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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벽-42화 (42/155)

#42

속마음까지 전부 이야기하자 속이 시원해졌다. 서호가 밝게 웃으며 테이블 위 조그만 씨앗을 가리켰다.

“자, 그럼 저는 마저 할게요.”

서호가 가리키는 걸 확인한 로제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겠다고?”

“네. 아직 성공 못 했거든요.”

“오늘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오늘은 성공 못 할 것 같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요.”

“하지만….”

그가 왜 망설이는지 눈치챈 서호가 키득거렸다.

“조금 기대치를 낮춰달라는 거지 아예 연습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말없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로제타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마음이 편해진 서호가 로제타에게 물었다.

“나갔다 온 일은 잘 해결됐어요?”

“…응.”

머뭇거리는 답에서 거짓을 읽었으나 서호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네, 그럼 잠시 다른 일 하고 있어요. 하다가 정 못하겠으면 다시 부를게요.”

“응.”

서호가 로제타의 붉은 눈가를 보며 물었다.

“푸티를 잠시 부를까요? 눈이 부으면 안 되니까.”

다행히 푸티는 멀리 가지 않았는지 서호의 부름에 곧장 돌아왔다. 서호는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는 푸티에게 그를 맡기고 다시 씨앗에 집중했다.

***

로제타는 서호가 편안하게 연습할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테라스로 향했다. 물에 적신 수건을 챙겨온 푸티가 테라스로 따라왔다.

로제타가 테라스의 문을 닫고 문 너머 집중하고 있는 서호의 모습을 살폈다. 처음 서호가 짜증스레 자신을 바라봤을 때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졌다.

아니, 그건 너무 귀여운 표현이었다. 로제타는 심장이 찢겨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서호에게서 처음 느껴 보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다른 이에게 받는 어떤 감정도 이렇게 로제타를 흔들지 못했다.

그때 푸티가 로제타에게 물었다.

“폐하, 여기…. 정말 마법사 아리스를 부르시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마법을 사용하면 금방 부은 눈이 가라앉을 텐데요.”

로제타는 푸티가 건네주는 물 적신 수건을 받아 들고 답했다.

“필요 없어.”

서호는 눈물에 약한 편이었으니 눈이 조금 부어 있으면 자신에게 더 신경 써 줄 것이다. 약은 생각을 하는 그에게 푸티가 물었다.

“나갔다 온 일을 보고드릴까요?”

“해.”

“사용인들 몇 명을 마주쳤지만, 대화하거나 서호님이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로제타가 푸티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푸티는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서호님께서 사용인들이 방에 들락날락하는 걸 불편해하시기에 앞으로는 저 혼자 방을 돌보겠다 이야기했습니다.”

로제타가 눈을 찌푸리며 푸티를 바라봤다.

“불편해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서호가 그들을 불편하게 여긴단 말인가. 분명 푸티에게 입이 무겁고 서호가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사용인들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사용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서호님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푸티를 바라보던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로제타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로제타는 원래 푸티 외의 사용인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었다. 사실 푸티도 방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서호를 위해 들여놓은 것뿐이지.’

서호의 편의를 생각해서, 그리고 서호가 지금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로제타가 관리하기에는 귀족들이나 황성 밖의 사람들보다는 황궁 사용인들이 더 편했으니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서호가 그들을 불편해한다면 로제타로서는 서호를 독점할 수 있어 더 좋은 일이었다.

“잘됐군.”

로제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푸티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

“그게…, 새가 날아들었습니다.”

“서호를 공격했다고?”

“커다란 새가 아니라 앵무나 카나리아 같은 정원에 풀어놓는 그런 새 말입니다.”

“아, 그거.”

아무렇지 않은 로제타의 반응에 푸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역시 신력과 관련된 겁니까?”

“맞아.”

처음 신력을 받았을 때 로제타 역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종종 있었다. 며칠 뒤 신력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 뒤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로제타가 태연히 답하자 푸티가 안심한 듯 이야기했다.

“혹 해결 방법을 아신다면 서호님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해결 방법이라고 해봐야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서호는 그걸 조금 어려워하니 한동안은 지금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다시 서호의 날카로운 눈이 떠올랐다.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던 그 눈.

이미 끝난 일인데도, 서호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 눈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건, 서호에게 받고 싶었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번 그 일을 겪고 나자 로제타는 서호에게 신력을 열심히 가르칠 마음이 사라졌다. 사실 로제타가 그렇게 교육에 열을 올린 이유는 신력이 서호에게 넘어간 계기 때문이었다.

‘그 꿈….’

운명의 실이 얇아졌다니 절대 평범한 꿈이 아니었고, 서호의 발목 주위를 맴돌던 이질적인 기운 역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제타가 지금처럼 차분함을 가장할 수 있는 건 모두 신력 덕이었다.

‘신력이 있는 한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로제타가 서호를 안심시키며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력이 서호에게 있는 한 삿된 것은 서호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로제타의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신이 아무런 의미 없이 자신의 신력을 서호에게 줬을 리가 없으니 신력은 자신을 위해서 서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굳이 그걸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자신의 힘이었던 새벽의 힘을 서호가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면 그와 더 깊게 연결됐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고집을 부렸다. 아직 같은 마음을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력으로나마 자신과 서호가 같은 위치에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미움을 받으면….’

그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아예 더 이상 서호에게 신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서호는 또 한 번 예상 밖의 태도를 보였다.

‘성실하군.’

로제타는 창문 너머로 집중하고 있는 서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뭐가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서호가 눈을 찌푸리며 씨앗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씨앗을 노려보던 서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분명 다시는 서호에게 신력의 사용법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 서호도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다시 노력하고 있었다.

‘서호.’

조금 힘들고 짜증 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다는 그 말. 그 말이 꼭 힘들어도 로제타를 놓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더 기꺼웠다.

누군가의 노력이 하찮게 보이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이가 뭔가를 위해 노력하면 항상 시간 낭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정말 드물었다. 로제타는 절대 두 번의 기회 따위는 주지 않았고 누가 뭘 하든 마음에 찬 적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누가 노력을 하든가 말든가. 그건 로제타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호는 달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예뻤고 절로 눈이 갔다.

‘어떻게 모든 행동이 다 저렇게 마음에 들 수 있지?’

어떻게 여기서 더 좋아질 수 있는 걸까? 정말 서호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로제타가 서호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아직도 옆에 남아 있는 푸티에게 가 보라며 손짓했다.

“이만 가 봐. 보좌관들에게 들려서 신녀에 관한 보고도 받아오고.”

서호의 눈빛에 도망치듯 방을 떠나 집무실에 들러 안겔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서호의 편지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좌관들의 보고를 듣다가 혹여 이렇게 도망쳤다고 서호가 더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서호의 눈빛은 로제타에게 큰 충격을 줬다.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

신기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온 상대. 그리고 점점 더 그 크기를 부풀려가는 이. 로제타는 멀리서도 보이는, 파르르 떨리는 서호의 속눈썹에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한껏 집중해 찌푸려진 미간의 주름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고 있는데 테라스를 나서려던 푸티가 로제타를 불렀다.

“한 가지만 더 말씀 올리겠습니다.”

푸티가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서호님께서 정원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밤에 폐하와 함께 산책을 가시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습니다.”

“산책?”

“네.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는데, 폐하께서 바쁘실까 걱정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래. 내가 물어보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제일 덜 거슬리는 놈이니 한동안은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서호도 푸티를 편하게 생각하니까.

‘물론 그 점이 거슬리는 거지만.’

떠나는 푸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다시 서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서호만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로제타는 약간의 거슬림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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