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1화 (51/155)

#51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감돌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던 로제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계속 감시해. 뭐라도 알아차린 게 있으면 그때 다시 연락하라고 하고.”

“네.”

“서호는?”

로제타의 물음에 푸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사실 로제타를 이렇게 찾아온 이유 중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에도 신전 소식을 먼저 전한 건 서호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다른 이야기에 관심 따위 주지 않을 로제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폐하.”

로제타가 말하라는 듯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푸티가 마음의 준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잠시 서호님의 곁을 비웠사온데.”

“뭐?”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위압감에 푸티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신전에서 온 연락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로제타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나?”

“그게, 서호님은 그 상황을 전혀 모르시는데 다른 사용인이 매우 급한 일이라 강조를 해서….”

로제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푸티에게 경고했다.

“핑계 대지 마.”

무언가를 참는 듯 억눌린 목소리에 푸티는 잔뜩 겁에 질렸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계속해서 용서를 비는 것보다는 상황을 빨리 알리는 게 중요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네. 제게는 입을 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푸티가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된 뒤 서호는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가자고만 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자 무슨 말을 한 건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로제타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 들어 있는 날 선 분노를 읽어낸 푸티가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무언가를 참듯 한참 눈을 내리감고 있던 로제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푸티의 얼굴에서 땀이 흐를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푸티.”

푸티는 숨을 참았다. 이 목소리는, 그러니까 서호가 오기 전에 종종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분노를 느낄 필요조차 없다는 듯 무심하고 건조하던 목소리.

“다른 일은 다 필요 없어. 네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서호다.”

푸티는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네.”

경고를 끝낸 로제타가 회의실로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몸을 돌렸다. 푸티는 그런 로제타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오늘 방으로 돌아오십니까? 서호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온데.”

“조금 늦을 수도 있지만, 돌아갈 거야.”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질 것처럼 건조하던 목소리에 감정이 깃들었다. 새삼스럽게 서호가 로제타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각인됐다.

“네, 알겠습니다.”

“서호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잘 관리해.”

“네.”

다시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푸티는 온몸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댔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요 몇 달, 그러니까 서호가 오기 전.

로제타가 서호에게 관심을 주기 전의 모습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서호를 만나고 로제타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로제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절대 만만한 주인이 아니었다. 자비 없고 차가운 주인.

본래 푸티는 로제타를 만나고 나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식은땀을 흘렸었다.

‘신전 이야기를 먼저 하길 잘했다.’

만약 서호의 일을 먼저 이야기했다가는 신전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완전히 긴장을 놓고 있었던 스스로를 탓하며 푸티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그의 개인 방으로 향했다. 서호에게 돌아가기 전 하얗게 질렸을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했다. 서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

보레알리스 제국의 귀족들은 한 시종에게 어떤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간 로제타의 모습에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맙소사, 폐하께서 회의 중간에 자리를 비우시다니.”

한 귀족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로제타는 그와 달리 평범한 인간인 귀족들의 몸 상태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고 귀족들이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 돼서야 회의를 파하곤 했다.

귀찮은 회의는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던 로제타를 떠올린 귀족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회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니 평소보다 더 심하게 몰아치는 로제타에 귀족들이 얼마나 기겁하고 있었던가.

그런데 로제타가 갑자기 휴식을 취하자며 자리를 비웠다.

“폐하께서 저렇게 자리를 비울 일은 역시….”

누군가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이번에 폐하께서 존재를 알리신 ‘그분’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분.

정확히는 로제타의 짝이 될 사람.

소문만 무성하던 그 존재를 로제타가 인정한 지 이주가 채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귀족들은 그 존재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지방에서 온 귀족들 몇몇이 수군거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저희가 이렇게 황궁에 다 모이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이 기회에 폐하께 ‘그분’을 한번 제대로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수도와 거리가 멀어 소문도 늦게 전해 들었는데 막상 수도로 와도 그 소문의 존재를 볼 수 없어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수도 귀족들과 달리 지방 귀족들은 수도에 자주 올라올 수도 없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 해가 되어서야 ‘그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귀족의 제안에 다른 귀족이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총애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공개하고 싶지 않으실까요?”

“…흠.”

황제는 좋아하는 이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로제타는 다른 귀족들과 교류하지 않는, 아니 할 필요가 없는 황제였으며 따라서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귀족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 한 지방 백작이 무언가 결심한 듯 굳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번 물어나 봅시다.”

“맞습니다. 물어나 봅시다. 요즘 폐하께서 기분이 매우 좋다는 이야기를 모두 들으셨지요.”

그 말에 지방에서 올라왔던 귀족들이 너도 나도 귀를 기울였다.

“그럼요, 들었고말고요. 폐하께서 ‘그분’이 나타나시고 나서부터 그리 부드러워지셨답니다.”

“예전만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 그렇지요. 그럼….”

그들의 얼굴에 하나둘 화색이 돌고 있는데 다시 회의실 문이 열리고 로제타가 나타났다.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나타난 황제에게 꽂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로제타의 얼굴을 보고 요새 매우 부드러워졌다는 그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로제타의 얼굴에서는 냉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귀족들은 로제타와 눈이 마주칠세라 잽싸게 눈을 내리깔았다.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자 황좌에 앉은 로제타가 회의를 다시 시작했다.

“시작하지.”

틈 하나 없이 견고해 보이는 황제의 서늘한 얼굴에 눈치를 보던 귀족 중 하나가 로제타가 회의장을 나가기 전 의견을 내고 있던 후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이야기가 끊겼던 후작부터….”

그러자 로제타가 끼어들었다.

“됐어, 더 들을 것도 없다. 이 이상 세율을 올릴 수는 없어.”

방금 지방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던 후작이 미약하게 반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러나 그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로제타의 차가운 시선이 후작에게 꽂히자 후작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다음.”

다시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몇몇 귀족들의 시선이 로제타에게 ‘그분’과 관련된 말이라도 꺼내 보자고 말했던 백작에게로 꽂혔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서 공표하신 운명의 짝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곧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혹 공개하시게 된다면 이번 기회에….”

“내가 왜 그를 공개해야 하지?”

말이 끊긴 백작이 멍하니 로제타를 올려다봤다. 백작은 로제타의 얼굴에서 적개심을 읽어내고 몸을 바짝 굳힌 채 어리숙하게 되물었다.

“예?”

“그를 공개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그들은 백작만이 아니라 회의장 안에 있는 귀족들을 쭉 훑으며 이야기하는 로제타의 태도에서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이곳에 있는 귀족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경고였다. 그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로제타가 차갑게 말을 끊어내자 귀족들은 어물어물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 일이 흐지부지 넘어가려던 차, 이런 일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나섰다.

“그건 그분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폐하의 생각이십니까?”

회의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사브리나 공작에게로 향했다.

사브리나 공작.

황제인 로제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이후 귀족파만이 아니라 황제파 역시 이름뿐인 황제파가 된 지 오래였다.

로제타는 황제파 귀족이라고 더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제국만이 아니라 다른 왕국을 포함해서 누구도 신에게 이름을 받은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이가 없었기에 황제파는 로제타를 위해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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