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3장. 어둠과 빛
안겔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며칠 전 서호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자 이토록 개운할 수가 없었다.
안겔은 은근하게 그들이 꽤 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와 관련해서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기록이 남지 않아서요. 뭐, 운명이니까요.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들의 끝은 행복하지 않았다. 이 세계로 끌려왔던 금발의 사내는 일 년 만에 다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적혀 있지 않지만, 실이 끊어짐과 동시에 그가 떠났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지.’
안겔은 그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묘해졌던 서호를 떠올리며 웃다가 그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호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로제타를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내렸다.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의 서호와는 달리 로제타는 그런 과거의 일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 아예 안겔의 이야기에 관심도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지도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열이 받다가도 동시에 그를 잃은 뒤 로제타가 겪을 고통을 짐작하니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래,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끝은 망하게 되어 있어.’
지금 모습은 꼴 보기 싫었지만 다가올 미래를 기약하며 안겔은 차를 마셨다. 지금 사이가 나쁘지 않을수록 훗날이 더 괴로울 테니.
그렇게 머지않아 있을 기쁜 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고급 차였으나 입안이 썼다.
“하아.”
아마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서호라는 존재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흥분이 가라앉자 미약한 죄책감이 안겔을 건드렸다.
로제타에 대한 악감정으로 건넨 거울을 통해 이 세계로 온 이방인. 안겔은 그녀와 로제타 사이에 운이 나쁘게 엮이게 된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에 드니까.’
그토록 맑고 깨끗한 눈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신녀가 되고 난 이후 그렇게 아무런 흑심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건 황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거야.’
이방인을 향한 얄팍한 호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다만 서호가 이쪽을 밀어내는 건 곤란했다. 서호와 로제타가 자신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가까이에서 로제타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친해지는 게 좋겠지.’
오늘은 서호에게 점심을 함께하자고 권유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사용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요즘 로제타는 집무실로 나가 일을 본다고 했다. 로제타가 없는 틈을 노려 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 볼 참이었다.
첫날과 달리 자신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던 서호의 태도에 안겔은 아직 해줄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부러 궁에 남기를 자처했다.
‘핑계가 오래가지는 않겠지.’
그러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자주 서호를 만나 로제타에 대한 의심과 불안, 그녀에 대한 믿음을 만들 생각이었다.
‘저번 만남 이후로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으니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녀님, 폐하께 연락이 왔습니다.”
“폐하에게서?”
“네.”
원래 서호를 만나려고 하기는 했으나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님 경고인가?’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겔이 시녀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일이 생기셨다고 급하게 만나 뵙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시던?”
시녀가 답했다.
“그것까지 말씀하진 않으셨고, 신녀님께서 꼭 필요하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이 꼭 필요하다.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급하다는 이야기를 보아하니 그 이방인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내게 경고하기 위해 급하다는 말을 들먹일 인간은 아니지.’
안겔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준비하자. 폐하께서 도움을 청하시는 일은 드무시니, 백성 된 도리로 당연히 찾아봬야지.”
***
서호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상한 꿈과 꿈에서 들린 목소리, 그리고 로제타의 갑작스러운 이야기까지.
‘신의 힘이라니? 새벽의 힘을 받았다고?’
뭔가를 받았다는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다거나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서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로제타. 뭔가를 받았다면 제가 느끼지 않았을까요? 꿈에서는 느껴졌는데, 깨고 나서는 딱히 느끼지 못하겠어요.”
“힘에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서호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봤다.
“안 받은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럼 시험을 해볼까?”
“네?”
로제타는 정말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런 태도를 보니 정말 그의 말이 맞는 건가 싶다가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를 완전히 믿기 어려웠다.
로제타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화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푸티, 저거 꽃이 피는 식물이던가?”
“아, 네.”
“들고 와.”
푸티가 작은 화분을 가지고 로제타에게 다가왔다. 화분을 받아 든 로제타가 서호에게 그걸 건네주며 말했다.
“자, 서호. 꽃이 피기를 간절히 원해 봐.”
“꽃이 피기를요?”
의문 가득한 서호의 반응에 로제타가 잠시 고민하다가 설명했다.
“뭉뚱그려 치료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외에도 여러 능력이 있지. 생명과 관련된 느낌인데. 나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어.”
정말 그랬다.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생명이라니? 도대체 그게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서호에게 로제타가 화분을 들이밀며 말했다.
“서호. 풀잎을 손으로 만져 봐. 그리고 느껴 봐.”
서호는 그를 힐끗 바라봤다가 잔뜩 기대하는 로제타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식물을 매만졌다. 로제타가 서호를 돕듯 말을 이었다.
“뭐가 느껴져?”
매끈거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풀잎에는 솜털이 나 있었다. 서호는 보송보송한 잎을 매만지며 답했다.
“딱히, 뭐가 느껴지기보다는…. 잎이 보송보송하네요. 털이 있나 봐요.”
더 말해 보라는 로제타의 눈짓에 서호가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풀 냄새도 나고요.”
로제타가 잘했다는 듯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 식물에 꽃이 핀다고 생각해 봐. 무슨 색의 꽃이 피지?”
서호에게 하는 말끝에 푸티에게 묻자 그가 곧장 답해왔다.
“보라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꽃입니다.”
“그렇다네. 상상해 봐. 흰색의 꽃이 피는 모습을, 보라색의 꽃이 피어나는 걸.”
서호는 망설이듯 식물을 내려다봤다.
‘여기서 안 되면 로제타도 포기하겠지.’
로제타가 실망하는 건 안타깝지만 아마 이번 일은 로제타의 착각일 것이다. 서호는 실패할 것을 확신했으나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해서 로제타의 말을 따랐다.
식물을 만지며 흰 꽃과 보라색 꽃이 피는 걸 상상했다. 풀잎을 매만지며 상상을 이어 가던 서호는 식물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입을 열었다.
“봐요, 아무런 반응이….”
말을 하던 서호는 순간 손을 움찔 떨었다. 심장을 시작으로 무언가가 손끝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호의 손끝에서 반짝거리는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서호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봤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앙증맞은 꽃이 피어 있었다.
“어….”
멍청한 소리를 내고 있는데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봐라, 그대도 이제 나와 같은 새벽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이게 진짜라고요?”
손에서 이상한 빛이 나더니 꽃이 폈다.
최근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과했다.
더군다나 그냥 힘도 아니고 신력이었다. 로제타의 힘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는.
확인까지 하고 나니 그의 힘을 가져온 것이 확실해 보였다. 서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기쁘게 웃고 있던 로제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지 서호?”
“아니, 너무 현실감이 없기도 하고…. 그리고 로제타에게 미안해서요.”
“아까도 말했지만, 서호. 내게 필요 없는 힘이야. 그리고 나는 그대가 나와 같은 힘을 가져서 기뻐.”
로제타가 눈을 휘며 말했다.
“그대와 더 강하게 연결된 것 같아. 같은 신력을 가졌잖아.”
“아.”
순간 먼젓번 든 생각이 떠올랐다.
로제타가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 신력을 가졌다는, 신에게 이름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는 로제타가 참 외로웠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 로제타의 말처럼 그와 같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로제타가 이제 덜 외로울까?’
로제타의 힘을 빼앗은 것에 불과한데 그는 이렇게 기뻐했다. 로제타는 정말 많이 외로웠던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서호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았고.
서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로제타가 정말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원래 로제타의 것이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그러자 로제타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러면 서호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야겠어.”
“네, 그럴게요.”
로제타가 놀란 듯 되물었다.
“정말?”
아까도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서 새삼스러웠다.
“네. 어차피 지금도 그렇잖아요.”
“…서호도 나와 있는 게 좋아?”
로제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따뜻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로제타는 자신을 필요로 해주니까.
“네? 네. 그렇죠?”
서호의 말에 로제타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로제타의 얼굴에 서호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