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안겔을 싫어하면서 로제타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해 보던 서호는 한숨을 삼켜냈다. 이제 와 이유를 찾아보려 해도 이미 안겔이 황궁에 머무는 건 확정된 일이었다.
다만 서호는 다짐했었다.
‘안겔이 직접 찾아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로제타가 안겔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뻔히 알고 있기도 했고, 서호 역시 안겔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안겔이 거울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추상적인 부분이 너무 많기도 했고.
그런데 그 다짐이 이상한 꿈 때문에 깨져버렸다. 서호는 안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제 발목을 잡아당기는 꿈을 꿨어요.”
“발목을요?”
“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니 발목에 멍이 들었어요.”
안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네.”
푸티가 테이블을 옆으로 밀었다. 서호는 푸티에게 눈인사를 하며 바지를 걷어 올렸다. 퍼렇다 못해 시커멓게 변한 서호의 왼쪽 발목을 바라보던 안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심각해진 안겔의 얼굴에 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인가요?”
안겔이 서호의 발목 쪽으로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서호는 살짝 놀랐으나 심각한 얼굴로 발목 주변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뭐라고 확답해드릴 수는 없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요. 그 외에 다른 특별한 변화는 없으셨나요?”
서호는 사전에 로제타와 약속한 대로 답했다.
“네.”
“…혹시 제게 보여 주시려고 치료를 미루신 거라면 우선 치료할까요?”
안겔의 제안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손에서 서호가 본 것과는 조금 다른 하얀 빛이 튀어나왔다.
투명하면서도 뽀얀, 순수해 보이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이 사라진 뒤에도 서호의 다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효과가 없군요.”
확실히 안겔에게서 나온 힘은 다리 주변을 겉돌 뿐 딱히 효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실망보다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호가 당혹스러워하는 안겔에게 웃어 보였다.
“아프지는 않으니 괜찮아요.”
그때 로제타가 나섰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로제타?”
서호가 로제타를 돌아봤다. 치료를 실패한 걸로 무슨 말이라도 할까 걱정하는데 로제타가 서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며 안겔에게 물었다.
“발목에 운명의 실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 그건 괜찮나?”
로제타의 질문에 다시 발목을 내려다보던 안겔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다시 고개를 든 안겔이 예의 그 모호한 시선으로 로제타의 눈치를 살폈다. 서호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로제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 없이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
로제타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서호는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위협?’
서호가 느낀 것을 안겔 역시 느꼈을까? 창백해진 안겔이 답했다.
“…여전히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선 몇 개의 중간 부분이 얇아진 것 같기는 하네요.”
둘의 분위기를 살피던 서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안겔이 서호의 발목을 손으로 가리켰다.
“서호님의 발목에 매달려 있는 실과 폐하의 발에 달린 실의 중간 부분.”
그 손이 로제타와 서호의 발목 사이인 허공 가운데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이쯤의 실이 얇아져 있어요. 물론 몇 개가 그런 거고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 말은 운명의 실이 끊길 뻔했다는 소리였다.
‘운명의 실이 끊길 수도 있는 건가?’
의문이 생겼으나 무엇을, 또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로제타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있나?”
그의 물음에 안겔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운명의 실은 당사자 간의 관계에 따라 얇아지기도 하고 굵어지기도 하지만 딱히 두 분 사이에 뭔가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고요.”
실이라는 게 정말 끊기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확인을 받고 싶었으나 로제타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 우리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어.”
“그렇다면 저도 잘….”
로제타가 툭 내뱉었다.
“쓸모없군.”
로제타의 말에는 싹을 자르는 듯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안겔이 입술을 깨물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똑같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로제타는 안겔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로제타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안겔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갑작스러운 변화에 서호가 조심스럽게 로제타를 붙들었다. 그러자 로제타가 서호를 돌아보며 아직도 붙잡고 있던 서호의 손목을 타고 내려가 손등을 토닥였다.
서호를 향해 웃어 보이던 것도 잠시, 다시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로제타가 안겔에게 명령했다.
“신전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알아 와.”
“네?”
“신전이 내게 선물해 준 물건 아닌가? 문제가 생겼으니 해결 방법을 알아 와.”
그러자 안겔이 반발했다.
“혹,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러니 이런 일이 또 벌어지기 전에 방법을 알아 와야겠지.”
“…….”
로제타가 그의 뜻을 확고히 했다.
“신녀, 오늘 궁의 문이 닫히기 전 황궁을 떠나게.”
서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게 서호는 몰랐던 로제타의 또 다른 면이었다.
자신이 아는 모습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새로웠다. 냉랭한 푸른 눈이 안겔을 압박하는 걸 바라보며 서호는 한숨을 삼켰다.
‘둘 다 똑같이 구는구나.’
감정의 결은 달랐으나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대놓고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사이였다.
***
엄청난 모욕이었다.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안겔은 정말 최선을 다해 목구멍 안으로 말을 쑤셔 넣었다.
“…네, 알겠습니다. 폐하.”
답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심력을 전부 소진했는데 로제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만족할 만한 답을 가져와야 할 거야.”
안겔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다. 자신은 신녀니까. 신전의 위상을 위해서, 아버지의 위상을 위해서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줘야 했다.
‘저 빌어먹을 놈한테 내 패배를 보여줄 순 없어.’
안겔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표정을 가려주길 바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제타는 언제나 그렇듯 안겔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자, 서호.”
일그러진 얼굴이 어떻게 노력해도 펴지지 않았다. 그렇게 로제타와 서호가 사라지고 응접실에 홀로 남은 안겔은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안겔을 비웃는 것처럼 상황은 순식간에 변했다.
‘감히!’
방금 로제타의 행동은 강압이었다.
신전 소속인 안겔은 일단 제도상 황제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로제타는 일개 신관도 아닌, 유일한 신녀인 안겔에게 저런 태도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 싶었고 그게 안 된다면 황제의 말을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는 신에게 이름을 받은 자였다.
신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교황과 동급으로 취급된다는 소리다.
‘신전이 이 사실을 알아도 그냥 넘어가겠지.’
결국 분노를 숨기며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 말고는 안겔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이방인이 있잖아.’
서호가 조금 전 겪은 일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었다. 안겔은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건 신전으로 가서 해도 됐다. 지금은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아까 그건….’
서호의 발 주위를 맴돌던 그 오묘한 기운. 자신의 성력까지 밀어내던 그 기운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야.’
그건 영혼에 새겨진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그 묘한 힘은 아버지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니었다.
서호가 이번에 겪은 그것은 한낱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끌려가는 것 같았다고 했나?’
더군다나 멍이 든 발목의 위치가 너무 절묘했다. 운명의 실이 엮인 발목, 그리고 끊어질 뻔한 실.
책에 적힌 기록들을 떠올렸다. 빠짐없이 최악으로 치닫던 운명 중 딱 하나 유일하게 운명과 사이가 좋았던 이에 대한 마지막 기록.
이곳에도 잘 적응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말은 똑같았다.
[순리를 거스를 순 없었다. 둘을 이어주는 붉은 실이 얇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방인은 다시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미 태워버린 두 번째 책의 마지막 구절. 안겔이 거리낌 없이, 혹시 모를 가능성을 알면서도 황제에게 거울을 건네줄 수 있었던 이유.
[순리를 지키는 한 어떤 경우에도 그 끝은 정해져 있기에 거울을 봉인한다.]
애당초 거울을 통해 이 세계로 온 것 자체가 순리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세계가 순리를 지키려고 한다면?
‘본래 세계가 자신의 인간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라면 서호가 꾼 꿈의 손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서호의 발목. 그리고 순리.
‘…설령 본인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안겔의 얼굴에 말간 웃음이 차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안겔이 뭘 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둘은 알아서 헤어지게 된다는 소리 아닌가.
‘지금처럼 황제와 서호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서호가 본래 세계로 돌아가게 됐을 때 황제는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한번 찾아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