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좀 그렇겠네.’
아리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셔?”
“걱정은 하시는데 서호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세요.”
그래도 황제가 닦달하거나 답답해하는 스타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리스는 안도했다.
‘괜히 사이가 멀어지면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이니까.’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스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푸티가 물었다.
“뭐예요?”
“혹시 말이야.”
“네?”
잠시 망설이던 아리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가정이 틀렸다면 경을 칠지도 몰랐다.
“그 씨앗…. 아니, 아니야.”
푸티가 아리스를 닦달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어서 말을 하라는 강요가 가득한 그 표정에 아리스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씨앗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네?”
푸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안 그래도 순한 인상이 더 어벙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슬쩍 미소가 나왔으나 아리스는 애써 미소를 숨기며 말을 이었다.
“꽃은 잘 피우시고, 그렇게 노력하는데 아직도 씨앗을 발아시키지 못하다니.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씨앗을 발아하는 게 잘 안 되어 다시 꽃을 피우는 일은 몇 번 더 시도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다 성공했고.
그런데 아직도 씨앗은 불가능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아리스의 지적에 푸티가 혹한 얼굴을 했다.
“혹시 모르니까 확인 좀 해볼까? 다른 씨앗을 하나 구해와 봐.”
아리스의 제안에 푸티가 고민에 빠지자 아리스가 걱정 말라는 듯 덧붙였다.
“내가 자연스럽게 권유해 볼게.”
혹여 실패해도 서호가 기분이 상하지 않게 상황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주실래요?”
“그래.”
“감사해요. 아리스님. 그럼 제가 빨리 다녀올게요.”
“그래.”
아리스는 시간을 확인하며 멀어지는 푸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로제타에게 그렇듯 서호에게도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게 된 푸티는 서호의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가정 덕인지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리스는 쫄랑거리며 사라지는 푸티의 뒷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역시 무섭지는 않지.’
‘황제의 유일한 직속 시종’, ‘차기 시종장’, ‘무서운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을 아무리 들어도 아리스에게 푸티는 그냥 조금 방정맞고 충성스러운 시종일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귀여운 것도 같고.’
복도에 아리스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씨앗을 노려보듯 쳐다보던 서호는 그를 쳐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힘을 준 상태 그대로 눈을 돌렸는지 눈이 마주친 푸티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서호가 재빨리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데 왜요?”
그러자 푸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호님, 아리스님이 오셨는데, 수업을 시작할까요?”
“아.”
서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리스에게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서호는 그의 눈치를 살피는 푸티에 미안해졌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됐다. 서호가 지내는 이 방은 로제타와 함께 쓰는 방이기에 푸티 역시 대부분 이 방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호가 미처 숨기지 못한 불안을 로제타와 푸티 역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쉬게 되고 모든 일을 뒤로 미뤄두고 연습만 계속하게 됐다. 그럼에도 진전이 없어서 사실 서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정말 재능이 없나 봐.’
누가 봐도 열심히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되니 이제는 재능이 없다는 걸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아니면 노력하는 방향이 잘못된 걸까?’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서호는 한숨을 삼켜내며 웃어 보였다. 푸티가 있는데 또다시 이쪽으로 생각이 새고 말았다.
서호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고 푸티의 질문에 답했다.
“그래요, 수업을 시작해요.”
푸티가 그의 눈치를 보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잠시 다른 일을 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푸티가 곧바로 아리스를 불러왔다. 서호는 방으로 들어서는 아리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나요?”
이미 약속된 시간을 한참 지나 있었다. 아리스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오늘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을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기에 서호는 그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물었다.
“오늘은 뭘 한다고 했죠?”
사실 이번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 많았다. 아리스가 서호의 얼굴을 살피다 답했다.
“오늘은 조금 쉴까요?”
“네?”
서호가 놀라 아리스를 바라보는데 그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오늘은 공부보다는 이쪽 세계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요?”
계속되는 배려에 서호가 눈을 깜빡였다. 평소라면 이런 배려를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호는 아리스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공부한다고 우겨 봤자 오늘은 머리에 내용이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만큼 가르치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것도 없었다.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순간 곤란해하던 로제타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서호는 재빨리 그 생각을 지우고 답했다.
“그럴까요?”
서호의 긍정에 아리스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호님의 세계에는 마법이 없다고 하셨죠?”
“맞아요.”
“그럼 오늘은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다행히 아리스가 꺼낸 이야기는 서호도 흥미가 많은 이야기였다. 신력을 가지게 되면서 이런 비현실적인 것들에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물론 아직 서호가 신력을 잘 다루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리스가 꺼낸 주제가 관심 있는 화제인 덕분에 서호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리스는 마법을 쓰는 데 필요한 마력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마법사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마법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는지 체계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법의 종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스가 테이블 위 한쪽에 놓인 씨앗을 가리키며 물었다.
“잠시 이 씨앗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씨앗요?”
서호가 요 며칠 계속 들고 다니던 씨앗이었다. 지난 며칠간 반응도 없던 씨앗.
아리스는 서호가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곧바로 씨앗을 집어 들었다. 서호가 눈을 크게 뜨고 아리스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어?”
아리스가 테이블 가득 늘어난 씨앗을 가리키며 말했다.
“복제 마법입니다. 이 중에 진짜 씨앗은 저만 알아볼 수 있죠.”
아리스가 씨앗을 돌려주지 않을 리가 없었기에 서호는 별말 없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데요?”
일단 맨눈으로 볼 때는 모두가 다 똑같아 보였다.
“제 마력이 느껴지니까요. 서호님, 맞춰 보실래요? 만약 진짜가 뭔지 알아차리실 수 있다면 마법을 배워 보셔도 좋을 겁니다.”
마법을 배우다니, 신력에도 재능이 없는데 마법에는 재능이 있을까? 서호가 쓰게 웃으며 물었다.
“방금 마력을 느끼는 이가 매우 적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네, 아주 드문 확률이죠. 하지만 신력을 다루는 건 마법사가 되기보다 더 어려운걸요.”
아리스가 테이블을 눈짓했다.
“자, 재미 삼아 하는 거니까요. 한번 맞춰 보세요.”
크게 기대하지 않는 그 태도에 서호는 편안한 마음으로 테이블 위 씨앗들을 쳐다봤다.
“음….”
아리스가 장난스레 말했다.
“느껴 보세요. 진짜 씨앗이 뭘까요? 어느 씨앗이 생명을 가진 진짜일까요?”
“다 비슷해 보이는데.”
서호의 말에 아리스가 씨앗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손에 쥐어 보셔도 좋습니다.”
서호는 아리스가 쥐여 주는 씨앗을 시작으로 하나둘 씨앗을 만져 봤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골라냈다.
“일단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재밌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흥미 가득한 얼굴에 마음이 더 편해졌다. 정말 장난 같았다. 서호가 대충 답했다.
“그냥,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딱히 이유 따위가 없기도 했다. 그냥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건 어떻습니까?”
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 비슷해요. 다들 진짜 씨앗 같아요. 금방이라도 풀잎이 돋을 것 같은….”
그렇게 말하던 서호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무언가가 갑자기 몸 밖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이 테이블 위 씨앗들에게로 향했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새싹이 돋아난 씨앗이 있었다. 서호가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먼저 푸티가 목소리를 높였다.
“와, 서호님!”
푸티의 부름에 서호가 푸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공했다.”
아리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푸티가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멍하니 있던 서호가 정신을 차리고 푸티를 붙잡으며 외쳤다.
“성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