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36화 (36/155)

#36

마주친 로제타의 푸른 눈이 깊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뚫어지게 서호를 쳐다보다 조금 더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어색하던 것도 잠시, 서호는 로제타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멍하니 로제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가 점점 더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누군가 화들짝 놀라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로제타에게 너무 집중한 탓인지 그 소리는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푸른 눈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신녀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서호가 문을 돌아봤다. 푸티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인 듯 폴짝 자리에서 뛰어올랐다가 로제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푸티의 시선에 서호가 문을 보던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쳐다봤다. 싸늘한 얼굴이었다.

‘아까도 이런 표정이었나?’

눈에만 집중하고 있던 탓에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서호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로제타가 괜찮다는 듯 손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조금 놀라서.”

“아, 네.”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푸티가 물었다.

“어찌할까요?”

“응접실로 모셔라.”

로제타의 말에 푸티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둘만 남자 로제타가 다시 서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서호.”

로제타는 웃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정말 놀라서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서호가 고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안겔에게는 신력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로제타의 말에 서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안 그래도 안겔은 로제타를 싫어하는데, 로제타의 힘을 서호가 받았다고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다.

서호를 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로제타에게 나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냥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꿈을 꿨다고만 이야기해.”

“네.”

“그리고 안겔에게 붉은 실이 멀쩡한지도 물어야겠어.”

서호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로제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하지만 로제타는 서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에게 끌려 응접실로 향하면서 서호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

로제타는 서호가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어.’

로제타는 안겔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무언가 느낀 듯 힐끗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서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서호가 로제타를 따라 엷게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웃음. 보고만 있어도 자연스레 입꼬리가 따라 올라가는 고운 웃음이었다. 서호를 따라 웃던 로제타는 그가 다시 안겔을 돌아보자 입꼬리를 내렸다.

서호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선을 그어놓은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호는 로제타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좋아한다는 감정에 한계를 정해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같은 남자라서?

제국에서도 같은 성을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종종 있었으니 가능성이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로제타가 남자라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지?’

다정하고 친절하며 사려 깊은 서호는 늦은 밤, 잠이 들고 나면 지독히 외로워 보이곤 했다. 거울을 통해 봤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외로워하면서도 서호는 다른 이의 손길을 원하지 않았다.

로제타가 그를 만지는 것 자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손길이 길어지면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 손을 떼어내는 것이다.

로제타가 그를 만질 때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짙어지기도 하는 걸로 봐서 스킨십을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서호는 다른 이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방 밖으로 나가 다른 이를 만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소에 푸티 외에 다른 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겔을 멀리해 달라는 로제타의 말에도 반발하지 않았으며 마법사 아리스와도 수업 외에는 따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고 방 밖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정말 이상하지.’

물론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이곳이 낯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서호의 그런 행동에서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거리감.’

서호는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그렇게 단정 지어 버리기에는 서호가 로제타에게 너무 쉽게 마음을 열었다.

아무리 그간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고 해도, 로제타의 눈을 봐왔다고 해도 그건 이상했다.

‘운명이라서 그렇다기에는….’

서로가 운명이라서 보는 순간 로제타에게 마음을 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 서호에게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서호는 묘한 얼굴로 답을 했다.

편안함과 따뜻함,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보이는 뼈가 시리도록 서늘한 외로움.

‘외로움이라.’

로제타는 그 외로움을 보는 순간 커다란 충동을 느꼈다. 외로움을 채워주고 싶은 동시에 저 외로움을 더 자극해 서호가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은 기이한 마음.

‘아무도 그 곁에 두지 않고 내 품 안에만 있도록 만들면….’

사람을 가까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전해주는 애정을 피하지도 못하는 사람.

지독히도 외로워 보이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너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 이야기한다면 서호는 그를 받아줄 것 같았다.

‘입을 맞춰도 놀랄지언정 받아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사용인이 등장해버렸지만.

‘차라리 잘됐어.’

로제타는 스스로의 직감을 잘 믿는 편이었다. 그는 이번에 서호에게 성애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됐다.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해.’

로제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욕심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가 시간이 지나자 그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처럼,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 있던 자신은 변했다.

서호가 자신을 걱정하고 이 감정에 미약하게나마 반응해 호의를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됐으니까. 그러니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서호가 더 마음을 열 때까지, 서호가 먼저 손을 뻗어 자신을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인내가 필요할 때지.’

로제타는 손을 뻗어 서호의 손을 붙잡았다. 안겔을 쳐다보고 있던 서호가 놀란 듯 로제타를 돌아봤다가 말려 올라간 로제타의 입술 끝을 보고 함께 웃어줬다.

로제타는 서호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조금씩 그를 만지고 그의 옆에서 다정함을 느끼는 것 정도로 참아야 했다.

로제타는 몸 안 깊숙한 곳 시커먼 어둠 속에서 입맛을 다시는 야수를 내리눌렀다. 로제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서호가 눈치채더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환하게.

***

서호는 안겔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의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서호와 눈이 마주친 로제타가 빙그레 웃어줬다.

웃음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웠지만 그럼에도 로제타는 여전히 조금 이상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그때 안겔이 서호에게 물어왔다.

“그러니까 이상한 꿈을 꾸셨다고요?”

서호는 안겔을 바라봤다.

사실 서호는 저번의 만남을 끝으로 안겔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제타가 안겔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본래도 안겔과 가까워질 생각이 없긴 했지만, 그날의 대화를 통해 서호 역시 또다시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날 안겔은 끈질기게 서호와 로제타의 반응을 관찰했다. 이야기 내내 서호의 반응을 살폈으며 말끝에 묘한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이야기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자신처럼 갑작스레 이 세계로 끌려온 사내가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고 그로 인해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운명이라는 사람과도 종종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가장 긴밀한 사이는 운명의 상대였다고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거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진실을 모두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항상 말을 모호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는 탐색하는 눈으로 서호를 바라봤으며 마지막에는 꼭 로제타를 쳐다봤다.

‘불쾌해.’

불쾌하다니. 누군가의 시선에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던가.

‘하지만 정말, 그 시선은….’

서호는 자신을 향한 시선보다 로제타를 쳐다보는 안겔의 시선이 더 불편했다.

‘여태까지 항상 저런 눈으로 로제타를 봤겠지.’

그리고 만남의 끝에 가서 안겔은 황성에 더 머물겠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해줄 이야기가 많고 서호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로제타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안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신녀라고 하니까 로제타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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