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어두운 서고, 안겔은 처음 거울에 관한 책을 찾았던 이곳을 헤매고 있었다.
‘어디에….’
늦은 밤,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안겔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신전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양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신과 관련된 책이었으며 밖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전혀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안겔이 있는 곳은 그중에서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었다.
‘기록이 없을 수도 있어.’
신전의 도서관 중 가장 구석진 곳에 존재하는 도서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제목이 제대로 적혀 있지 않거나 제대로 내용이 해석되지 않은 것들, 또는 중간중간 내용이 빈 것. 책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메모나 낙서들이 모여 있는 곳.
간혹 이런 볼품없는 것들 중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곤 했기에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 누구도 나서서 이것들을 정리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내용이 발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니 굳이 고생하고 싶어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지.’
처음 그녀가 이곳에서 거울과 관련된 책을 찾았던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던 서고에서 무심결에 꺼내 들었던 책이 신전 창고에 있는 거울과 관련된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안겔은 로제타를 떠올렸다.
‘왜 그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권의 책을 하나로 엮어 두었기에 그게 거울에 관한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가능성도 있어.’
문제는 혼자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점이다. 안겔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해결될 텐데.’
기록대로라면 시간이 흐르면 안겔이 나서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일이 정리될 가능성이 컸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던 안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겔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그냥 넘겼다가 안겔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안 돼.’
도대체 왜 로제타 보레알리스가 이렇게까지 싫은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안겔은 다시 손에 힘을 줬다.
황제가 확실하게 망가진다는 확신을 얻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결말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래. 꿈이 정말 이방인을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데 영향을 미치는지만 확인하면 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찾아보자.’
안겔은 감기려는 눈에 힘을 줬다. 신전의 대외적인 일은 대부분 신녀인 안겔이 맡고 있었고 때문에 그녀는 로제타에게만 신경 쓸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안겔에게 남은 시간은 늦은 밤뿐이었다.
안겔이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손을 뻗다가 손에 들려 있던 촛대를 놓쳤다.
‘아!’
안겔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 짧은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안겔을 스쳤다.
‘이걸 이곳에 떨어트리면….’
안겔은 빠르게 발밑을 훑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살폈던 책들이 바닥 아래 깔려 있었다.
‘순식간에 불이 번질 거야.’
그러면 황제와의 일을 윗선에 숨길 수 없을 테고 아직 살피지 못한 책들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안겔은 재빨리 성력을 끌어올렸다. 성력으로 불을 막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안겔이 성력을 끌어올리려는데 그보다 먼저 다른 성력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안겔은 빠르게 목 아래까지 들이닥친 꽤 청량한 성력의 주인을 바라봤다.
‘누구지?’
작은 촛불을 든 한 사내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안겔의 앞에 멈춰 섰다. 안겔은 사내가 들고 있는 흔들리는 촛불에 의지해 그 얼굴을 살폈다.
색이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반대로 조금 짙은 피부를 가진 사내. 사내의 건조하던 연두색 눈이 안겔을 담고 둥글게 휘었다.
“신녀님?”
안겔은 사내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고위 신관인….”
“루트입니다.”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종종 보던 얼굴이었다. 물론 아는 얼굴이고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안겔이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빛 한 점 없는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이 도서관에 왔다는 것 자체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신녀인 안겔이 신전에서 무슨 일을 당할 확률은 매우 낮았지만 그래도 쉽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안겔이 루트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왜 여기 있지?”
그러자 루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일단 명목상이긴 하지만 제가 이 도서관 담당이라서요.”
도서관 담당이라니?
모든 신관은 저마다 맡은 바가 있긴 했다. 안겔은 신전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보통 대외적인 업무를 많이 맡는 편이었지만, 신관 대부분은 신전 내에서 업무를 하나씩 맡았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책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 담당이 고위 신관이라니?
‘말이 안 돼.’
고위 신관은 일반 신관과는 달리 강대한 성력을 가지고 있는 이였다.
물론 귀족 출신이라 고위 신관이 된 이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안겔이 이름을 다 파악해두고 있었다. 그러니 안겔이 이름을 몰랐던 이자는 본래 가진 출신 성분이 아닌 강대한 성력 때문에 고위 신관이 된 것이다.
아무리 귀족 출신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고위 신관이다. 고위 신관에게 이런 하찮은 직무를 맡길 리가 없었다. 안겔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가 이곳 담당이라고? 고위 신관이 이런 곳을 담당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안겔의 말에 루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안겔을 빤히 바라봤다. 안겔이 눈을 찌푸리는데 사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모르십니까?”
“뭘?”
루트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을 담당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굳이 살피지 않아도 아무도 제가 일하지 않는 걸 모르는걸요.”
그러니까 땡땡이치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소리였다. 신관 중 신실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안겔처럼 신과 신전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태하고 방종한 이들 역시 있기 마련이었다.
딱히 이 사내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어본 바는 없으나 그래도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자니 그렇게 성실한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겔이 타박하듯 말했다.
“내 앞에서 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군.”
신녀인 안겔의 앞에서 하기에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 안겔의 지적에 루트가 웃으며 물었다.
“보고하실 겁니까?”
장난스럽게 묻고 있었으나 은근한 말투였다. 지금 루트의 불성실을 보고하려면 안겔은 이렇게 늦은 시각에 홀로 도서관에 나와 있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아직 안겔은 그녀가 쫓겨나듯 신전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거울에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장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겠지만 한동안은 입을 다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협박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황제와 마찰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약간의 문책을 받을지언정 크게 위신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 내 행동은 모두 선의니까.’
안겔이 그녀가 봤던 두 번째 책을 불태운 이상 그 누구도 안겔이 악의를 갖고 로제타에게 거울을 선물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안겔은 사내가 던진 일종의 협박이 가소로웠다. 안겔이 날카롭게 물었다.
“평소에는 오지도 않는다면서 어쩐 일이지?”
땡땡이를 치기 위해 이 업무를 선택했다면서 어째서 이렇게 늦은 시각,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나? 딱 안겔이 있는 이 시간대에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루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지나가다가 작은 불빛이 보여서요. 누가 이렇게 학구열이 깊은가 하여 들어와 봤습니다.”
비꼬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살폈으나 딱히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안겔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히 찔려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예민해져 있어서 괜히 날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 낭비할 새가 없어.’
안겔은 바쁜 사람이었고 평소 친분도 없던 고위 신관과 싸움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봤으면 이만 돌아가지 그래?”
그러자 루트가 바닥에 떨어진 심지가 잘린 초를 가리켰다.
“하지만 방금 그런 사고도 있지 않았습니까?”
루트의 지적에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안겔은 깔끔하게 잘린 얇은 심지를 눈에 담았다. 바닥에 촛불이 떨어지기 전, 심지를 잘라내 불을 껐다.
‘능력이 나쁘지 않아. 아니, 대단해.’
특히 고위 신관이 될 정도로 성력이 강대하다면, 섬세한 활용은 그만큼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안겔이 묘한 눈으로 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력을 굉장히 세심하게 다루는군.”
“신녀님께 칭찬을 다 받네요. 자랑거리가 되겠습니다.”
“오늘 일은 내가 사과하지. 큰일이 벌어질 뻔했다는 건 나도 인정하니까.”
안겔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저도 일단 명목상 이곳 담당이니까요.”
사내가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눈짓했다. 자신이 남아서 책들을 정리할 테니 안겔은 먼저 떠나라는 소리였다.
엉망으로 헤집어져 있는 책들은 정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스스로 한 일이기도 하고 눈앞의 사내를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안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평판을 생각해 절대 이런 식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겠지만 안겔은 그냥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왠지 이 사내는 굳이 안겔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낼 것 같지 않았다.
‘귀족 출신도 아닌 고위 신관의 말을 누가 믿을 것 같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