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38화 (38/155)

#38

우선 이번 일과 관련된 다른 자료가 더 있는지 찾아봐야 했다. 거의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혹시 자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황궁을 떠나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네.’

운명의 실을 볼 수 있는 건 자신뿐이고 조금 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던 것도 아마 자신뿐인 것 같았다. 신전으로 돌아가 안달하는 황제의 소식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안겔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눈앞에 있는 존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신녀님,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녀의 앞에 있던 건 푸티였다. 그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방금 그런 일이 있는데 이렇게 웃고 있는 게 어떻게 보일지 안겔도 알았다. 안겔은 최대한 평온을 찾으려 노력하며 답했다.

“아니요, 웃으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의식적으로라도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걸 알았고 푸티가 눈치가 빠르다는 것도 알았지만 안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떠날 텐데.’

로제타가 수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은 이미 황궁을 떠나 신전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신전에 있을 그녀를 증거도 없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로제타가 어찌하지는 못할 테고. 안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푸티는 왜 이곳에 남아 있는 거죠?”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안겔을 바라보던 푸티가 고개를 숙였다.

“떠나는 준비를 도와드리려고 했습니다.”

안겔은 평소라면 거절했을 푸티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그럼 준비를 좀 도와주겠어요?”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푸티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신녀님, 아까 폐하께서 너무 거치셨죠.”

거칠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이었던가. 푸티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안겔은 목소리만은 다정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걱정이 심해서 그러신 거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생기다니 참 놀랍고 기쁜 일이네요.”

그렇게 소중한 존재를 잃는 황제의 모습을 보면 참 기쁠 것이다.

“그렇죠. 그러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 그분을 보필하려 하고 있습니다.”

푸티의 답은 묘했다. 역시 아까 안겔의 표정에 수상함을 느낀 게 분명했다. 안겔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요, 서호님이 부럽네요. 이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니.”

“그럼요. 폐하의 운명이신걸요. 앞으로 더 많은 걸 얻게 되실 겁니다. 저 같은 사용인만이 아니라 더 높은 분들의 사랑도 받으실 거고요.”

무슨 의미일까. 귀족들을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면… 아버지?

안겔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니.

그게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나?

‘나도 얻지 못한 걸? 말도 안 되는 소리.’

안겔이 비소를 숨기며 답했다.

“…네, 당연히 그리되겠죠.”

“신녀님도 그렇게 서호님을 바라봐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같잖은 경고였다. 안겔은 그 경고를 모르는 척 흘려버렸다.

“어머, 당연하죠. 저도 서호님이 참 마음에 든답니다. 매우 다정하신 분인걸요.”

“네, 그렇죠. 그러니 그분께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벙한 웃음을 띤 얼굴로 안겔을 돌아본 푸티가 손을 뻗어 문을 열어줬다. 어느새 두 사람은 그녀의 방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돌아오실 테니 짐은 가볍게 챙길까요?”

안겔이 돌아오는 걸 반기지 않으면서 말은 잘했다.

‘뭐 이번에는 나도 원하는 바지.’

안겔이 미묘한 웃음을 띠며 답했다.

“네, 부탁해요.”

서로의 속마음을 숨긴 채 두 사람이 미소를 주고받았다.

***

로제타와 함께 방에 도착한 서호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런 서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로제타가 그를 돌아봤다.

“서호.”

“네.”

“조금 놀랐지?”

서호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죠.”

“원래 이런 사이야. 그간 그대의 일이 잘못될까 싶어 조금 유하게 대했지만 이런 상황은 종종 있는 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접실에서 자신이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당황했던 것을 눈치챘던 모양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건, 나를 배려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그만큼 화가 났던 걸까.’

그리 긴 시간을 로제타와 함께한 건 아니지만 그는 서호를 배려하지 않는 이는 아니었다.

‘그럼 그 정도로 화가 났던 거겠지.’

서호가 생각을 정리하며 물었다.

“지금 이 행동이 로제타에게 피해가 되는 건 아니죠?”

“그래.”

“뭐, 그럼 됐어요.”

“실망하지 않았어?”

“뭐가요?”

“조금 강압적이었잖아.”

서호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렇긴 한데…. 뭐, 서로 한 방씩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로제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얼굴을 보며 서호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제가 로제타의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만난 지 정말 얼마 안 됐잖아요. 로제타는 저를 봐왔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고요.”

“…그렇지.”

어색하게 돌아온 답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자기를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나?’

서호는 기본적으로 도덕을 지키고 예의를 지키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이었다.

오늘 안겔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친분이 있는 로제타를 더 신경 쓰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안겔에게 아예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서호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서로를 알아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고, 그러니까 로제타에게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봐요.”

로제타가 눈을 감더니 중얼거리듯 서호를 불렀다.

“서호….”

“네?”

“서호는 사람을 참 안달 나게 해.”

서호가 되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사람이 너무 다정한데 또 한편으로는 냉정한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

‘욕하는 건가?’

하지만 욕하는 거라고 하기에는 로제타의 딱딱하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뭐지?’

원래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서호는 종종 이렇게 로제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서호가 그의 말을 해석해 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급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서호. 안겔이 궁을 떠나게 됐으니 이제 그대의 존재를 궁과 귀족들에게 알릴까 해. 곧 국정 회의가 열리거든.”

국정 회의라니, 신기한 말이 들렸지만 서호는 우선 더 중요한 것을 묻기로 했다.

“제 존재를 밝히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크게 바뀌는 건 없겠지만 우선 궁을 돌아다니는 게 자유롭겠지?”

크게 변하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로제타가 편한 대로 해요.”

또다시 로제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호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대신에 로제타, 제가 개인적으로 안겔에게 편지를 하나 써도 괜찮을까요?”

아무리 안겔에게 꺼림칙함을 느낀다고 해도, 먼저 은근슬쩍 상대를 건드렸던 게 안겔이었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울 리가 없었다.

“…역시 아까 내 모습에 실망했군.”

지금 안겔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금 일렀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미루면 미룰수록 안 좋았다. 급격히 침울해지는 그 얼굴에 서호가 말을 더했다.

“실망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효율적으로 일하는 게 더 좋잖아요.”

서호는 안겔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정말 그녀에 대한 미안함만으로 편지를 쓰는 건 아니었다.

‘안겔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신력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긴 했지만 그 꿈은 절대 평범한 꿈이 아니었다. 그러니 안겔이 가져올 정보가 꼭 필요했다.

서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더했다.

“아직 글을 쓰는 건 서투니까 아리스에게 물어서 함께 편지를 쓸게요. 로제타도 뭐라고 쓸지 옆에서 도와주면 좋겠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로제타가 서호의 표정을 낱낱이 살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안겔에게 편지를 쓰는 걸 허락하긴 했지만 여전히 로제타가 침울한 기색을 보이자 서호는 편지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혼자서 편지를 못 쓰잖아. 내용도 생각해 봐야 하고.’

흥분해 있을 게 뻔한 안겔에게 오늘 당장 편지를 보내면 오히려 화를 살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된 후에 편지가 도착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편지는 어차피 아리스와 수업이 있을 때 쓸 거니까 오늘은 이만 쉴까요?”

“응?”

“로제타 웃음이 어색해요. 혹 편지를 보내는 게 별로면 보내지 않아도 돼요. 그냥 내 마음이 편하려고 하는 거니까.”

“어색한가?”

로제타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서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한 번씩 가짜로 웃는 건 알았어요.”

“어떻게?”

“그야 반짝거리지 않는걸요.”

“뭐?”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로제타가 서호를 바라봤으나 서호는 딱히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그냥 어떤 느낌이었다.

로제타의 눈은 자신을 볼 때마다 반짝거리는 빛을 냈다. 그런데 한 번씩 그러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안겔을 만날 때, 푸티를 만날 때, 그리고 오늘 간간이 자신을 보며 웃을 때.

서호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음, 감이에요.”

로제타가 곤란한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알 거라고 생각 못 했어.”

곤혹스러운 그 얼굴에 서호가 여상하게 이야기했다.

“뭐, 그것도 나쁘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요.”

“그래?”

“네.”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서호 역시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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