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로제타가 또 묘한 얼굴로 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아니야. 사실, 그대 말처럼 내가 오늘 기분이 별로였어.”
“그렇구나. 그럼 편지는….”
“아니야, 편지는 보내도 돼. 정말로.”
확실히 아까보다는 표정이 괜찮았다.
“대신에 서호의 이야기를 해줄래?”
이렇게 생뚱맞은 요구도 하고. 그가 웃으며 조르듯 부탁했다.
“첫날 이후로 내 이야기를 주로 하잖아. 오늘은 서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별로 특별한 게 없는데요.”
“특별하지 않은 서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잠시 고민하던 서호는 얼마 전 아리스가 왔을 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뭐, 그럼…. 아리스와 푸티에게 이야기해준 건데, 제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요.”
“이름?”
“네, 제 이름이 태몽 때문에 지어졌다고….”
로제타가 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
“네.”
“나한테도 해줘.”
갑자기 의욕이 솟은 것 같은 로제타에 서호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가 반짝이는 그 얼굴에 홀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눈이 빛나고 있었다. 별빛을 받는 호수처럼.
“음, 그러니까 어느 날 어머니가 꿈을 꾸셨는데요.”
참 대단한 얼굴이었다.
***
푸티는 안겔이 황궁을 떠나는 것을 직접 확인한 뒤, 로제타에게로 향했다.
“신녀님께서 궁을 떠나셨습니다.”
로제타는 그렇게 대놓고 안겔을 자극했으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심드렁하니 욕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티가 로제타를 따라 서호가 들어가 있을 욕실을 응시하는데 그가 물었다.
“보고할 게 더 있나?”
없으면 얼른 나가라는 축객령이었으나 푸티는 할 말이 있었다.
“폐하께서 응접실을 떠나시고 난 뒤, 신녀님께서 조금 이상하셨습니다.”
서호에게 집중하느라 푸티를 쳐다도 보지 않던 로제타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푸티는 쫙 찢어지던 안겔의 입가를 떠올렸다. 푸티의 사견이 담겨 있어 그 웃음이 그리도 소름 끼쳤던지는 모르겠으나 그 웃음은 정말 이상했다.
“매우 기괴한 웃음이었습니다. 굳이 감정을 따져보자면 분노가 아니라 기뻐하는 것 같았고요.”
로제타가 중얼거렸다.
“기뻐했다?”
로제타가 생각에 잠겼다. 푸티는 자연스레 로제타의 아름다운 얼굴을 관찰했다. 무표정한 저 얼굴에 오만함이 들어차고 상대를 제대로 짓밟았다.
‘아까는 정말….’
아까 안겔에게 대놓고 적의를 표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리 로제타가 안겔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명령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서워서 건드리지 않았다기보다는 괜히 건드리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이셨지만.’
푸티는 안겔이 괜히 황궁에 나타나 귀찮게 굴곤 할 때면 로제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것을 기억했다.
‘황제도 귀찮은데, 굳이 신전까지 내 밑으로 둘 필요는 없지.’
로제타는 그가 신전에 손을 뻗으면 신전이 기꺼이 그의 손 아래 고개를 조아릴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태껏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단지 귀찮음 때문이었고.
로제타는 안겔이 그를 귀찮게 구는 것과 신전 전체가 그를 귀찮게 구는 것 중, 덜 귀찮은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안겔을 그렇게 자극한 것은 신전을 다스리는 귀찮음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화가 난 것치고는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표정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처럼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푸티가 로제타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지. 신녀에게 사람을 붙여. 본래 신녀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으니 어렵지도 않겠지.”
이미 신녀는 황궁을 떠났다. 그러니 로제타의 말은 신전에 가 있을 신녀에게 사람을 붙이라는 소리였다.
‘정말 신전을 건드릴 생각이시군.’
신전에 사람을 심는다는 건, 신녀를 건드린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신전을 황제의 발아래에 두겠다는.
푸티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로제타가 지는 것은 상상도 안 될뿐더러 그렇게 신전이 황제의 발아래 있게 되면 푸티의 위상은 더 높아질 테니까.
푸티가 입꼬리를 찔끔 올렸다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보좌관들과 상의해 적당한 후보를 추리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가져와.”
푸티는 시간을 확인했다. 보좌관들이 퇴근하기 30분 전이었다. 보좌관들이 꽤 갈리겠구나 싶었지만 푸티는 거부하지 않았다.
“네.”
“그리고 하나 더. 내일 마법사 아리스를 불러와. 서호의 발목에 마법은 통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그 이상 명령이 없자 푸티는 로제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려고 했다.
로제타는 서호와 함께 있을 때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고 푸티에게 서호의 관심을 끌지 말고 소리 없이 움직이라는 눈빛을 보냈으니까.
그대로 방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로제타가 푸티에게 질문을 던졌다.
“참, 그리고 내게 이야기할 게 더 있지 않나?”
묘한 어조와 살짝 찌푸려진 눈가에 흠칫 몸을 떤 푸티가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을 더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푸티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푸티는 로제타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뭘 말씀하시는지….”
그러자 로제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정말 모르나?”
푸티는 더 깊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러자 로제타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멍청하긴. 아니면 무능한 건가?”
무언가 울컥 차올랐으나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푸티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데 로제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호의 태몽 이야기를 들었는데.”
순간 푸티는 입 밖으로 욕이 나갈 뻔했다. 태몽이라니, 안겔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으나 푸티는 그 마음을 티 낼 수 없었다.
“아. 그…, 죄송합니다. 폐하.”
“모든 이야기를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다. 로제타는 그가 없는 사이 서호가 한 모든 일을 알길 바랐고 푸티는 언제나 서호의 일과를 로제타에게 보고하곤 했다.
‘왜 빼먹었지?’
푸티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어이가 없군. 그간 네가 줬던 기록 중 또 이야기하지 않은 건 뭐야?”
푸티가 재빨리 답했다.
“그것 외에는 모두 기록하고 전해드렸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그, 그것이….”
로제타의 눈이 자신을 훑는 게 느껴졌다. 이마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일을 그렇게 엉망으로 하다니, 네 위치가 부끄럽지도 않….”
그때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 서호가 등장하자 푸티를 질책하던 로제타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방 안에 서호가 의아하다는 듯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
여태까지 푸티를 닦달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로제타는 곱게 웃으며 서호를 반겼다.
“아, 서호.”
서호가 로제타에게 다가오다가 그 앞에 서 있던 푸티를 발견하고 웃었다.
“푸티.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제가 할 수 있어요.”
로제타의 눈치를 보던 푸티는 서호의 젖은 머리카락을 살폈다.
조금 이상했다. 서호는 첫날 푸티가 그의 머리를 말려주는 걸 만류했었다. 푸티가 그걸 자기 일이라고 이야기하자 다음부터는 욕실 안에서 머리를 적당히 말리고 나오기 시작했었고.
그런데 오늘 서호의 머리가 많이 젖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푸티가 멍하니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서호를 발견하고 얼른 답했다.
“…아닙니다. 서호님, 이런 게 제 일인걸요. 이리 오세요.”
푸티는 서호를 데리고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호의 머리를 털어주기 시작했다. 서호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푸티의 시중을 받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로제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푸티가 서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순간부터 싸늘한 눈으로 푸티를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그냥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던 서호의 눈과 푸티의 눈이 거울을 통해 부딪쳤다. 푸티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는 서호에 그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걸 깨달았다.
‘다 알고 나오신 거구나.’
평소 딱히 좋아하지 않던 시중을 받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푸티가 눈을 깜빡이며 감사 인사를 건네자 서호가 괜찮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더니 로제타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
푸티는 서호의 머리를 적당히 말려준 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정확히 말하면 서호가 푸티가 또 혼나지 않게 계속 로제타에게 말을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푸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좋은 분이셔.’
다정하게 웃어주던 눈을 떠올린 푸티가 결심한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원래도 로제타의 사람이니 지켜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서호가 다치거나 문제가 생기면 로제타와 서호를 제외하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로제타에게 당할 자신이었으니까.
‘친절하신 분.’
일신의 안위보다는 서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호감이 생겨났다.
로제타의 경우는 서호가 잘못 짚은 것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호는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푸티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 푸티가 서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보좌관들을 채찍질하는 거였다.
물론 로제타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푸티는 보좌관들을 열심히 다독여주는 것도 잊어선 안 됐다.
‘오늘은 또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푸티는 퇴근을 꿈꾸고 있을 보좌관들에게 최악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