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안겔이 신전으로 돌아가고 아리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에게 보낼 편지를 며칠 동안 고심해서 쓴 서호는 방에 들어서는 사용인들의 얼굴을 살피다 그들이 방을 나서자 푸티에게 물었다.
“푸티, 이제 다른 이들이 방에 들어오네요.”
요즘 들어 종종 다른 사용인들이 방에 들어오곤 했다. 서호의 물음에 푸티가 답했다.
“서호님의 존재는 본래 황제궁 사용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입이 무거운 자들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구나….”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에 푸티가 서호에게 물었다.
“사용인들이 불편하십니까?”
“음, 조금요.”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한다지만 누군지 모를 이가 방으로 들어오는 게 편하지는 않았다. 푸티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기도 했다.
서호의 답에 푸티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럼 앞으로는 저만 이곳에 들어오도록 하겠습니다. 또 불편한 점이 있으시거든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그러면 푸티의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원래 폐하는 저 혼자 모시는 편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사람이 하나 늘었는데….”
푸티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서호님 같은 분을 모시는 건 모든 사용인이 바라는 일일 겁니다.”
“에이, 일이 늘어나는 걸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서호님을 모시는 게 즐겁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편안하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그 말에 서호가 손안의 물건을 눈짓하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딱히 편안하지는 않은데요.”
푸티가 서호의 손안에 있는 씨앗을 내려다봤다.
“힘드십니까?”
“힘들다기보다는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편지를 마무리한 후 정확히 어젯밤부터 서호는 신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훈련 중이었다. 지금 이 씨앗은 연습의 일종이었다.
‘숙제라고 해야 하나?’
씨앗을 무사히 키워서 꽃으로 성장시킬 것. 잠시 볼일이 있다고 방을 나선 로제타가 준 과제였다. 서호는 씨앗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로제타는 씨앗을 꽃으로 만들고 나면 나무를 키울 거라고 쉽게 이야기했지만, 서호는 먼젓번과는 달리 아직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는 할 줄 알았다고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니까?’
로제타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서호는 처음으로 로제타에게 불만이 생긴 참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로제타가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
‘서호, 이렇게 힘을 모으면….’
이렇게 힘을 모으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에 로제타가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힘을 느껴 봐.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걸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 힘을 느낄 수 없다고 이야기하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 말했다.
‘뭐? 힘을 못 느끼겠어? 평상시에 안 느껴진다고?’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서호를 달래듯 이야기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나는 그냥 명령하면….’
명령이라니, 느껴지지도 않는 무형의 것에게 명령을 하면 그게 말을 듣겠는가, 서호가 곤란해하는데 로제타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게 안 되지?’
당혹스럽다는 듯, 동시에 왜 이게 안 되는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로제타는 처음부터 그랬다. 왜 서호가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
‘내가 재능이 없나?’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힘을 쓰는 그 순간만 잠깐 힘이 느껴지고 말았으니 감을 잡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식물의 꽃을 피우는 걸 몇 번 성공했을 뿐인데 이번에는 씨앗을 이용해 보라니.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니야?’
사실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한 건 어젯밤이었지만 신력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종종 시간이 날 때면 로제타와 함께 신력을 느끼는 연습을 하거나 꽃을 피우는 걸 연습하곤 했었다.
‘상처 치료는 잘 됐는데….’
발목에 상처가 생긴 다음 날, 아리스도 고치지 못했던 발목의 상처를 자신은 고쳐낼 수 있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고 저도 모르게 저지른 짓이었지만.
‘덕분에 아리스까지 내가 신력을 쓰는 걸 알게 돼버렸지.’
자신이 신력을 쓰자 바짝 얼어버렸던 푸티와 아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옆에서 로제타가 아리스는 황실 마법사니 괜찮다고 달래주기는 했지만 그건 꽤 큰 실수였고, 서호가 신력 연습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일이 생각하는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 뒤에도 나는 계속 헤매고 있잖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살면서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머리가 나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뭔가를 특출나게 잘하지는 않아도 뭐든 중간은 갔다.
그런데 실패는 계속되고 성장은 더디자 서호는 답답했고, 동시에 점점 불만이 쌓였다.
‘이게 느린 속도인지도 모르겠어.’
모든 속도의 기준이 로제타에게 맞춰졌으니 서호는 이게 보통인지 느린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나는 처음 겪는 거고 이 상황이 이해도 잘 안 되는데. 갑자기 너한테 이런 힘이 생겼다고 잘 사용해 보라고 하면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그래서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 로제타를 노려본 것도 같았다. 서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흔들리는 눈을 하고 일이 생겼다며 급하게 방을 나갔던 로제타를 떠올렸다.
‘화풀이한 건가?’
로제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다만 서호의 능력이 로제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아니면 로제타의 기대가 너무 높거나.’
서호가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푸티가 그를 달랬다.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 힘을 완전히 다루시면 밖으로 다니시기도 편할 테고요.”
“밖이요?”
“네, 스스로 몸을 지키실 수 있으면 여러모로 안심되니까요.”
서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창 너머로 푸른 하늘과 높게 뻗은 나무들이 보였다.
바깥.
이 세계는 서호의 세계와는 달리 신기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마법사가 존재하고 신이 실재했다.
신기했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서호의 세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일 것이다.
‘그래서 로제타도 그렇게 열정적인 걸까?’
그간 봐왔던 로제타라면 힘을 잘 다루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지켜주겠다 외쳤을 것 같은데 유독 신력을 다루는 일에는 열의를 보였다.
‘역시 화풀이했나 봐.’
흔들리던 푸른 눈이 떠올랐고 동시에 미안해졌다.
지금까지는 로제타의 비호 아래 황궁 안에서만 안전하게 지내왔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계속 로제타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으니까.’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생긴 힘이었다. 실감은 안 나지만 정말 대단한 힘이었고 이 힘이 있다면 혼자서 몸도 지킬 수 있을 거다.
‘열심히 해야겠다.’
투정을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호가 창밖을 바라보며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푸티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도 황궁은 돌아보셔도 괜찮습니다.”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로제타가 돌아오기 전까지 과제를 끝내고 싶었다.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다시 연습을 시작할 때였다.
“음, 아니에요.”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너무 방 안에만 계신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푸티의 말에 그를 돌아봤던 서호는 눈을 굴렸다.
‘너무 밖에 안 나갔나?’
걱정이 가득한 푸티의 얼굴을 살피며 서호가 물었다.
“내가 너무 안에만 박혀 있는 것 같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푸티의 대답이 진심이 아님을 서호는 알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집에만 있던 적이 있거든요. 그게 버릇이 됐나 봐요. 굳이 방을 나서지 않아도 집중할 일도 있어서 심심하지 않기도 했고요.”
서호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로제타도 있고, 푸티도 있고, 아리스도 종종 오잖아요. 미안해요.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홀로 지내던 적막한 집에서는 종종 사람을 보기 위해 밖을 나가곤 했지만, 이곳은 가만히 방에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계속 있었다. 그래서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서호의 말에 푸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오늘은 가볍게 황제궁 정원을 돌아보시겠습니까? 황제궁은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거의 없는 편이니 편안하게 돌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서호가 푸티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다녀올까요?”
“네, 모시겠습니다.”
서호는 푸티와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으로 가는 길에 사용인들을 만나곤 했지만 푸티의 말대로 사용인들 말고 다른 이와는 마주치지 않았기에 마음이 편했다.
정원에 도착한 서호는 발밑에 밟히는 풀들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호가 살던 아파트에 조성된 정원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이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엄청 넓다.’
서호가 감탄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와, 엄청 넓네요. 관리하느라 힘들겠어요.”
“정원사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서호는 아무도 없는 정원을 거닐며 작게 웃었다.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나오니 좋았다.
“나오고 보니까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