행동이 오로지 그대의 딸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공작을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방금 공작의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안겔 같은 자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게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다.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지.’

분노를 가라앉힌 로제타가 턱을 괴며 공작에게 말했다.

“내가 왜 신전을 건드리는지는 알 테지.”

“글쎄요.”

“그대가 모를 리가.”

공작이 어째서 로제타를 찾아왔겠는가. 안겔과 공작의 딸이 한때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이번에 신녀를 조사하면서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딸에게 일을 맡겼다 거절당했고.

“그대의 딸이 내 명령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대의 딸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 거야.”

“그분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서는 말입니다.”

로제타는 공작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서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신전 전체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

“…제가 따로 나서 보겠습니다. 그리고 일이 잘못됐을 때는 저를 벌하시면 됩니다.”

나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 주겠다는데.

물론 로제타가 안겔의 감시를 멈추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일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었다.

‘일이 줄어들면 서호와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날 테지.’

결정을 내린 로제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네, 폐하.”

“돌아간다.”

로제타는 응접실의 공작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서호는 자고 있겠지만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로제타는 뒤따라 붙는 사용인들을 무시하고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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