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34화 (34/155)

#34

푸티의 말처럼 지금 여기서 화를 내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다행히 서호는 평소보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로제타가 서호의 발목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잠시 만져 봐도 되겠어?”

“네.”

로제타는 서호의 발목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혹여 서호가 고통을 느낄까 조심조심 발목 주변을 만지던 로제타는 서호의 발목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정확히는 발목 외에도 발 전체에서. 상처가 난 발목에 가장 기운이 많이 밀집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 발바닥을 비롯한 발등, 발가락까지 곳곳에 정체 모를 기운이 닿아 있었다.

로제타는 서호에게 물었다.

“정확히 어떤 꿈을 꿨어?”

서호가 작게 숨을 몰아쉬더니 답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도, 눈을 뜰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추정되는 게 제 발목을 붙잡았어요. 그리고 세게 잡아당겼고요.”

멍 자국의 형태를 보니 손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잡아당겼다고?”

“네, 그 손에 끌려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신히 발에 힘을 줘서 몇 번 내리쳤는데….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어요.”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서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제타가 그런 서호를 토닥였다. 서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었다.

“끌려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어요.”

“목소리?”

“네,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끌려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잠시 고민하더니 누가 저를 원하니까 힘을 나눠줘도 괜찮을 거라고, 새벽이 저를 도와줄 거라고 했어요.”

그제야 로제타는 갑자기 사라진 그의 힘이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몸에 활력이 돌더라고요. 그렇게 그 손을 풀어내고 잠에서 깨어났어요.”

로제타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정체 모를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서호의 말과 조금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조합해 보자면…. 로제타가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소유욕을 꼭꼭 숨기며 다정하게 서호를 불렀다.

“서호.”

“네?”

로제타가 서호의 손을 붙들었다.

“그 손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 나도 확실히 말해줄 수 없어.”

그리고 서호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옭아매듯 서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네가 들었던 목소리가 뭔지는 알겠어.”

“그게 뭔데요?”

로제타가 서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답했다.

“신의 목소리.”

“네?”

로제타는 혀를 내어 서호의 손등을 핥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입꼬리를 더 당겨 웃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소리를 삼키며 로제타가 설명했다.

“내 힘 중 일부가 사라졌어. 정확히는 반쯤 사라졌어.”

순간 뒤에서 푸티가 큰 소리를 냈다.

“네? 폐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로제타는 푸티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로제타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푸티가 아니라 서호였다.

“그러니 내 예상이 맞다면, 그대가 말하는 새벽은 내 것이겠지.”

“설마….”

로제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힘이 그대에게 넘어간 것 같군.”

서호가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네? 어, 어떻게 해야 다시 돌려줄 수 있어요?”

돌려주다니, 절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힘을 나눠 가지다니. 이로써 서호는 로제타와 더 가까워진 것이다. 돌려준다고 해도 로제타는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 것이 서호에게로 갔어.’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딱히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데.”

그러자 서호의 얼굴에 황당함이 들어찼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 힘은….”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를 지키기 위해 그 힘이 필요하다면 나는 상관없어.”

로제타는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서호의 말을 막았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대에게 이 힘을 주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더 나와 함께….”

“폐하.”

로제타가 그의 진득한 속내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푸티가 로제타를 말렸다. 로제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꿨다.

“…그대가 그 힘을 가져도 나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로제타의 몸에 나쁜 것 아니에요?”

“딱히. 내가 평소 쓰지 않던 힘이야. 그러니까 나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지.”

“로제타가 평소 쓰지 않던 힘이요?”

로제타는 그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새벽의 힘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어.”

로제타는 그가 자주 사용하던 어둠의 힘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내가 쓰는 어둠.”

로제타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빛.”

“빛이요?”

“새벽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시간이야. 어둠을 쓰는 게 더 편해서 어둠을 썼을 뿐. 본래 빛도 내게 속한 힘이지.”

서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그건 정확히 어떤 힘인데요?”

로제타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어둠의 힘도 아직 정확히 뭐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당연히 빛에 대한 것도 잘 몰랐다.

‘잘 쓰지 않던 것이기도 하고.’

로제타는 일단 그가 아는 것만을 답했다.

“일단 가장 대표적인 건 치료?”

“네?”

뒤에서 푸티의 새된 소리가 들려왔으나 로제타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서호를 바라봤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서호가 물었다.

“치료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뭐한데, 아무튼 딱히 쓸 일이 없었지. 애당초 다치지를 않으니까.”

신력 덕에 무력적으로도 강해졌지만 신체 자체도 다른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진 로제타는 치료가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다친 이들을 치료해주고 아픈 이들을 돌봐주고 싶어 하는 성향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로제타는 그 힘을 쓸 일이 없었다.

사실 그 외에도 빛의 힘을 쓰면 사람들이 여러모로 더 귀찮게 굴리라는 것 정도는 로제타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쓸 기회가 없었고, 쓰지 않다 보니 그런 힘이 있다는 것도 거의 잊고 지냈다. 서호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정도로 잊고 지내던 힘.

‘그런데 그걸 서호가 가지게 됐다면….’

신력을 가지게 된 이후로 가장 뿌듯한 날이었다. 로제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대가 그 힘을 가지면 나로서는 안심이야. 굳이 그 힘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아도 이제 그대의 몸은 평범한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해질 테니까.”

이쪽 세계의 신력을 가지게 됐으니 서호는 더욱 이 세계에 묶이지 않을까.

‘하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순 없지.’

로제타가 힐끗 서호의 멍든 발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아픈가?”

“…아니요. 그냥 보기 꺼려지는 걸 제외하면 딱히 아무렇지 않아요.”

빛의 힘이 서호에게 있다는 걸 깨닫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로제타가 서호의 얇은 발목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제안했다.

“그럼 잠시 치료를 뒤로 미루지. 발목에 남은 자국은 신녀에게 물어봐야겠군.”

거울을 통해 이 세계로 온 서호가 이해 못 할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신녀에게 이 일을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잘됐어. 전날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아 떠나지 않았잖아?”

운이 좋았다. 사실 전날 신녀가 일부러 말을 늘이며 황궁에 머물 시간을 늘리는 것이 매우 불쾌했는데 덕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모르겠다는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잠시 어두운 상상을 하던 로제타는 그의 앞에 있는 서호를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서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두려움, 불안함, 미안함이 범벅이 되어 한껏 가라앉은 서호의 분위기에 로제타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감쌌다.

로제타의 손길에 서호가 그와 눈을 맞췄다. 괜찮다는 의미로 눈웃음을 친 로제타가 푸티를 쳐다보지도 않고 명령을 내렸다.

“푸티, 신녀와 빨리 약속을 잡아.”

푸티가 눈치 좋게 뒤로 물러났다.

“네.”

로제타는 푸티가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서호를 달랬다.

“걱정할 것 없어. 그대가 신의 힘을 가진 이상, 삿된 것들이 그대를 어찌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서호가 불안한 얼굴로 로제타를 바라봤다.

“…정말 괜찮은 게 맞죠? 그러니까, 로제타의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거죠?”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는 다시 한번 인내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로제타가 서호의 볼을 감쌌던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답했다.

“그래. 괜찮아. 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로제타의 말에 서호가 정색을 했다.

“로제타.”

로제타는 남은 손을 들어 두 손으로 서호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그럼 그때는 서호가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면 되지.”

로제타가 은근한 미소를 흘리며 서호를 바라봤다.

“어차피 서호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을 거잖아? 내가 언제 상태가 나빠질지 모르니 계속 내 옆에 있어 줘.”

로제타가 서호에게로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나도 서호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대의 곁에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흔들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던 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고맙지.”

로제타의 양손을 붙잡은 서호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그…, 신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로제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웬일로 감사한 일이 생겼네. 그대를 지켜주다니.”

정말이었다. 단 한 번도 신에게 고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 위치가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 신 덕에 서호를 지킬 수 있었고 덕분에 서호와 더 강하게 연결됐으니까.

로제타가 목을 울리며 숨죽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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