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프레이가 어린 시절 안겔에게 그러던 것처럼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황제를 견제하고 신경 쓰는 것처럼 그대를 신경 쓰는 이 역시 적지 않음을 기억해.”
안겔이 비꼬듯 말했다.
“당신처럼 말이죠.”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안겔의 말에도 프레이는 흔들림이 없었다.
안겔은 프레이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저 모든 이들에게 이처럼 굴었다.
무심한 얼굴과 말투와 달리 다정한 행동과 적당한 예의.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보이는 그 선이, 교육된 다정함이 안겔을 비참하게 했고 분노하게 했다.
“그래, 나처럼.”
감정 없는 긍정처럼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었다. 안겔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제게 신경 쓰는 것보다는 아버지에게 신경 쓰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아버지를 신경 쓰기에 그대에게 신경 쓰는 거겠지. 아버지는 그대의 행동을 좋아하시지 않을 테니.”
안겔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감히!”
그러니까 프레이는 안겔이 하는 짓이 아버지에게 반하는 행동이라고 그녀를 꾸짖는 것이다. 프레이가 고개만 들어 안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 할 말이군. 감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이를 건드리지 말게. 그리 소중히 여기는 신녀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씩씩거리며 프레이를 바라보던 안겔은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해야 했다.
신전에서 프레이와 싸워 좋을 것은 없었다. 그녀는 차기 교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도는 사람이었고 신전에서 감히 프레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신녀라고 해도 프레이와 완전히 척을 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고는 해야 했다. 안겔이 억지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앞으로는 예의를 갖추며 지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프레이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러지.”
안겔은 여전히 변화 없는 그 태도에 말을 정정했다.
“제 말은. 제 위치에 알맞은 대우를 하라는 소리예요.”
안겔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을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안겔이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일단 신녀는 고위 신관과 같은 선상이니, 원한다면 그대가 내게 말을 놓으면 되겠군.”
안겔이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는데 프레이가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테지? 그대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이니까.”
그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꼭 그녀를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프레이의 태도가 너무 싫었다.
안겔은 몸을 휙 돌렸다. 거칠게 문을 여는 안겔의 뒤에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녀 안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속세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신을 모시는 일에 열중하게.”
안겔은 그 말을 무시했다.
프레이의 경고를 들을 필요는 전혀 없었으며 이미 일은 시작된 후였다. 그러니 이제 와 돌이킬 수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오만하고 언제나 여유롭던, 관심 없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며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는 곧 진창을 구를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테니.’
분노를 담아 발을 내디디던 안겔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며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안겔이 그토록 로제타를 싫어하던 이유는, 그의 절망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건.
‘두 사람이 닮아서야.’
처음 건국 무도회 연회장에서 그를 봤을 때 프레이를 닮은 외향에 이끌리듯 다가갔다가 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찬란한 금발, 아름다운 얼굴, 그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대단하신 황녀님.
그게 프레이와 너무 닮아서.
그리고 신에게 이름을 받음과 동시에 황자였다는 게 밝혀진 그에게 다가갔다가 알게 된 성격까지.
모든 게 프레이와 똑같은 그 사람이 안겔은 너무나 싫었다.
‘그래, 그래서….’
안겔은 이를 악물었다. 프레이에게 매달리던, 반짝거리며 빛나던 사람을 동경하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안겔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던 안겔은 이내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프레이와 황제를 동일시하는 게 뭐 어때서? 똑같은 사람들이야.’
황제를 무너트려 프레이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족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안겔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프레이와의 대화 이후 다시 도서관을 찾아온 안겔은 아직도 도서관에 남아 있는 루트의 모습에 날카롭게 물었다.
“돌아가지 않았나요?”
루트가 들고 있던 책을 선반에 꽂아 넣으며 답했다.
“이제 곧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정리가 끝났으니까요.”
안겔이 방금 그녀가 들어왔던 문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나가 봐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음에도 루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먼지가 묻은 옷을 털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안겔을 지나쳐 도서관을 나설 거라고 생각했던 루트가 안겔의 앞에 멈춰 서서 무언가를 건넸다.
“그전에 이걸 드려야겠습니다.”
“그게 뭐죠?”
“황실에서 온 편지입니다.”
편지라니, 설마 이곳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독촉하는 것인가?
프레이와의 대화로 얄팍해져 있던 가면이 완전히 깨졌다. 안겔이 화풀이를 하듯 물었다.
“그 편지를 왜 당신이 가져왔지?”
“편지를 가지고 있던 신관이 프레이 신관과 신녀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기에 제가 챙겼습니다.”
그 말에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처럼 벌어지던 입술이 닫혔다. 만약 다른 이가 프레이와 자신의 대화를 들었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감사 인사를 표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제넘네.”
여전히 차가운 안겔의 태도에도 루트는 태연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이만 가 봐.”
루트가 자리를 떠나고 도서관에 적막이 감돌자 안겔이 봉투를 찢듯이 열었다.
편지가 거친 손속에 반쯤 찢어졌지만 안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애가 쓴 듯, 조금 삐뚤거리는 글씨를 마주하고는 헛숨을 삼켰다.
“이게….”
[안녕하세요. 안겔님.
이서호입니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셨나요? 부디 제 편지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사실 제가 글공부를 하는 중이에요. 글을 배운 김에 제가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저희 때문에 더 힘들어지시는 게 아닐지 걱정되네요.
그래도 도움을 청할 곳은 안겔님뿐이라 잘 부탁드린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편지가 길어지면 볼품없는 실력이 더 드러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다음에는 웃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글씨가 조금 어색하죠? 본래 제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하네요.]
이방인이, 서호가 보낸 편지였다. 마지막에 붙은 추신에 입꼬리가 살짝 떨리던 것도 잠시, 안겔은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걸 나한테 왜….”
안겔이 편지를 다시 훑었다.
“웃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빈다고.”
분명 마지막 만남 때문에 보낸 편지일 것이다. 그때의 굴욕과 분노.
자연스레 손안에 힘이 들어가자 안 그래도 반쯤 찢어졌던 편지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이따위 편지로, 왜 보낸 것인지 이리 티가 나는 편지로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편지를 집어던지기 위해 손을 들었던 안겔은 결국 품 안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황실의 편지를 땅바닥에 버렸다는 게 밝혀지면 곤란해지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프레이와 겹쳐 보이는 황제의 얼굴과 이방인의 맑은 눈을 지워내며 합리화를 마친 안겔이 숨을 가다듬고 서가로 들어섰다.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더 거지 같은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일에 집중해야 했다.
안겔이 거친 손길로 방금 루트가 정리했을 책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엉망으로 땅에 떨어지는 책을 모른 척한 안겔은 손에 들린 책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안겔을 멀리서 쳐다보고 있었다.
***
“그래, 그분께서….”
아리스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물론 아리스가 그 대화를 못 들은 척한다고 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서호와의 네 번째 수업을 위해 황제의 궁으로 가는 길.
며칠 전, 황제가 서호의 존재를 알리면서 수면 아래에서 쉬쉬하고 있던 그에 대한 소문이 황궁 전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굳이 아리스가 비밀이 아니라 수면 아래라고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와 함께 일하는 황궁 마법사 중 몇몇 사람이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이미 서호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구령 때문에 여태까지 서호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지만, 황제가 서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니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낭설로 여겨지던 소문이 실제로 확인되면서 서호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둘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