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46화 (46/155)

#46

하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문.

“그거 들었어? 맙소사, 폐하께 연인이 생기셨다고 하던데?”

“그냥 연인도 아니고, 신이 내려준 연인이래!”

“와, 역시 폐하는 뭔가 다르구나.”

“그냥 연인도 아니고 운명이라고 들었어.”

“우리 폐하는 정말 언제나 대단하시구나.”

또 다른 하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날개가 달렸다던데.”

“어?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어.”

“나도!”

이렇게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것은 황제가 서호의 존재를 알리면서도 그 신상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황제궁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서호의 생김새를 아는 이도 없으니.’

입이 가벼웠던 황궁 마법사들도 서호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이 없으니 뒤에서 말이 새어 나가지 않았다.

아리스는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저들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으며 비웃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계속 반복되니 이제는 딱히 재미도 없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사용인들을 지나치고 또다시 다른 무리의 사용인을 마주친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운명이 사내라는 말이 있던데.”

“아. 그럼….”

“자식을 볼 수 없으시다는 거 아니야?”

“첩을 들이시지 않을까?”

“우리 폐하가?”

“그건 좀….”

“그런데 너희들 중에 그 운명의 짝이라는 사람을 본 사람이 있어?”

“글쎄. 아, 이름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지?”

“야, 이름이라니. 존함이라고 해.”

“하긴, 폐하의 짝이면 곧 황후 폐하가 되실 테니까.”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서호를 매우 아꼈고 그 모습을 보자니 서호가 황후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 같았으니까.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어. 황제궁 사람 중에는 아는 이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함구하라고 하셨다던데?”

“그런데 정말 우리 중에 그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니면 주변이라도?”

“폐하께서 아까워서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하신대. 사용인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 그분을 봤다고 하더라.”

“그래도 봤다는 사람이 있긴 하네.”

“그건 왜 물어?”

“…혹 상상 속 인물일까 봐.”

그 말에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한 사용인이 으스대며 말했다.

“나 황궁 마법사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들었어. 왜, 그때 폐하의 궁에서 한참 안 좋은 소문 들릴 때 말이야.”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너무 대놓고 하는 것 아닌가.

아까도 말했지만 아리스도 폐하의 명을 무시하고 서호에 관한 이야기를 나불거리던 마법사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황궁 마법사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황제의 명령을 받는 이였으나 모든 이들이 푸티처럼 충성심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아리스는 동료 중 누군가가 서호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이야기를 푸티에게 전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펄펄 날뛸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푸티는 매우 덤덤했다.

‘비밀이 완벽히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넘어갈 생각이야?’

‘아니요. 알게 된 이상 그건 안 되죠. 이름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대화 다음 날, 그 황궁 마법사가 직위를 박탈당한 걸 알게 된 아리스는 새삼스럽게 푸티가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제의 유일한 직속 시종이자 차기 시종장이라고 불리는 이.

당연히 가진 힘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헐렁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매우 단호한 결단력 역시 돋보였다.

그렇게 아리스가 푸티에 관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용인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아, 그때?”

“응, 그때 나만 알고 있으라고 알려 줬었는데 그때 운명이라는 분이 온 거래.”

“진짜?”

“그때는 운명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는데 아무튼 그분이 오시고 나서 울음소리가 멈춘 거래.”

“어떤 분이실까?”

“글쎄. 자세히 알려면 푸티님에게 가야 할걸.”

이야기의 끝에 자연스럽게 푸티의 이름이 등장했다. 골목 모퉁이를 지나 자리를 벗어나려던 아리스는 저들에게서 들려오는 푸티의 이름에 자리에 멈춰 섰다.

그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푸티?”

“폐하께서 푸티님에게 그분에 관한 모든 일을 위임하셨대.”

“정말 시종장이 되실 것 같네.”

“아무래도 그렇지? 이건 또 소문인데 그분께서도 푸티님을 엄청나게 믿는다고 하더라.”

“진짜 잘 보여야겠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금보다도 더 신경 써야 할걸.”

“안 그래도 권력이 큰데. 이렇게 집중돼도 괜찮은가?”

“뭐, 패악을 부리는 분은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분은 한 번씩 너무 무섭단 말이야.”

한 사용인의 말에 아리스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푸티가?’

무섭다니, 아리스는 푸티의 순한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푸티가 가진 권력이 대단한 것만은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푸티는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귀엽지 않나?’

킬킬 웃으며 뚱한 얼굴의 푸티를 떠올리던 아리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약속된 시각이 다 되어 갔다. 저번 수업에 일 분 늦은 일로 수업이 끝난 뒤, 푸티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던가.

‘그냥 신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에 짜증이 나 있었던 것 같지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리스가 재빨리 황제궁으로 들어섰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용인들에게 마주 인사를 하며 서호가 머무는 황제의 방으로 향하던 아리스는 문 앞에 서 있는 푸티를 발견하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왜 나와 있어?”

푸티의 위치를 깨닫고 난 뒤, 반말을 고쳐야 하나 생각해 봤지만 이제 와서 말을 높이는 게 더 우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아리스는 여전히 푸티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푸티 역시 처음에는 매우 불쾌해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푸티?”

그때 갑자기 푸티가 아리스의 손목을 붙들고 문과 멀어졌다.

인사도 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를 잡아끄는 푸티에 아리스는 순순히 그를 따라 방에서 멀어졌다. 적당히 방과 거리가 떨어지자 푸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리스를 불렀다.

“아리스님.”

그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 방금 들었던 사용인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푸티가 무섭다던 그 대화.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푸티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뭔가요? 그 기분 나쁜 웃음은.”

확실히 이건 조금 무례했다.

“아, 미안. 내가 웃긴 소리를…. 풉.”

하지만 저 날카로운 눈을 보고 있자니 다시 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리스가 재빨리 입을 가렸다.

아리스는 눈을 치뜬 푸티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웃긴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생각나서…, 정말 미안.”

아리스가 손을 모으고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네자 푸티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원래 이상하신 분이니까. 오늘은 들어가시기 전에 주의하실 게 있어서요.”

“응?”

“서호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으세요.”

푸티의 말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분이 좋지 않다니?

“응? 왜?”

도대체 서호가 기분이 나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 기분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다만, 그렇게 만든 이가 누구일지가 궁금했다.

황제의 비호를 받는 서호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이가 누구인가. 흥미가 돋았다. 아리스가 눈을 반짝 빛내는데 푸티가 신경질적으로 아리스를 노려봤다.

“왜 좋아하시는 것 같죠?”

푸티의 지적에 아리스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표정을 관리했다.

“좋아하다니? 아니야. 절대. 아니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던 푸티가 말을 이었다.

“신력에 관한 이야기는 저번에 들으셨죠?”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안겔이 돌아간 다음 날, 수업 때문에 서호를 만났던 아리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멍이 들었던 서호의 발목에 치유마법을 사용했었다.

‘효과는 전혀 없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리가 이렇게 된 건지 의아해하던 아리스는 갑작스러운 신력의 발현과 함께 서호가 꾼 꿈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신력을 알게 됐다.

그리고 치유마법은 효과가 없지만 신력은 발목의 멍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신력에 치유의 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점점 더 아는 게 많아지네.’

권력의 중추에 가까워지는 게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곤란하던 참이었다. 아리스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아직 폐하께서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으시니.’

미리 이쪽에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아리스는 지금 당장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서호가 신력을 가지게 됐고 그로 인해 훈련 중이라는 것에만 신경 쓰는 것이다.

“진전이 거의 없으셔서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푸티의 말에 상념을 지운 아리스는 지난번 수업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씨앗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진전이 없어? 아직도 씨앗?”

“네.”

저번 수업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서호가 씨앗을 받은 지는 일주일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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