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44화 (44/155)

#44

안겔이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자리.

혼자 남은 루트가 촛대를 벽에 걸고 안겔이 서 있던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연두색 눈이 비어 있는 자리를 되짚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마구잡이로 떨어져 있는 책이었다. 제목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많았으나 루트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하나하나 자리에 끼워 넣었다.

“음, 이건 이쪽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 책을 책장에 집어넣은 루트가 무심한 눈으로 안겔이 떠난 자리를 한번 바라봤다가 다시 촛대를 챙겨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서관을 떠났다.

사람이 사라져 다시 고요해진 도서관의 책장 속 책들은 안겔이 헤집기 전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

안겔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마주 인사를 해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유가 별로 없었다. 황궁으로 가 있는 동안 밀렸던 일들이 많아서 안 그래도 바쁜 일정이 더욱 정신없어졌다.

‘도대체 놀고먹는 것 말고 하는 게 뭐야?’

젊은 신관들은 이리 부려 먹으면서 장로들은 유유자적 명령이나 내리고 놀고먹는 게 꼴사나웠다.

‘귀족 출신이라 이거지.’

그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필요한 업무에 안겔을 밀어 넣는 것은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귀찮고 힘들지만 신전의 위상을 위해 안겔은 마다하지 않고 나서 왔고. 그러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일을 하나도 처리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는 것들.’

하지만 그들의 앞에서는 이 못마땅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타락한 신관들답게 성력은 볼품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귀족 출신이었고 신전의 고위층은 오래전부터 귀족 출신들에 의해 꽉 잡혀 있는 상태였으니까.

“쯧.”

물론 안겔이 신녀가 되면서 평민 출신 신관들의 처우도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귀족 출신 신관들과 겨룰 바는 되지 못했다.

‘축적된 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의지가 없는 자들도 있고.’

안겔은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조금 더 서둘러 걸어가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귀족 출신이라고 다 평민을 멸시하지 않는 것처럼 평민 출신 신관이라고 다 앞날을 개척하려 성실하게 노력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루트였던가?’

전날 만났던 사내였다. 딱히 출세에는 관심 없어 보이지만 성력만큼은 볼만했던 고위 신관. 나른한 얼굴의 루트는 아마 도서관에 가는 것 같았다.

안겔이 가려고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겔이 성큼성큼 걸어가 루트를 따라잡으며 물었다.

“또 도서관에 가는 건가요?”

전날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썼던 것과 달리 보는 눈이 많으니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루트의 눈은 나른한 게 아니라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루트는 고개를 돌려 안겔을 바라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아, 신녀님.”

안겔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루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놀고 싶어서 그 업무를 맡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높으신 분이 도서관에 들르시니 이제 저도 제 일을 해야죠. 경을 치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도서관으로 가는 건 안겔이 도서관에 다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불편한데.’

이 사내가 다른 일반 신관들이나 평민 출신 신관들처럼 안겔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었고, 딱히 안겔에게 커다란 관심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쨌든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괜히 윗선에 내가 뭘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올라가면.’

안겔이 완만하게 거부 의사를 표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루트가 전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하지만 제 일입니다.”

거부 의사를 읽지 못한 건지, 거부 의사를 읽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태연한 얼굴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가장 커 보였지만.

“나는 누가 옆에 있는 게 더 불편….”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 안겔을 불렀다.

“안겔.”

익숙한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린 안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으나 그건 잠깐이었다. 안겔은 누가 눈치챌 새도 없이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미소를 머금었다.

“프레이.”

귀족 출신 고위 신관 프레이였다.

안겔이 신녀가 되기 전에는 친한 사이였으나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

‘아니, 사실 애당초 친한 적도 없었지.’

사이가 멀어졌다 해도 같은 고위 신관이기는 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인사를 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안겔이 미심쩍은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부를 이유가 있나?”

무심한 얼굴과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말투는 참 여전했다.

“…알겠어요.”

안겔은 걸음을 옮기기 전 그녀가 붙잡고 있었던 루트를 돌아보며 대충 인사했다.

“그럼.”

“네, 신녀님.”

루트와 도서관을 뒤로하고 안겔은 프레이의 개인 방으로 향했다.

신녀인 안겔의 방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꾸며진 방을 훑은 안겔은 프레이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어쩐 일이죠?”

이미 멀어진 사이에 서로의 안부를 묻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테니 빨리 이야기나 듣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조급한 안겔과 달리 프레이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찻잔에 차를 직접 따르며 말을 시작했다.

“황궁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지만 그 여유로운 태도와 물 흐르는 자연스러운 행동과는 달리 그녀의 말투는 고압적이었다. 그녀가 한 말 역시.

안겔이 표정 관리를 하며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자 프레이가 잘 알지 않냐는 듯 고아하게 안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있을 텐데. 내게 알음알음 소식이 들려오는 건 늘 있는 일이니까.”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프레이.

한때 공작가의 영애였던 사람. 그 신분 덕에 견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일반 신관은 거치지도 않고 이르게 고위 신관이 됐으나 신관 중 그녀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분만큼이나 성력 역시 대단했으니까.

물론 프레이가 지금처럼 장로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데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치가 된 것은 그녀의 대단한 성력 덕이 아니라 그녀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말이 모두가 평등한 신전이지 이곳도 신분제가 있는 것은 똑같으니.’

아무리 신전으로 들어오며 귀족 신분을 버렸다고 하지만 한때 공작가의 영애였고 지금도 귀족들과 연이 깊게 닿아 있는 그녀를 신전 사람들은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특히 위쪽 분들은 더더욱.

‘불가침 영역이라고 했던가? 웃기지도 않아.’

프레이는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귀족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다. 안겔이 조금은 날카롭게 답했다.

“신전 소속이신데, 속세와 너무 연이 닿아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되는군요.”

그러자 프레이가 건조하게 답했다.

“그대만 할까.”

비꼬면서도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태도가 거슬렸다. 안겔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프레이가 먼저 찻잔을 내려놓고 안겔을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했다.

“황제를 건드리지 말게.”

안겔이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건드리다니요.”

그러자 프레이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혀를 찼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걸 필요가 있나?”

안겔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언제나 가르치려고 하는 저 말투가, 신녀인 안겔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저 태도가 거슬렸다.

“치기 어린 선택 때문에 모든 걸 잃을 건가?”

그래서 안겔은 프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납게 대꾸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대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위치인가요?”

안겔은 프레이에게 가르침을 받는 일반 신관이 아니라 신녀였다. 안겔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프레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 윗선에 이야기해도 되겠나?”

협박하듯 돌아온 답에 안겔은 당당하게 말했다.

“네, 따로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이는데요.”

차라리 윗선에 한 소리를 듣고 말지 이 여자 앞에서 기가 죽는 건 싫었다. 고의로 황제에게 피해를 주려 했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큰 벌을 받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다만, 안겔.”

안겔은 눈에 힘을 주고 프레이를 바라봤다. 귀족 영애인 프레이를 동경하고 신경 쓰던 시절은 지났다.

찬란한 금발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똑같은 신관복을 입었음에도 언제나 고급스럽고 우아했던 소녀.

지금 안겔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든 모습의 바탕이 되는 여자.

성인이 되었음에도, 그리고 신전에 머문 지 오래됐어도 여자는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로지 안겔만이 변했다.

반짝거리는 아름답던 소녀에게 이끌려 그녀를 선망하던 어린 시절. 그녀와 제일 친한 이가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안겔은 재빨리 그 시절의 모습을 지워냈다.

보잘것없던 고아 출신의 일반 신관은 이제 프레이보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 신녀가 됐고 더 이상 프레이에게 꿀릴 것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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