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49화 (49/155)

#49

‘애초에 씨앗에 문제가 있었다고?’

실수라는 걸 처음 해봤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실수를 서호에게 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서호에게.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실수하고 그것에 수치를 느끼는 건.

로제타는 새벽의 힘을 얻고 난 뒤 어느 과일이 가장 싱싱한지, 어떤 나무가 제일 튼튼한지, 어느 쪽 흙이 영양분이 많은지, 어떤 것이 곧 죽을지 등 별 이상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건 전부 신력의 힘이었지.’

그냥 딱 보면 알았다. 아, 이걸 가져가면 되겠다.

그래서 이번 역시 그냥 눈에 띄는 씨앗을 아무렇지 않게 서호에게 건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제 로제타에게는 빛의 힘이 사라진 상태였다.

‘한심하긴!’

정말 멍청했다. 로제타가 입술을 깨무는데 서호가 로제타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걱정스레 물었다.

“왜 또 울려고 해요?”

그 물음에 로제타는 눈가가 뜨거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울다니, 울 자격도 없어.’

로제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거였다.

일을 저지른 뒤 그냥 울어버리는 것. 안 그래도 일이 어그러져서 귀찮아졌는데 울기까지 하면 귀찮음은 두 배가 됐다. 시끄럽고 훌쩍거리는 꼴이 더러웠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재빨리 울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가 눈에 힘을 주고 울음을 참으려 애쓰며 재빨리 말했다.

“울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 떨리면서 나와 곤란했다. 로제타가 재빨리 입을 다무는데 서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로제타를 토닥였다.

“로제타, 조금 어이없긴 했는데 그래도 잘 해결됐잖아요? 울지 말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서호는 로제타를 신경 썼다. 로제타는 숨을 고르며 사과를 하려 했다.

“나는….”

그때 서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렇게 울 줄 몰랐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로제타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준 건 고마워.”

서호가 작게 웃으며 다시 로제타를 붙잡아왔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말아요. 오늘 기분 엄청 좋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웃어줬으면 좋겠어요.”

그 웃음에 거짓이 없어 보여 안심이 되는 한편 스스로가 한심했다. 로제타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응.”

서호가 로제타의 얼굴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뭘?”

서호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로제타가 웃는 거요. 로제타는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잖아요. 특히 웃을 때는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고.”

별다른 사심 없이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건네진 칭찬에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로제타가 눈치 없이 올라가려는 입가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내가?”

서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로제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더 예뻐.”

“네?”

정말 서호는 언제나 예뻤다. 로제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 웃고 있는 그대가 더 예뻐. 물론 웃고 있지 않아도 예쁘지만….”

그러자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울음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워졌다.

서호가 로제타를 툭 치며 말했다.

“뭐라는 거예요? 로제타가 그런 말을 하면 놀리는 것 같거든요? 내가 못생겼나….”

친근한 스킨십에 웃음이 나왔다가도 서호의 부정에 로제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못생겼다니? 나는 그대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너무나도 단호한 로제타의 말에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서호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어, 미의 기준이 조금 다른가요?”

로제타는 그게 맞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에서 제일 예쁜 건 그대야. 그렇지, 푸티?”

그러자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푸티가 재빨리 답했다.

“그, 그럼요! 서호님은 청초하고 청량한 느낌이 강하시죠. 또 단정하고, 단아하시고, 인상도 부드러우세요!”

로제타가 푸티의 말을 긍정했다.

“그래, 그렇다.”

서호가 푸티와 로제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웃었다.

“어…, 그래요. 일단 그런 걸로 해요.”

“그런 걸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로제타가 다시 서호의 칭찬을 늘어놓으려고 하는데 서호가 그런 로제타의 말을 끊으며 부탁했다.

“로제타, 그것보다는 이제 울음도 멈춘 것 같은데 웃어주지 않을래요? 로제타가 웃는 걸 보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딱히 관심도 없던 이 얼굴이 새삼스럽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서호가 너무 좋았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로제타를 정면으로 마주한 서호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로제타는 어리광을 부리듯 붙잡은 서호의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흠칫 몸을 떨던 서호가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숲 내음을 들이마시는 것 같은 싱그러움이 서호의 얼굴에 가득했다.

로제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서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딱 거기까지가 로제타가 참을 수 있는 한계였다. 놀란 듯 꼼지락거리며 품 안에 들어차는 서호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로제타는 서호에게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

다른 빛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에 샛노란 금안을 가진 사내가 하얀 장막 너머의 존재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거리낌 없이 장막 밖으로 삐져나온 창백하다 못해 푸른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낸 사내가 몸을 뒤로 물렸다. 문이 닫히고 공간이 분리됐지만 방 안의 흔적이 사내를 따라 나왔다. 코를 찌를 듯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짙은 꽃향기가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 향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에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위로 만들어진 바람이 휘몰아치고, 흔적이 모두 씻겨나가자 사내가 멈추고 있던 숨을 다시 크게 들이마셨다.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행원들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가자, 제국으로.”

***

로제타가 휴가를 끝내고 다시 바쁘게 일을 시작했을 때, 서호는 씨앗을 발아하고 몇 번의 연습을 거듭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정원에 발을 내디뎠다.

서호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호처럼 무언가를 기다리던 푸티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제 새가 날아오지 않습니다!”

서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렇네요.”

새가 날아오지 않는다는 건 신력을 잘 다룬다는 증거라고 했던가.

“이제 충분히 힘을 다루실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층 올라간 목소리로 그를 칭찬하려고 하는 푸티에 서호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별것 아닌 일에 칭찬을 연발하며 잘했다 이야기해 주는 게 꼭 다섯 살 난 아이를 둔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에요.”

“그럼 조금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푸티의 물음에 서호는 정원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저번 산책 때 갑작스레 나타난 새들 때문에 급하게 방으로 돌아간 기억이 있다.

‘그 뒤로 혹시나 해서 다시 정원으로는 안 나왔고.’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무언가가 서호에게 포르르 날아왔다.

“아.”

서호는 품 안에 날아든 노란 카나리아를 받아 들었다. 푸티가 서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새는….”

서호는 품 안으로 날아든 새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는 저번에 서호의 품에 날아왔던 그 새 같았다.

서호가 신기하다는 듯 새를 바라보고 있는데 푸티가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서호님, 그러니까 이건….”

푸티가 걱정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린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알아요. 이 아이는 사람을 잘 따르나 봐요. 다른 새들은 오지 않잖아요.”

예전처럼 능력을 잘 쓰지 못한다고 우울해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치료하는 등 여러모로 능력을 꽤 사용할 줄 알았기에 예전처럼 기가 죽지는 않았다.

‘걱정되거나 불안하지도 않고.’

서호가 밝게 웃어 보이자 푸티가 이리저리 서호의 얼굴을 살피다가 이내 안도한 얼굴로 물러났다.

푸티가 몇 번 새를 다시 날려 보내려 시도했지만 어떻게 해도 새가 다시 돌아오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정원의 구조를 설명해주는 푸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설명 끝에 그가 물었다.

“이제 급한 것도 끝이 났으니 폐하께 여쭤 보시고 함께 궁 밖으로 나가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궁 밖이요?”

“네.”

궁 밖. 서호는 먼 곳을 바라봤다. 이 황제궁 밖에는 또 궁이 있었고 서호가 머무는 방 창문에서 밖을 바라봐 봤자 보이는 것은 또 궁이었다.

그러니까 서호는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궁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흔쾌히 함께 나가실 겁니다. 수도를 소개하고 싶어 하실 테고요.”

서호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처음 가 보는 곳, 아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설렘.

로제타와 함께 간다면 여러모로 안심되기는 할 것이다. 푸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푸티와 함께 가는 것보다는 로제타와 가는 게 안전할 것 같기도 했고.

더군다나 이곳은 로제타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의 세상이,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궁금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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