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50화 (50/155)

#50

“그럼 로제타의 일만 끝나면 한번 물어볼게요.”

“네, 서호님.”

최근 며칠 동안 로제타는 여러모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푸티의 말에 의하면 그 바쁜 일은 이제 다 끝나가고 있었다. 로제타만 괜찮다면 그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국정 회의라고 했지?’

서호는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는 새를 쓰다듬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낯선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푸티!”

나무 뒤에 있는 서호를 눈치채지 못한 사용인이 곧장 푸티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일이 좀 생겼는데….”

푸티가 서호를 힐끗 쳐다보며 답했다.

“무슨 일?”

“그….”

무언가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사용인의 눈치에 서호가 푸티에게 말했다.

“가 봐요. 푸티.”

서호의 목소리에 찾아왔던 사용인이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푸티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서호님.”

“실력도 좋아졌고, 여기에만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서호가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로제타의 궁 안이잖아요.”

푸티가 말하지 않았던가, 황제궁 안은 안전하다고. 그때 사용인이 조심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푸티, 정말 급한 일입니다.”

푸티가 날카로운 눈으로 사용인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금방, 금방 오겠습니다. 정말 여기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그래요.”

푸티를 데리러 왔던 사용인이 서호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푸티를 데리고 이동했다.

혼자 남은 서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품 안의 새를 만지작거렸다. 새가 애교를 부리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호의 손가락에 얼굴을 비볐다.

“애교가 많네.”

조그만 머리와 매끄러운 털의 감촉이 서호를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좋아하니?”

당연히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뭐라는 거지?]

하지만 답이 돌아왔다. 서호가 파드득 놀라 손을 털었다. 그 때문에 손에서 새가 떨어져 내렸다.

서호가 깜짝 놀라 손을 앞으로 쭉 뻗었으나 새는 서호가 붙잡기 전에 날아올랐다.

[잡지 마.]

굵은 목소리. 서호는 할 말을 잃었다. 환청인 걸까? 아니면 정말 이 새가 말을 하는 걸까?

신기한 세상이니 새가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건 이상했다.

서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서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호는 오그라드는 손을 애써 펴며 용기를 내 물었다.

“저기, 혹시 네가 말하는 거니?”

질문을 한 뒤 서호는 숨까지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까처럼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답을 기다리던 서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호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감쌌다.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 눈이 그려진 벽에 인사할 때만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서호는 열이 오르는 귓가를 꾹꾹 누르며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서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서호는 몸을 굳혔다. 또 들렸다.

그러니까 착각이나 환청이 아니다. 정말 이 새가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새도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로제타의 신력 덕인 걸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새가 말이라니? 이게 뭐야….’

서호가 패닉에 빠져 있는데 다시 한번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서호가 귀를 만지고 있던 손을 내리고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이름을 물은 게 맞지?”

서호의 물음에 새가 포르르 날아 무릎 위에 올려둔 서호의 손등 위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몇 번을 물어보게 하는 거지?]

서호는 다시 한번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답했다.

“서호야. 이서호.”

[서호?]

“맞아. 그, 너는 이름이 있니?”

새가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을 하는 새이니 뭔가 다를지도 몰랐다. 서호의 물음에 새가 잠시 침묵했다. 잠시간 답을 기다리던 서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다음에 만나면 직접 알려주지.]

직접이라니? 그럼 지금 이 새가 말하는 게 아니라는 소릴까?

서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새가 아니야?”

[아니야.]

단호하게 돌아온 답에 서호가 얼떨결에 되물었다.

“그럼 누구야?”

[다음에 만나면 알려준다니까? 한눈에 나를 알아보면 상을 줄 수도 있고.]

“그게 무슨….”

하지만 새는 서호가 다른 질문을 하기도 전 날아올랐다. 서호가 다급히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지만 이미 새는 저 멀리 떠나간 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서호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호님?”

“아, 푸티.”

“정말 죄송…, 서호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푸티가 어울리지 않게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주위를 경계하는 그 모습에 서호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니, 누굴 만난 건 아니고요.”

누굴 만난 게 맞나? 새의 모습을 한 사람인지 뭔지 모를 이였는데. 서호가 망설이고 있는데 푸티가 다시 물었다.

“그럼 혹 피곤하십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음, 우선 방으로 돌아갈까요?”

“네?”

그게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탁 트인 곳에 있는 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푸티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네. 그러시죠.”

서호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로제타가 오늘은 일찍 들어올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 확답에 술렁거리던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닌 척해도 방금 그 일이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죠?”

푸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돌아오고 난 뒤에 이야기해야겠다.’

안 그래도 회의 때문에 바쁜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맞지만,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마.’

***

푸티는 서호를 다시 방으로 데려다준 뒤, 마침 수업을 위해 아리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역시 내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으시다.’

서호는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푸티는 사람의 기분을 파악하는 데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그 재능은 로제타를 지척에서 모시면서 더욱더 갈고 닦였고.

서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푸티는 곧장 로제타가 있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보고해야 할 게 더 있기도 하고.’

사용인에게 로제타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웬만하면 회의 중인 로제타를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서호와 관련돼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찾아오라는 로제타의 명령이 있었기에 별수가 없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국정 회의는 길면 일주일에서 짧으면 삼 일 정도 걸리는 일정이었다. 회의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넓은 제국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대부분 참석하는 회의였기에 일정이 길어지는 건 당연했다.

‘사실 이것도 폐하께서 황제가 되고 나서 많이 줄어든 거지.’

회의가 길어질 때는 거의 한 달이나 이어진 적도 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한 달이나 귀족들과 기 싸움을 하다니.’

지금에 와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며 회의 일정이 이렇게 짧아진 것은 로제타가 그만큼 강한 황제라는 증거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로제타는 최대한 빨리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테니 서호를 잘 돌보라 푸티에게 명했다.

‘서호님을 절대 황제궁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도 했고.’

국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만이 아니라 원활하고 빠른 회의 진행을 위해 수도에 사는 귀족들까지 작위가 있는 귀족들이 전부 황궁에 머물렀기에 최근 황궁에는 손님이 매우 많았다.

물론 로제타의 명령에 따라 황제궁 주변에는 절대 손님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사전에 준비해둔 상태였기에 서호에게 산책을 권한 거였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충격을 받은 듯했던 서호를 떠올린 푸티는 답을 재촉하듯 그를 바라보는 로제타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푸티는 로제타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고 그렇기에 뭘 먼저 로제타에게 보고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폐하. 신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전이라면, 신녀?”

“네, 신녀를 감시하는 자에게서 온 연락입니다.”

서호와 함께 정원을 산책할 때 갑자기 그를 찾아온 시종이 전한 것은 바로 신전에서 온 연락이었다.

로제타의 명령으로 신녀 안겔을 감시하는 사람을 심고 처음으로 돌아온 연락이었기에 더욱 중요했다.

“보고해.”

푸티는 보좌관이 정리해준 대로 신전에서의 연락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신녀는 늦은 밤, 홀로 신전의 도서관을 뒤진다고 합니다. 딱히 무언가를 찾은 기색은 없습니다.”

로제타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푸티가 몸을 움찔 떠는데 로제타가 짜증스레 말했다.

“결국 그 여자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는 소리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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