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48화 (48/155)

#48

“네, 서호님! 대단하세요!”

서호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드디어 된 것이다.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계속 실패를 해서 걱정됐었다.

정말 재능이 없을까 봐. 괜히 로제타의 힘을 빼앗기만 한 것일까 봐. 계속 걱정하고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드디어 진전이 생긴 것이다. 별것 아닌 성공이라도 이게 그렇게 마음이 놓였다. 맘껏 푸티와 기쁨을 나누던 서호가 환하게 웃으며 아리스에게 물었다.

“복제 마법은 살아 있는 생명체도 똑같이 복제하나요?”

아까 진짜 생명을 가진 씨앗이 뭐겠냐고 묻기에 살아 있는 것들은 복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씨앗 전부에 이렇게 새싹이 피어난 걸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식물이랑 동물은 다른 건가? 동물도 다 이렇게 복제되는 거면 좀 무서울 것 같은데….’

하지만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명이 있는 건 똑같이 복제해도 속이 비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건 뭘까. 서호가 테이블 위를 바라보다가 유일하게 홀로 싹이 돋지 않은 씨앗으로 눈을 돌렸다.

한쪽으로 빼둔 씨앗.

“이건 내가 아니라고 했던 거네요? 이것만 복제된 건가요? 나머지는 뭐예요?”

아리스가 싹이 돋지 않은 씨앗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사실 제가 쓴 마법은 물건을 가져오는 마법이었어요. 이동마법의 한 종류죠.”

“네?”

“여기 있는 건 다들 진짜 씨앗이었습니다. 이 주머니에 있던 거죠.”

서호는 아리스가 보여주는 텅 빈 주머니를 바라봤다.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손에 있는 이 씨앗은 서호님이 가지고 있던 씨앗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씨앗이요?”

서호가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씨앗이 가짜라는 소린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씨앗이 텅 빈 겁니다. 모든 씨앗이 다 발아하지는 않으니까요.”

“아.”

아리스가 혀를 차며 비난하듯 물었다.

“씨앗이 비어 있던 겁니다. 씨앗을 누가 준 겁니까?”

기억을 더듬던 서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로제타가….”

“아무래도 폐하께서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잘됐죠? 다행입니다.”

로제타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서호는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조그맣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던 웃음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서호는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하고 어이없고 동시에 너무 웃겼다. 도대체 지난 며칠간 뭘 한 건지.

한참 웃던 서호가 아리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리스는 짐작하고 있었나 봐요? 씨앗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걸요.”

아리스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식물에서 꽃을 피우시는 건 되는데 여태껏 씨앗을 발아시키지 못하셨다니, 믿을 수가 있어야죠.”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덕분에 문제는 해결됐다. 서호가 허탈하게 웃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아리스가 서호의 옆에 서 있는 푸티를 눈짓하며 말했다.

“푸티가 서호님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푸티. 정말 고마워요. 푸티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네요.”

서호도 푸티가 얼마나 그를 신경 썼는지 알았다. 서호가 진심을 담아 인사하자 푸티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까요?”

서호의 물음에 푸티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제 일을 했을 뿐인걸요.”

“모든 사용인이 푸티같이 섬세하고 사려 깊지는 않을 거예요.”

푸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푸티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던 아리스가 물었다.

“서로 감사 인사는 할 만큼 했으니까 다시 수업할까요? 아니면 오늘은 정말 쉴까요?”

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기분이 가라앉아 공부를 못했다면 지금은 너무 기뻐서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로 쉬어요, 아리스.”

아리스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늘은 돈을 날로 먹는 날이군요.”

서호가 조심스럽게 푸티에게 물었다.

“로제타는 황제니까 부자죠? 그러니까 하루쯤은 괜찮을 거예요.”

답은 푸티가 아니라 아리스에게서 돌아왔다.

“네, 황제 폐하께선 제국에서 가장 부자이시니 자주 이러셔도 됩니다.”

그러자 푸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스님! 그래도 자주 이러시는 건 안 됩니다!”

“이런. 푸티가 반대하는군요.”

푸티가 종알거리며 잔소리를 시작하자 아리스가 그런 푸티를 놀리듯 말을 툭툭 내뱉었다.

서호가 그런 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음 졸이던 일이 잘 해결돼서 모든 게 다 즐겁고 기뻤다. 서호는 테이블 위 새싹 하나를 챙겨 들며 입꼬리를 말았다.

로제타가 오면 해줄 말이 생겼다.

‘기뻐하겠지?’

요새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드디어 진전이 생겼으니 이 새싹을 보여주면 분명 반짝거리게 웃어줄 것이다.

웃는 로제타를 상상하는 서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아졌다.

***

로제타는 그의 방으로 향하면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호의 어두운 얼굴을 생각하자 절로 마음이 아려왔다.

‘도대체 왜 서호에게 신력을 준 거지?’

싫다 싫다 했더니 정말 더 싫어졌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서호가 그토록 노력하는데 도대체 왜 진전이 없을까.

‘혹 신이 무슨 수를 쓴 것 아닌가? 그래서 서호가….’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로제타는 신이 아무런 대가 없이 서호에게 그 능력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어쩌다 보니 서호와 관련해 신에게 도움을 받은 것만은 확실했으나 그럼에도 로제타는 신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이런 로제타의 태도가 신녀 안겔을 비롯한 몇몇 신자들에게 좋지 않게 보인다는 건 그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믿음과 사랑은 강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제타에게 신은 지루하지만 잔잔하던 로제타의 삶을 시끄럽고 귀찮게 만든 이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사실 로제타는 서호가 그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보다 기가 죽는 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깟 힘이 뭐라고.’

로제타는 서호가 푹푹 한숨을 쉬는 소리에 이른 아침 은근슬쩍 방을 빠져나왔다. 괜히 또 옆에 붙어 있었다가 서호가 화를 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서호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니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랐다. 로제타는 미움을 받을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로제타는 방 앞에 멈춰 서서 다짐했다.

‘조금 쉬자고 이야기해 보자.’

더 이상 서호가 고생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쉬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요새 내게 관심도 주지 않아.’

슬슬 서운함이 생기고 있던 차였다. 서호를 걱정하는 마음과 비교하면 한 톨도 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감정이긴 했지만.

물론 로제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 이런 생각들을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어떻게 해야 서호가 오해하지 않게 말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선 로제타를 반기는 건 요 며칠 보이던 우울한 낯의 서호가 아니었다.

“이것 봐요! 로제타!”

로제타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이야기를 시작한 서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서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드디어 씨앗이 변했어요, 사실 이거 하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로제타는 서호의 손에 들린 새싹을 바라봤다.

씨앗이 변했다. 드디어.

씨앗에서 막 나온 것처럼 보이는 새싹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호가 눈을 휘며 로제타의 손을 붙잡아왔다.

“빨리요.”

로제타는 서호를 돌아봤다가 그 웃음에 홀려 서호에게 이끌리듯 테이블로 다가갔다.

로제타가 주춤거리며 테이블 앞에 멈춰 서자 서호가 자랑하듯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물이 촉촉하게 묻은 씨앗들이 가득했다.

방금 서호가 보여준 것과 비슷한 정도의 성장을 보이는 새싹들이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엄청 많죠? 내일부터는 얘네들을 키워 보려고요.”

서호가 활기차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새싹을 키울 건지 그의 계획을 하나둘 이야기했다. 로제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재잘거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손이 간질거렸다. 당장이라도 서호를 껴안고 저 재잘거리는 입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참아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호에게 붙잡힌 손에 힘을 주려던 순간 그가 로제타를 힐끗 돌아보더니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로제타, 로제타가 준 씨앗이 속이 텅 비어 있었던 거 알아요?”

“…뭐?”

로제타가 눈을 깜빡였다. 속이 비어 있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리스 덕에 알아차린 건데, 씨앗이 원래 발아할 수 없는 거였대요. 솔직히 처음 그 이야기 들었을 때 진짜 황당했어요.”

로제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원래 자라날 수 없던 거였다고?”

서호가 로제타의 눈치를 보듯 그의 얼굴을 살피며 답했다.

“네.”

하지만 로제타는 그런 서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제타는 지금 스스로의 실수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서호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기죽어 있었던 것이 전부 자신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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