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커다란 나무도, 잘 조성된 꽃들도 따뜻한 햇볕도 다 좋았다. 서호가 빙그레 웃자 푸티가 말했다.
“밤에 보는 정원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밤에 폐하와 밤 산책을 하시는 것도 좋겠지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서호가 살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공해나 먼지가 많은 곳이 아니니 별도 잘 보일 테고.
하지만 서호는 푸티의 제안을 거절했다.
“로제타는 바쁘잖아요. 저녁에는 쉬어야죠.”
“신력이 있으시니 일반적인 분들과는 다르십니다. 서호님은 신체적으로는 뭔가 바뀐 것이 없으신가요?”
서호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딱히 피곤할 일이 없는 일상이 반복됐으니 원래 몸에서 뭐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새도 없었다.
그 이상한 능력 빼고는.
‘그 능력도 제대로 못 쓰고 있지만.’
평온을 찾았던 마음에 슬그머니 걱정이 침입했다. 서호가 어두운 얼굴로 손을 바라보고 있는데 푸티가 말했다.
“폐하께서 지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호님을 지켜보느라 몇 달 내내 제대로 주무시지도 않았지만 멀쩡하셨거든요.”
그 말에 서호가 놀라 푸티를 돌아봤다.
“로제타도 자지 못한 거예요?”
서호는 처음 만났을 때의 로제타를 떠올렸다. 많이 울어서 붉어진 눈가와 쉬어버린 목.
하지만 그래도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게 가능한 거야?’
서호가 의심을 가득 담고 푸티를 바라보는데 그가 답했다.
“정확히는 주무시지 않은 거지만요. 항상 거울만 지켜보셨는걸요. 언제 서호님이 보일지 모른다고요.”
서호가 놀라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순간 무언가 서호에게 휘리릭 날아왔다. 저도 모르게 날아온 것을 받아 든 서호는 품 안에 안긴 것을 바라봤다.
“어?”
새, 새였다. 노란 새, 카나리아?
멍하니 새를 바라보던 서호가 고개를 들어 푸티를 바라봤다. 푸티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인 듯 그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서호가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새가 날아왔어요.”
“네? 네. 정원에 풀어놓은 새군요.”
서호가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는 새를 눈짓하며 물었다.
“여기 새는 이렇게 사람에게 다가와 애교도 부리나요?”
“그건 아닙니다. 물론 정원 밖으로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람에게 다가오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푸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둘 서호의 주변에 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가볍게 날아와 머리나 어깨에 내려앉는 새가 있는가 하면 주변 나무에 자리를 잡는 새도 있었다.
서호가 이 기이한 현상에 신기함을 숨기지 못하는데 푸티가 걱정스레 말했다.
“조심하세요, 서호님. 발톱에 긁히실 수도 있습니다. 언제 공격할지도 모르고요.”
딱히 조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새들은 얌전했고 그저 호기심 가득한 몸짓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귀엽다.’
갸웃거리는 그 조그만 몸짓을 바라보던 서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푸티에게 물었다.
“…이것도 영향을 받은 걸까요?”
아무래도 밖이기도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력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푸티는 찰떡같이 서호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서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새들을 바라보던 푸티는 그 수가 점점 더 많아지자 질린 얼굴로 서호를 이끌었다.
“…우선 들어가시죠. 혹시 모르니까요.”
“네, 알겠어요.”
점점 늘어나는 새에 서호 역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서호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서호가 움직이자 그의 몸에 앉아 있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딱 하나만 빼고.
서호는 그의 손에 앉아있는 노란 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가 옆에 있는 나무 위에 올려줬다.
새는 얌전히 나무에 앉아 서호를 바라보기만 할 뿐 따라오지는 않았다.
괜히 그 새가 마음에 걸려 서호는 돌아가는 길에도 뒤를 돌아 새를 힐끔거렸다. 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서호를 응시했다.
***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물잔을 내려다보며 가늘게 눈을 좁혔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물잔 안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정말 이방인이군.”
새가 달려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생김새의 이방인이었다. 물의 표면에 사용인에게 이끌려 가는 서호의 뒷모습이 비쳤다.
탁, 손가락을 튕기자 물잔 속 서호의 모습이 사라지고 곱게 휜 금안이 담겼다. 사내가 손을 들어 자신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당겨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찾아가 봐야겠다.”
***
신기한 일을 겪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로제타가 돌아와 있었다. 순식간에 머리에 남아있던 새의 잔상을 날려버린 서호가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로제타가 서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전에 경험한 그 이상한 일 때문인지, 아니면 로제타는 단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려서였는지 서운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려는데 로제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호.”
그 부름에 서호의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로제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서호가 이상함을 느낀 것처럼 푸티 역시 같은 것을 느낀 건지 옆에서 푸티가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로제타, 무슨 일이에요?”
다른 점이 있다면 서호는 로제타의 변화를 느끼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반면 푸티는 서둘러 방을 떠났다는 것이다.
서호는 방을 떠나는 푸티를 붙잡지 않았다. 로제타가 푸티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서호는 로제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답이 없는 로제타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로제타, 왜 울어요?”
아까 로제타가 울었던 기억을 떠올린 건 지금 상황에 대한 나름의 암시였을까.
“…그대를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로제타가 눈치를 보듯 가까이 다가온 서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말했다.
“진작에 사과해야 했는데, 내가 겁이 나서….”
역시 아까 자신이 감정적으로 조금 격해져 있었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서호가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제타에게 물었다.
“로제타, 그러니까 왜 우는 거예요?”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가 울먹울먹 일그러진 얼굴로 답했다.
“짜증 난다는 얼굴로 나를 째려보지 않았어?”
눈가에 물기가 가득하고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입가 역시 부들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쳐질 것만 같았다.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 서러움을 가득 담고 있는 걸 바라보자 엄청나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호가 멍하니 그를 보다 로제타의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화가 나지 않았던 건 아닌데요.”
“역시 화가 났어….”
로제타가 말을 삼키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러워서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화가 나기는 했었는데 벌써 다 풀렸어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화가 났다기보다는 심통이 났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 말하기 조금 부끄러웠으나 그래도 지금은 로제타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서호의 말에 고집스럽게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로제타가 슬쩍 고개를 들고 서호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서호는 애써 그 웃음을 숨겼다.
“그냥 내 생각만큼 신력이 잘 다뤄지지 않아서, 로제타를 실망하게 하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불편했어요.”
“…나를 실망하게 하다니?”
울음 때문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었다. 서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제가 생각보다 속도가 느려서 당황했잖아요?”
“그, 그건….”
로제타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서호가 그 얼굴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요.”
계속되는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화가 났구나.”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무력감을 느꼈다고 하는 게 더 맞겠어요. 저 그런 눈빛 처음 받아 봤거든요.”
정말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칭찬을 받는 편이었지 교육을 따라가지 못해 곤란하다는 느낌은 받아 본 적 없었다.
네가 열등생이라고 말하면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하는 눈빛.
‘역시 그것도 나를 위한 거였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기분이 상한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일단 노력하면 다 보통 이상은 해서요.”
로제타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그건 서호도 알았다.
“네, 알아요. 그래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고요.”
그래도 계속 아무렇지도 않기 위해서는 로제타에게 미리 이야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서호가 진지한 얼굴로 로제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로제타.”
“응.”
“저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로제타도 기대치를 조금만 낮춰주지 않을래요?”
솔직한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원래 제 힘이 아니라서 로제타처럼 능숙하게 사용할 수는 없을 거예요. 재능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로제타가 원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요.”
이해했냐는 서호의 눈빛에 로제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가 로제타의 눈가를 닦아주며 물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울지 않을 거죠?”
“응.”
“저도 서운한 게 생기면 바로 이야기할게요. 대신 로제타도 걱정되는 게 있으면 울지 말고 바로 이야기해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